영화의 위로 18 . 그랜 토리노(2008)
어쩌다보니 십 대, 이십 대를 기지촌에서 보냈다. 십 대 시절엔 의정부, 이 십대엔 평택이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미국 사람들을 알게 됐는데 가장 친했던 사람은 두 중년 남자였다. 한 사람은 아일랜드계 백인으로, 뉴욕인가 보스턴 출신의, 전형적인 동부의 민주당 지지자이자 성공회 신자인 도서관 관장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이탈리아계 백인으로 전형적인 텍사스의 공화당 지지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동부 사람은 군대에서 대학을 다녔고 도서관학, 우리식으로 말하면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걸로 알고 있다. 그는 바로크 음악과 비밥과 쿨 재즈, 고흐를 좋아했다. 그 스스로도 그림 그리는 게 취미여서 집 주변의 농촌 풍경을 종종 그리곤 했다. 사무엘 아담스 맥주를 사랑했고, 주말마다 마라톤 연습을 했으며, 치노 팬츠와 네이비 블레이저, 버튼다운 셔츠가 잘 어울렸다. 대학 시절의 내 스타일은 그 사람의 흉내였고, 지금 내 취향의 절반 이상은 그 사람의 것이다.
텍사스 사람은 UH-1 이로코이즈 헬기 부대에 있었다고 했다. 그 헬기에서 하도 뛰어내려선지 지금도 무릎이 안 좋다. 제대 후 이 헬기를 비롯한 다양한 헬기를 정비하는 엔지니어가 됐고, 현재도 헬기 전체의 부품을 다 뜯은 후 다시 조립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 회사에서는 그의 은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학기가 끝난 나를 데리러 종종 학교에 오곤 했고, 어느 생일에는 A-2 항공 재킷을 선물하기도 했다. 20년도 더 된 그 재킷은 아직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나와 동행한다. 그는 나에게 똘레랑스의 의미도 깨우치게 했는데, 미국 영화 속 상투적인 남부 백인들과는 달리 다른 인종이나 다른 삶에 대한 편견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의 진짜 보수의 상징적인 어른이라는 걸 <그랜토리노>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평생 다른 정당을 지지했고, 한 사람은 도서관 사서로, 한 사람은 엔지니어로 평생을 살았지만 둘 다 <그랜토리노>의 주인공을 닮았다. 여자와 약자를 보호하고, 소외 된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하는 걸, 그것을 당연시 했다.
몇 년 전, 텍사스 어르신의 부산 유엔묘지 가이드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각 국가의 위령탑과 기념비를 차분히 카메라에 담으며 걸었다. 검은 화강석 패널로 만들어진 전몰장병 추모명비에 다다르자 걸음을 잠시 멈춘 후 천천히 명단을 훑어보며 걸었다. 21번 패널부터는 더 천천히 걸었다.
유엔묘지, 공식명칭으로는 재한유엔기념공원에는 140개의 검은색 화강석 판으로 이뤄진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가 있다. 4만 895명의 전사 및 실종 참전 용사의 명단이 써져 있는데, 이 중 21번부터 140번까지는 오직 미군의 명단이다. 명단은 주별로 분류되어 있는데 앨라배마로 시작해 와이오밍으로 끝난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18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이 참전했고 이중 3만6492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미국은 전사자 유해 모두를 선박을 통해 자국으로 옮겨 갔다.
<그랜토리노>는 살아 귀향한 노병의 두 번째 전쟁 이야기다. 한국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온 월트 코왈스키는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평생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다. 얼마 전 아내의 장례를 치렀고, 신앙엔 냉소적이고 아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다. 요즘엔 늙은 개 데이지와 포치에 앉아 블루리본 맥주를 마시며 집 앞 도로를 감시하듯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이런 월트도 애지중지하는 건 있다. 바로 포드에서 일하던 시절 직접 조립한 72년형 그랜토리노와 M-1 개런드 소총이다.
월트의 일상은 삭막하다. 삼주에 한 번씩 이탈리아계 백인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그때마다 험한 욕을 주고받으며 이웃의 정(?)을 쌓는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일본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일본 자동차를 팔고 이웃에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집 몽족 소년이 그의 차를 훔치려다 들키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월트는 포치 밖의 이웃에게,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걸 보기만 하던, 그 낯선 타인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하고, 결국 그들과 관계를 맺고 이웃이 된다. 그 이웃을 위해 최후의 전쟁에, 한 사람의 군인으로, 미국인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어른으로 마지막 임무에 나선다.
그 마지막 임무를 통해 그가 지키려한 것이 무엇인지, 왜 낯선 몽족 가족을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던졌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에 자주 나오는 인종차별적 표현은 그 이유의 탐색을 더 미궁에 빠뜨린다. 이발소 주인을 이탈리아계 미친놈으로 부르고, 이발비를 얘기하자 “네 아버지, 유대인이냐 왜 맨 날 이발비를 올리느냐.”고 유대인까지 싸잡아 욕한다. 이발소 주인은 월트에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망년 든 노인네.”같은 표현도 서슴지 않고, 폴란드계를 비하하는 표현인 “폴랙(Polack)으로도 부른다. 건설 현장 책임자인 아일랜드계 백인을 좋은 자동차나 탐내는 무리들로 폄하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시아계를 싸잡아 비하하는 용어도 등장한다.
미국 문화계의 진정한 보수로 존경받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 차별을 보여주려 이런 장면을 넣은 것은 아니다. 감독은 이를 통해 미국에 사는 모두가 과거 한때 소외당했던 이민자이자 이방인이었으며, 현재 그 소외와 이방인의 위치에 있는 이라도 그는 미국인이며, 처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임을 말한다. 이를 위해 일부러 미국 백인 중에서도 성향이 분명해서 영화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등을 등장시킨 것이다.
조롱과 농담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양한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고, 그 다양성을 에너지로 성장하는, 말 그대로 문화와 인종의 용광로이자 이민자의 나라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너를 비하할 수 있다면, 나 또한 누군가 비하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또 이렇게 다른 나도 미국인이듯 나와 다른 너도 미국인이라는 걸, 궁극적으론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타자에 대한 존중과 연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우리의 맥락에 적용해보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를 비하하거나 조롱할 수 있다면 그들도 우리에게 대놓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누군가 비하와 폄하가 당연한 소수자라면, 우리도 그런 타자 중 한명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월트가 죽은 후 가장 미국적인 자동차인 그랜토리노가 월트의 손녀가 아니라 몽족 소년에게 유산으로 남겨지는 장면에서 노장 감독의 메시지는 더 강하게 이어진다. 이민자의 나라의 정신을, 그 서로 다름을 수긍하고 용인하는, 똘레랑스의 나라 미국의 정신을 새로운 이민자가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미국이 미국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정신은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고 그 존엄성이 훼손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신으로 확대 된다. 감독은 결국 그 정신이 이민자가 세운 나라 미국이 진정으로 지켜내야 할 가치이고, 나아가 종교와 인종, 세대와 성별이 다른 타자에 대한 경계를 당연시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잊지 않고 지켜내야만 하는 가치임을, 월트가 한국과 미국에서 치른 두 전쟁에서 지키려한 것이 바로 그 가치임을 말한다.
저 미국의 가치, 미국의 어른이 다음 세대를 위해 지키려 하는 것이 진짜 미국 보수의 가치다. 그 가치에 담긴 철학은 먼저, 과거를 긍정하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내 나름의 삶의 철학과 행태를 굳건히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약자를 위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총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존재로서의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을 교육하고 길을 터주는 것이다. 여성과 약자를 돕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와 사회의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도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삶에 보람을 찾거나 없던 정체성을 회복하거나 자존감을 찾으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누적 된 과거의 삶과 현재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존재는 이미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삶의 보람을 찾기 위해,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남을 도우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의 정상적인 백인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 될 무엇, 미국 자동차를 타고 미국 맥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그 무엇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미국의 진짜 보수는 영웅의 깃발을 휘두르지 않는다. 진짜 보수는 영웅의 이야기에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설리 -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한 이야기이고, 이 때문에 미국인들이 그를 진정한 보수의 화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건이 벌어졌고 영웅이 탄생했어도 할 건 해야 하고, 지켜야 될 건 지켜야 하며 그 이후에 영웅에 찬사를 보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미국 보수의 마인드인 것이다.
또 그들은 타국의 군인들을 존경하고 타문화를 존중한다. 특히 한국에서의 파병 기간이 길면 길수록, 계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사랑하는 이의 배경이나 현재의 상황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거나 저울질 하지 않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필자가 의정부의 한미야전사령부 앞에 살던 80년대만 해도 미군 장교가 한국 여성이랑 결혼하기 위해선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육사를 나온 고급 장교들은 속된 말로 옷을 벗긴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앞에 솔직했고, 오늘의 삶에 충실했으며, 미래를 위해 훈련할 줄 알았다. 어린 시절, 처음 본 조깅하는 사람도 그들이었고, 짐(Gym)에 간다는 말을 들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난 해, 5월 22일, 토요일, 부산 남구청 대강당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의 사진을 찍는 라미 현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그 강연에서 작가는 한 노병의 말을 전했다. 그 노병은 한 인간의 자유를 위해 전사 세 명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희생에 감사하고 늦게 찾아뵈어서 미안하다 했더니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더 열심히 싸워 한반도 전체에 자유를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도 같은 생각인 걸까? 전사의 희생 없이 이 사회의 가치는 지켜 질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걸 말하기 위해 세상을 응시한 채 노년을 보내던 노병에게 자기를 불살라 그 세상의 가치를 훼손하는 이에게 법의 심판이 떨어지게 하는 최후의 임무를 맡긴 걸까? 이 정신, 어쩌면 평등, 어쩌면 자유일 수 있는 이 정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 정신을 지키고 살아가려 하는 다음 세대를 지켜주고 타자를 지켜주기 위해 월트는 군인으로 한번, 어른으로 또, 한번, 그렇게 두 번의 전쟁을 치른 걸까?
최후의 전쟁에서 월트는 아무도 죽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희생만으로 공동체의 가치와 그 가치를 이어갈 어린 이웃을 살린다. 이 전사의 일, 아무도 죽이지 않고 스스로의 인생을 불살라, 지켜야할 것을 지키는 일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군인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전쟁 없이,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서 생의 한순간을 받쳐 묵묵히 임무를 다함으로써 조국을 지키고 국민을 살리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재한유엔기념공원에 갈 때마다 <그랜토리노>의 그 장면, 월트가 갱들을 향해 손가락 총을 꺼내들던 장면을 떠올린다. 이어 질문한다. 여기 잠든 이들은 누구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위해 총을 들었나? 낯선 나라에서 어린 병사를 죽여 얻은 훈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월트는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그 마지막 전쟁을 결심한 것일까?
70년 전, 분명, 그의 소총으로 지켜낸 가치가 있다. <그랜토리노>는 한국전의 용사들이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할 존엄과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고, 그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라미 작가의 강연을 들어보니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참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름도 처음 듣는, 지도의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나라를 위해 참전했다. 그 나라에 사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강탈당한 위기에 처한, 핍박 받는 이를 위해 참전하여 피를 흘렸다. 그렇게 청춘과 생명을 받쳐 전사로서 지켜야내야 할 것을 지켜내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랜토리노>를 보면 자연스레 <여인의 향기>가 떠오른다. 두 영화 모두 전쟁과 군대에서 얻은 유무형의 상흔을 갖고 사는 노병과 그 노병과 관계를 맺고 있는 소년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 나오는 소년들은 그 세계에 속해 있지만 외부자 취급을 당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두 소년 모두 한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여인의 향기>에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친구를 밀고하지 않으려는 고결함이 그 가치고, <그랜토리노>에선 외부자인 이민자에서 한 사람의 성실한 미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려는 의지가 그 가치다.
이 두 소년이 지키고 가꾸려는 가치는 결국 미국의 가치이고 어찌 보면 민주 시민의 가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두 노병이 두 소년을 보호하는 것은 그 사회의 가치를 보전하여 그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주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두 영화 속 노병들은 그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소년의 동반자가 된다. 두 영화의 차이는 그 여정 이후의 삶이다. 슬레이드 중령은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군대에서의 기억과 화해하고 민간인의 삶을 받아들인다. 반면 <그랜토리노>는 끝까지 군인으로 살다 간다.
<여인의 향기>의 슬레이드 중령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소년을 위해 변호를 시작하며 자신이 눈이 멀지 않았던 때였다면 이 학교를 다 불살라 버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진짜 불이라는 폭력 대신 말이라는 불, 그야말로 사자후 같은 연설로 학교의 구태를 일거에 불사르고 그 자리에 앉은 소년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그 후 세상을 보지 못하는 노병은 향기를 통해 세상과 화해한다. 향기의 세상은 영화 <향수>에서 보듯 사람의 세상,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이 있는 세상이고 사람다움의 증거다. 결국 노병이 한 타자, 소년을 구원하며 새 가능성을 선사한 뒤, 그 자신도 새로운 삶이라는 희망의 눈을 뜨게 되고 거기서 전사의 삶은 멈추고 진정한 퇴역이 이뤄진다.
4월이면 어김없이 그 장엄한 검은 벽, 추모명비 앞에 탐스런 겹벚꽃이 핀다. 가녀린 벚꽃이 흩날려 지고 난 뒤 피는 겹벚꽃처럼 수만 명의 청춘들이 지고 간 땅에 오늘 우리의 삶이 피었는지도 모른다.
저 쓸쓸히 서 있는 미국 참전 기념비가 4계절 외롭지 않길 바란다. 영령들이 외롭게 않게 딸의 초등학교가 마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이 지켜낸 나라의 미래가 자라는 모습을 건너보며 영령들은 안식을 얻지 않았을까? 여기 잠들어 있는 용사, 살아 고향으로 돌아간 용사 모두 그들이 누구를 위해, 왜 싸웠는지 기억하는 이들로 인해 위로 받았으면 한다.
이 칼럼을 읽는 독자들께 당부하나 드린다. 부산에 온다면 꼭 이곳을 들려줬으면 한다. 해운대, 광안리도 좋고 기장의 사진 찍기 좋다는 고급 호텔도 좋지만 이곳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을 꼭 들려줬으면 한다. 3월에서 6월 사이가 가장 예쁘지만 어느 때 오더라도 이 영령들을 위해 많은 분들이 정성 들여 가꾼 정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이니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다.
그렇게 관광 삼아 무심히 거닐며 먼 나라에서 온 낯선 이름을 가진 용사의 묘비 앞에 잠시 추모객으로 멈춰서 감사 인사 한번 해주길 바란다. 잠시 사색에도 빠져 보시길 바란다. 제대로 나잇값, 어른 노릇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새끼 남에 새끼 할 것 없이 다음 세대가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되기 위해 오늘을 사는 어른으로서 뭘 해줘야 할지에 대해서.
*대문 사진은 추모명비 앞에 핀 겹벚꽃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