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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에서 쓰레기를 주울까?

영화의 위로 22 . 내일DEMAIN(2015)

by 최영훈

페이스 북은 잡지 중에 잡지다. 내 관심사에 따라 친구 신청을 주고받다 보니 그 분야 전문가의 노하우와 생각을 어깨 너머 보게 되고, 이를 통해 많은 걸 배운다. 뿐만 아니라 생소한 분야의 전문가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기에, 잘 모르던 분야에 대해선 깊이 들여다보고 그 분야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 이 글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어떤 분야의 의미를 우연히 알게 돼서 쓰게 됐다.

매일 산에 오르는 사람

페이스북 친구인 최근영씨를 잘 모른다. 만난 적도 없고 정확한 직업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건, 이 글을 쓰고 고치는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울산의 어느 산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는 것뿐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아낸 근영씨의 파편적인 정보는 이렇다. 태풍 마이삭 이후부터 울산의 천마산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을 해 왔고, 이 활동에 지역민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최근에는 지역의 환경운동으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것 정도다.


내가 이 운동의 근본적 목적을 선명하게 느끼고, 더 나아가 환경 운동의 근본적 소명이 뭔지 생각해 보게 된 건, 어느 날 근영씨가 페이스 북에 올린 산에서 주운 꼬막 껍데기 사진과 거기에 양념으로 곁들인 아주 가벼운 농담 같은 글 때문이었다.


산에서 꼬막을 줍는 이유는 수 천 수 만 년이 지나고 '남산(솔마루길)이 예전에 바다였다'라고 기록될까봐.


처음엔 피식 웃었다. 산꼭대기까지 꼬막을 싸들고 가 먹고 껍데기를 훌쩍 버리고 오는 사람도,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줍는 근영씨에 버금가는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문구를 반복해서 읽다보니 묘한 묵직함이 전해졌다. 흔히 이 지구를 다음 세대에게 잠시 빌려 쓴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고 보는 고향의 풍경을 최대한 보존해서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 지역 환경 운동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몇 년 전 보았던 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몇 몇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텍스트에 갇힌 종말

다큐멘터리 영화 <내일(DEMAIN)>은 인류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류의 멸망에 관한 영화는 아주 많다. 이런 영화들은 주로 기상이변이나 바이러스, 외계 생명체, 전쟁, 좀비 등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전설이다.>,<월드워Z>, <28일 후> 같은 영화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들인데, 이런 영화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라고 한다.


이들 영화의 줄거리의 핵심은 종말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과 그들의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지구에서의 생존 투쟁기다. 그러다보니 지구와 인류가 막장에 다다르게 된 원인에 대해선 서두에 짧게 얘기하고, 바로 살아남은 자의 서사로 넘어간다. 결국 인류의 종말이 텍스트에 갇혀 오프닝 크레딧 같은 취급을 당해 버리고, 그 결과 관객은 종말에 관한 영화를 그리 많이 보면서도 스스로의 종말에 대해 상상하거나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내일>의 초반부, 영국의 환경 활동가 롭 홉킨스가 지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화 속 공포들 바이러스에 감염 된 좀비와 맞서는 생존자의 심리와 재난 속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류의 사투 속에서 유발되다보니, 당연히 인류의 종말과 그 원인이 현실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말이 텍스트에 갇혀 버렸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가상의 공포가 현실의 공포를 은폐하고, 가상의 종말이 현실의 그 가능성을 덮는다.



종말을 막기 위한 노력들

정말 인류에게 기후변화나 기상 이변으로 인한 종말이 올까? 난 그쪽으론 문외한이고 솔직히 말하면 관심이 없다. 그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분리배출을 충실히 하는 평범한 아저씨에 불과하다. 반면 영화 속에는 나와 달리 이 공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뭔가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디트로이트에서는 빈민가의 빈집과 비어버린 공장과 창고를 활용해 도시 농업을 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채소와 과일과 같은 좋은 먹거리를 먹게 해서 패스트푸드의 길들임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비만 문제 해결에 도전한다. 더불어 경제적 재활과 도시재생도 도모한다.


물론 그전에도 디트로이트의 빈민들은 정부로터 식품 구매를 위한 지원을 받았다. 문제는 그 돈이나 쿠폰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사 먹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브로콜리, 피망, 파슬리, 아스파라거스, 양배추, 토마토 같은 것들 말이다. 도시 빈민들은 이런 신선한 걸 먹지 않는다. 비싸기 때문이다. 같은 값으로 더 배부르기 위해선 정크 푸드를 먹을 수밖에 없다.


결국 도시 인구 전체가 비만해지고 성인병 확률은 높아지며, 정부의 의료비 지출은 높아진다. 이런 악순환이 대를 이어가면 빈민가는 가난과 소아 비만, 질병과도 싸워야만 한다. 그래서 가난한 도시의 비만의 해결은 끼니의 해결이 아니라 끼니의 교육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건 미래 세대를 위한 지금 세대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영국 토트모든의 시도에서도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선 마을 곳곳의 빈 땅에 채소를 심었다. 다양한 베리 종류와 허브들, 과실수, 옥수수 등을 심어서 아이들에게 직접 수확하고 맛보게 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좋은 먹거리를 먹이려는 프로젝트이면서 공동체 커뮤니케이션의 색다른 시도다. 어떤 작물이 어떤 시기에 맛이 있고, 자라는 과정 속에서 언제부터 먹을 수 있는지 체감케 하는 것이다.


이 체감은 왜 중요할까? 미각은 경험을 통해 발달 된다.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도 한 방송에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유아기 때 엄마로부터 쓴 맛의 쾌락이 복사되지 않으면 평생 안 먹는다고. 그러니 엄마가 이 시기에 포기하면 평생 초딩 입맛으로 살 수도 있다. 이런 입맛이 한두 명이면 괜찮은데 다음 세대 거의 대부분이 이런 입맛을 갖게 되면 쓴 맛은 멸종 되고, 많은 쓴 맛 나는 작물들은 야생으로 돌아간다. 시장성이 없는 작물은 누구도 재배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이 체감은 후대에게 한 작물과 그 맛을 교육하고 전달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이 교육과 전달이 없으면,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작물이 야생으로 돌아간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뉴욕이 밀림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야생으로 돌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나 같은 사람은 산에 산삼이 있어도 그냥 지나간다. 늘 먹는 채소라도 밭이나 산에 가서 찾아 캐오라고 하면 엄한 잡풀이나 캐올게 뻔하다. 그래서 모양은 모르는데 냄새로 향신료를 찾아낸 적도 있다. 예전에 처가 선산에 벌초를 하러 갔는데 가시나무 작은 것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길을 낸다고 하나를 잘랐더니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가 났다. 산초 나무였다. 산초 가루가 그렇게 작은 후추 같은 열매에서 나오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무도 얇은 가시나무 것 인줄 처음 알았고 말이다.


그래서 식재료 교육은 단순히 편식을 막고 건강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농작물 품종의 다양성 유지를 위해서도, 민속학과 인류학적 맥락에서도 꼭 필요하다. 먹거리에 관한 정보의 축적, 이에 대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학습은 일종의 문화유산의 전달이다. 된장, 고추장 담그는 법, 술 담그는 법과 거기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기억하고 다룰 줄 아는 법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거대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래서 이 도 두시의 시도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공동체 구성원간, 세대간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같이 작물을 키우는 행위와 그것을 나눠 먹는 것이 사람 대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중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일년생, 다년생 작물을 배우고 그걸 함께 먹으면서 소통한다. 또 함께 키우면서 협동하고 소통하는 걸 배운다. 연예인이나 축구 이야기 없이도 모르는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다는 걸 배우는 것이다. 토트모든의 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주민이 얘기하는 장면이 인상 깊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언제 경찰과 옥수수에 대해 얘기해 보겠는가. 경찰이나 공무원과 식물에 대해 얘기할 때라곤 기껏해야 가을에 은행 냄새 심하다고 민원 넣을 때 뿐이지 않을까?


사실 시골 어르신들은 이런 얘기를 몇 시간씩 한다. 모내기는 언제하면 좋겠는지, 비가 언제 오겠는지, 올해 텃밭엔 고추가 좋겠는지, 방울토마토가 좋겠는지, 누구 네는 고추 품종으로 뭐를 심었는데 잘 됐다고 하더라, 등을 말이다. 자연이 도심에 있으면 화제의 중심도 자연이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 화제의 중심인 자연이 내 일상에서 사라지길 원하지 않게 되고, 결국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열심히 텃밭을 키우고 자연을 가꾸고 아끼게 된다. 이건 나, 이웃, 자연, 이 삼자간의 항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다. 결국, 두 지역의 노력은 공동체의 복원과 공동체의 환경을 지켜나가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음식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실천이기도 하다.



같은 계절, 같은 풍경, 같은 입맛

요 근래 아카이브 작업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 기존에 해오던 민속 박물관과의 일도 있었지만, 기초 자치 단체와 광역 자치 단체의 다양한 부서에서도 종종 다양한 분야의 아카이브 작업을 의뢰한다. 이 아카이브 작업을 우리말로 기억 이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지역의 자연보호는 어쩌면 지리적 아카이브, 생태적 기억이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렇다면, 민속학적으로 이 시대의 삶을 기록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집요하면서도 끈질긴 노력이 요구되는 활동 아닐까? 더 나아가 이 노력이 조만간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해지지 않을까?


작물 북방한계선은 더 위로 올라갔다. 내가 사는 부산 인근 지역에선 열대 과일을 키우는 농장도 흔하다. 심지어 경남 산청에선 바나나도 키운다. 이런 뉴스를 보다보면 내가 누린 봄날의 풍경과 입맛을 내 딸도 누릴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그 의심은 또 다른 질문의 고리로 이어진다. 내가 추억하는 부산 어느 골목의 여름 풍경과 내 딸이 추억하는 그 골목의 여름 풍경에는 다른 꽃이 피어있진 않을까? 우리가 3월에 벚꽃을 보고 가을엔 단풍을 보는 당연한 축복을, 동해에서 잡은 명태로 만든 생태탕 한 그릇에 담긴 이 땅과 바다의 축복을 내 딸도 누리고 살 수 있을까? 내 딸이 그 축복을 못 누린다면 그건 누구 탓일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 끝에 환경 운동의 절실함과 명분이 내 현실로 와 닿았다.


환경운동은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온 이 국토와 고향의 풍경을 어떻게든 지켜내어 다음 세대에게 건네주려는 노력이다. 이를 통해 지금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이 같은 모양새로 살게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문화인류학적 유산을 지켜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렇게 내가 구한 답들이 무더위를 조심하라는 안전안내문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플로깅을 하며 산을 오르내리는 최근영씨와 그 일행의 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실천하는 사람이 지켜내는 고향 풍경

내가 쓴 최초의 카피는 인문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기숙사 학우가 부탁한 슬로건이었다. 그때 난 “이젠 깃발을 내리고 일을 해야 할 때”라는 카피를 써 줬다. 운동권이 막 저물어가던 시기라 그 카피는 나름 적절했고, 아주 수월하게 그 학우의 선거팀은 승리했다. 이제 이 카피는 최근영씨의 플로깅에 딱이다.


스웨덴의 유복한 가문 출신인 그레타 툰베리의 저 요란스러운 퍼포먼스가 지구를 살리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난 모르겠다. 항공유를 쓰는 제트 여객기로 불러 모은 영국의 노련한 선원들을 대동한채,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겠다며 태양광 요트로 대서양을 횡단한 그 위선의 항해가, 그렇게 도착한 유엔에서의 연설이 지구 환경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난 모르겠다. 덕분에 그녀가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이 됐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퍼포먼스가 같은 해 있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보다 더 가치 있는지, 난 모르겠다.


대신, 이 유난스럽고 글로벌한 그레타 툰베리의 퍼포먼스보다 근영씨와 이웃의 실천이 훨씬 더 지구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건 안다. 그린피스가 북극곰 뱃지와 맞바꾼 후원금으로 북극곰을 몇 마리나 살렸는지는 몰라도 딸이 미래에 먹을 생태탕에 들어갈 동해의 명태를 복원하는 건 강원도에 있는 수산자원센터이며, 그렇게 부활시킨 동해의 명태가 계속 머물 수 있도록 우리의 바다를 깨끗하게 만들고 지켜내는 건 박카스 광고에 나온 다이버 부부 <문수정/김용규>씨나, 며칠 전 다큐멘터리에 나온 <디프다제주>와 같은, 고향의 바다와 내가 사랑하는 바다 속을 청소하고 아끼는 평범한 사람들의 실천이라는 것도 안다.


오늘도 근영씨의 페이스북엔 언제 어느 산에서 청소합니다, 하는 글이 올라왔다. 누가, 몇 명이 오는지는 모르지만 근영씨는 일단 올라간다. 근영씨가 그곳에 가면 약속하지 않은 이웃이 온다. 그들은 함께 산에 오르내리면서 쓰레기를 줍고 헤어진다. 깃발도 없고, 슬로건도 없다. 조직도 없고, 규칙도 없다. 단지 사랑하는 고향의 풍경, 지키고 싶은 고향의 풍경이 있을 뿐이다. 그 실천이 오늘 우리가 본 풍경을 다음 세대도 볼 수 있게 할 것이라,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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