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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결국, 우릴 치유할까?

영화의 위로 1 . 미녀와 야수(2017)

by 최영훈

<미녀와 야수>는 소위 디즈니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1989년 <인어공주>에서 1999년 <타잔> 사이의 명작들 중에서 가장 보석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미녀와 야수>가 더 특별한 건 주인공 벨이 2세대 공주로 구분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 맥락에서 디즈니의 여성상을 혁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변화의 대상이 여주인공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식 장면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랑으로 인해 여자 주인공 벨의 신분과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더불어 외모 또한 전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오직 남자, 야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옛날 공주들은 왕자님 잘 만나 팔자 고치고, 심지어 <인어공주>는 자신의 생명이 왕자의 사랑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공주님의 팔자를 고치러 오는 왕자들은 성은 기본에 마차는 옵션이며, 왕국은 필수였다. 낡아빠진 성 하나 갖고 있는 “야수”하고는 결이 다른 왕자들이었다. 게다가 이름도 있고 가족도 있고 족보도 있었다. 반면 “야수”는 이름도 없고, 가족도 없이 일꾼들하고 산다. 영화 <미녀와 야수>의 그 마지막 애타는 장면에서조차 벨은 “짐승~”이라고 외친다. <라이언 킹>의 심바와 <타잔>을 제외하면 여자 주인공 이름만 우리 머릿속에 남는 것도 거의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지 않을까?

맥스 아일렌버그가 새로 쓰고, 안젤라 배럿이 새롭게 그린 <미녀와 야수> 표지


변해야 사랑을 하나? 사랑을 해야 변하나 ?

<미녀와 야수>의 핵심 철학은 주체는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지, 주체가 변해야 사랑이 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미녀와 야수>의 변화의 동력은 사랑이다. 사랑을 받은 뒤 변하지, 변한 뒤 사랑을 받지 않는다. 변화의 조건이 사랑이다. 벨의 마음이 변해야 야수가 사랑을 얻고 모습도 변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혁신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어떤 조건을 갖고 있어야, 없다면 그걸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인간”, 심지어 “짐승”같은 수준일 때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계급사회 때부터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아주 정직하게 말하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사랑을 할 수 있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미녀와 야수> 이전에 등장한 여주인공들에게 그대로 투영 됐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 그러니까 짐승 같은 수준일 때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의 열쇠가 있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엔 열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남편감이 의사나 검사면 열쇠가 몇 개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사무실이나 병원 열쇠 등이 그런 열쇠들이었다. 이런 열쇠가 없이는 중매쟁이한테 명함도 못 내밀었다. 남자가 국가고시 등을 통해서 위치가 변했으면 여자도 그에 맞게 물리적 조건을 갖춰서 응답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법고시 패스하는 동안 열심히 뒷바라지 했던 여공이 성공한 애인한테 버림받는 신파 영화들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됐을 정도다. 심지어 드라마 <모래시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엔 하숙집 딸하고 맺어지지만.


요즘엔 그래도 이런 신파 영화 같은 짝짓기 틀에서 좀 벗어났을까? 아무것도 없는 자연인, 그 모습 그대로 사랑을 시작할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엔 오히려 조건의 갖춤이 더 정교해졌다. 결혼정보회사의 개인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된다. 맘만 먹으면 학력은 유치원부터, 재산은 부모님 선산까지 스캔이 가능하다. 결혼은 원래 그런 거라고 쳐도 연애는 좀 날 것으로도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끌리는 무언가 만으로 연애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생각은 순진한 건가? 요 근래 마주하는 이 삼 십대 청춘과 연애 얘기 하다보면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나를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어른 취급한다.


“제가 이제 서른 넘었는데 가볍게 사랑할 순 없잖아요. 결혼도 생각해야 하고.”

“이제 군대도 갔다 왔는데 연애 타령만 할 수 있나요?”

“선배, 요즘은 연애도 스펙이에요. 스펙 있는 놈이 그 스펙도 쌓는 거예요.”

연애도 스펙이라서 스펙 있는 놈이 그 스펙도 쌓는 거라는 말이 슬프게 들리곤 했다. 왕자가 되어야, 공주가 되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동화의 현실판이다.


우린 미완의 존재다.

<미녀와 야수>는 이 통념에 도전한다. 우리가 모두 미완의 존재임을, 야성의 존재임을 일깨운다. 책을 좋아해서, 요즘 청춘들 말로 동네에서 아싸(아웃사이더)인 벨도, 은둔형 외톨이처럼 혼자 숨어 사는 야수도 타자에겐 미지의 존재다. 그렇다. 어쩌면 타자는 모든 주체에게 야수고, 결국 모든 주체는 야수일지 모른다. 외모와 상관없이 타자는 주체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다. 나 또한 타자에게 이러한 야수다. 그리고 우린 스스로에게 야수다. 우리가 어디 내 자신을 나 원하는 데로 길들이는 데 성공한 적이 있던가?


이 시대를 사는 고민 많은 야수, 미완의 청춘들은 스스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애 쓴다. 마치 성직자들이 득도를 위해 수행을 하는 것처럼, 무적의 고수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무협 영화의 검객처럼 말이다. 그 완성을 향한 강박은 완성 된 주체는 가능하다는 세간의 부추김과 그 완성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는 타자와의 비교, 이 두 동기로 지속된다. 그러나 이건 직능의 담론이고 전문성의 기준이다. 완성 된 인간이란 게 가능할까? 있기나 하는 걸까? 어느 누구도 무엇을 갖추고, 어떤 것을 해내야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 됐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계발 책이 팔리고 있는 것이고, 템플 스테이는 휴가철마다 붐비는 것 일 테다.


완벽한 선수의 궤적

연애는 미완의 존재가 미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모험이다. 변화는 사랑을 통해 완결 되는 것도 아니고, 변화 된 후에 사랑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하면서 변화는 계속 된다. <미녀와 야수>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저 완벽한 남자 개스통의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개스통은 완벽하다고 자부해서, 그리 인정받아서, 역설적으로 야수보다 위험한 존재다. 그는 왜 위험할까? 개스통의 역할은 뭘까? 잘 생긴 얼굴로 자기가 점찍은 여자는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다는 도끼남 역할일까? 아니면 늘 그랬듯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악당 역할일까? 악당 치고는 너무 능력이 없지 않나? 심지어 마법사나 마녀, 해적도 아니다. 그는 그야말로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원 픽 남자다. 우린 개스통이 왜 완벽한 남자로 설정 됐는지, 동네 아가씨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남자로 설정 됐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갖고 있는 완벽의 조건은 뭘까? 잘 생겼다. 이력서도 화려하다. 이런저런 스킬도 많다. 게다가 이런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는 방법도 잘 안다. 결국 대중의 사랑도 받는다.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개스통을 사랑한다. 완벽한 남자, 개스통.


문제는 이런 남자, 혹은 여자가 연애의 상대로 가장 좋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훈남과 훈녀, 이상형은 <선다방> 같은 프로그램과 미디어, 그것들을 품고 있는 사회가 만든다. 그 신화 탄생의 궤적과 붕괴를 영화 한편을 더 가져와 얘기해보자. 이 글을 쓸 때 영화 <드래프트 데이>를 보고 있었다. 이 영화는 이상적인 선수의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신화 형성에 소위 전문가들의 편견이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말하고 있다.


미국의 스포츠는 두 개의 우상을 섬긴다. 하나는 숫자고 다른 하나는 명성이다. 숫자는 기록을 말하고 명성은 기록과 함께 선수의 외모, 트로피, 전설적인 경기로 만들어진다. 영화 <머니볼>의 실제 주인공인 빌리 빈 단장이 야구계에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프로야구는 물론이고 미식축구에선 명성이 더 힘을 발휘했다. 초, 중, 고등학교 이후 대학교까지 전설적인 선수와 그를 둘러싼 소문과 격찬들이 선수의 실력 이상의 이름값을 만드는데 공헌했다. 물론 외모도 한몫했다.


개인의 완벽함과 팀의 완벽함

영화 속 가상의 2014년 드래프트의 주인공은 보 캘러한이라는 쿼터백이다. 쿼터백은 미식축구에서 꾸준히 백인 선수가 독점하던 포지션이다. 워런 문이라는 흑인을 제외하면 전설적인 선수들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천 년대 들어와서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백인 쿼터백을 선호하는 도시와 팀이 남아 있다. 보 캘러한은 바로 이런 백인 쿼터백의 이상형이다. 백인, 금발, 잘 생긴 얼굴, 명문 위스콘신 대학의 주전 쿼터백, 고교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한 실력. 믿기 어렵겠지만 미국은 중학교 팀만 되도 선수 기록이 통계처리 되서 시군 단위는 물론이고 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순위 매김 된다. 그러니 한 선수의 명성은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또는 실력에 큰 기복이 있지 않는 이상 대학 졸업 때까지 유지될 수 있다.


이 명성은 미디어와 팬의 뇌리에 남는 한 두 경기-특히 크리스마스 전후로 한 연말연시의 중요한 경기-로 부풀려지고, 스폰서와 언론사가 주는 다양한 상과 메달은 이 명성의 이정표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환상이 되어 이 선수가 졸업할 때쯤이면 프로팀의 팬과 지역 전문가들은 앞 다퉈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선수를 뽑아야한다.”거나 “저 선수가 팀의 다음 시즌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와 같은 설레발을 치기 시작한다. 이 설레발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거품 같은 명성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특히 스카우터들은 이 통계 이상의 것, 통계 뒤에 가려진 선수나 요소를 찾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선수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선수의 인성을 알기 위해 탐정처럼 조사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 담긴 이야기가 바로 이런 이야기다.


좋은 남자가 진짜 좋은 남자는 아니다.

보 캘러한은 드래프트 데이 당일까지만 해도 1라운드 넘버원 픽이 유력했다. 1라운드 넘버원 픽은 시애틀이 갖고 있었고 지명이 유력했다. 결국 성적이 바닥인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소니 위버 단장은 팬과 구단주의 압박 때문이라도 어떤 대가를 치러 1라운드 픽을 사와 그를 지명해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스포일러지만, 캘러한은 지명 받지 못한다. 1라운드 여섯 번째까지 미끄러진다. 물론 NFL 팬들은 이 영화 속 드래프트가 합리적인가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영화의 중요한 주제는 드래프트 그 자체가 아니라 인생이다. 인생엔 너무 많은 변수가 있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변수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을 할지, 특히 사람을 선택할 때 그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그 완벽의 기준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온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바로 라이언 리프와 톰 브래디다. 1998년에 있었던 NFL 드래프트에서 라이언 리프는 전체 2순위로 지명됐다. 1순위는 전설의 쿼터백 테이튼 매닝인데, 매닝의 동생인 일라이 매닝도 2004년에 1라운드 1번으로 뽑힐 정도로 미식축구 명문 집안이고 좋은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라이언 리프는 수준 이하의 성적을 남기고 불과 4년 만에 선수 생활을 접는다. 지금도 라이언 리프는 NFL의 드래프트 흑역사를 꼽는데 있어, 텍사스 A&M 대학 출신의 조니 ‘풋볼’ 멘젤과 더불어 거론 된다. 반면 톰 브래디는 2000년, 6라운드, 전체 199번으로 뽑혔다. 그 후 톰 브래디는 2002년부터 잉글랜트 패트리어츠의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고, 무려 여섯 번의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 최근엔 팀을 옮겨서 탬파베이 버캐니어스의 슈퍼볼 우승을 이뤄냈다. 올해 나이 마흔 넷, 아직도 현역이다.


<미녀와 야수>의 개스통은 보 캘러한 같은 남자다. 괜찮은 남자, 그 이상이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같은 남자고, 풀 옵션이 장착 된 고급 세단 같은 남자다. 그러나 알다시피 베스트셀러가 내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 풀 옵션 세단이 모든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풀 옵션은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어지간한 건 갖추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러니 풀 옵션 차도 타다보면 아쉽고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풀 옵션 남자 개스통 역시 장착 안 된 게 있다. 양심과 윤리 의식이 장착 안 됐다.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하고 타자를 폄하하고 모함한다. 보 캘러한이 트레이닝 북에 숨겨진 백 달러짜리 테스트에서 끝까지 거짓말을 밀어 붙였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우린 일상에서 타자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알 수 없기에 더욱 드러난 것에 매달린다. 드러난 것들이 정상이거나 그 이상이면, 우린 그 타자에게 안심한다. 타자는 나와 동일자가 된다.


완벽한 연인의 위험

야수와 미녀는 결여 된 존재, 미완의 존재, 소외 된 존재들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지 않아서 소외 됐고, 그 동네의 다른 아가씨들과는 달리 책을 좋아해서 소외 됐다.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과 정상 상태가 아니어서, 그와 다른 존재여서 소외 된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다들 같아 보이려고 애를 쓰며 산다. 평균, 표준, 모범, 기준에 부합하면 우린 보통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일이든, 조직이든, 사랑이든, 이렇게 정상 범주에 걸 맞는 형태를 갖췄다고 판단되고 인정받으면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상이라는 말에는 비정상을 규정하고 더 나아가 비정상을 소거하고 소외 시키려 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정상이라는 범주에 속하기 위해 애쓰게 한다. 그렇게 범주에 들어갔다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면 완성됐다고 착각한다. 개스통처럼 주목 받을 만큼 탁월한 존재는 아니어도, 그저 사람들이 수용해줄만한 기준에 들어갔다 싶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결여와 미완은 태생적이다. 우린 다 다른 존재고, 진행형인 존재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존재, 완성형 인간이 되는 것, 사랑하기 좋은 완벽한 사람을 찾는 것, 또 그런 사람이 되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착각이다.


개스통처럼, 완성됐다고, 완벽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스스로 기준이 되어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단점까지 소외시킨다. 결국 성인이 돼서도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질 못한다. 리플리 신드롬처럼 세상에 내놓는 자신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그 포장으로 타인과 연인의 완벽 유무를 끝없이 평가한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완벽하게 변해 달라며 강요한다. 스펙, 다이어트, 성형 등의 요구가 이어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타자는 사라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상만 남는다. 완벽남 개스통이 연인으로 위험한 이유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사랑이 인간의 완성을 이루지는 않는다. 인간은 평생 미숙한 존재로 살다가 간다. 그게 인간의 부조리함이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들로 인해 우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고, 그것을 잘하는 누군가를 보며 부러워하며 산다. 하지만 그 부러움을 받는 타자조차 결핍이 있기에 또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한다. 결국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내가 결핍 된 것을 갖고 있는 타자를 발견하고, 그를 통해 내가 좀 더 완성되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영화 <친구>의 광고 문구처럼 함께 있을 때 우린 두려움이 없어지는지도 모른다. <미녀와 야수>가 가르쳐 주는 사랑은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가는 사랑이다. 미완의 존재들이 만나 조금 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서로의 결핍을 메워주기 위해 노력하고 그로인해 나와 타자가 조금 더 완성되어지는 것. 이것이 야수와 벨이 하는 사랑이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남은 인생이 어찌됐든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 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갈 것 같다는 용기가 생기는 것. 그것이 <미녀와 야수>가 말하는 사랑이다.


더 나은 사랑을 위해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할까?

그런 용기를 줬던 사랑에도 권태기가 찾아온다. 나와 달라서 장점으로 여겨지고 좋아보였던 것도 싫어지고, 단점이었던 것들이 용서가 되질 않아 헤어진다. 아님 뜯어 고치던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중에 <시간>이라는 영화가 있다. 아마 하정우의 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은 영화가 아닐까.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해 아주 독하게 질문 한다.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나며, 그동안 연인은 어떤 존재가 되는지 묻는다.


인간은 서로가 다른 결점과 장점으로 인해 개성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우린 그 개성에 반해 나와 다른 이를 사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완벽해진다는 건 모두 같아진다는 의미이기에, 그 후의 사랑은 그야말로 로또처럼 짝을 추첨해야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린 모두 다른 존재이기에 다른 존재에게 끌리고 된다. 이 다름의 발견은 이미지의 다름부터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과거, 내면을 알기 전까진 오로지 우리가 매력을 드러내고 그 매력에 끌리는 데에는 겉으로 드러난 신체적 매력 밖에 없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고 깊어진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의 자극원으로써의 기능이 한계에 달할 때다. 모든 자극엔 소위 역치(threshold)가 있고 "감각의 순응"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즉 자극을 주던 요소에 익숙해졌을 때 권태가 찾아온다. 그 다름이 일상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결국 끌려서 설렜던 마음도 진정 된다. 이 상태가 편안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다른 자극에 끌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연인들이 위기의 도래를 두려워하면, 할 수만 있다면 영화 제목처럼 첫 키스만 50번째 하는 것처럼 늘 사랑의 시기를 일 년 이내로 멈춰서 붙들어 놓고 싶을 것이다. 아니면 일 년에 한 번씩 자신을 새롭게 바꾸던가.


이 영화에선 모든 이들처럼 사랑이 뜨거웠던 시간을 반복할 수 없기에 자신을 바꾼다. 권태기를 느낀 남자한테 실망한 여자가 성형수술로 새롭게 태어나, 그 모습으로 다시 그 남자를 유혹하고 연애를 한다. 여자 주인공이 착각하는 건 뭘까? 완벽한 모습, 새로운 모습이 되면 사랑도 새로워질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 착각으로 인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시간 속에 무르익어 처음 시작했던 사랑과는 다른 형태의 사랑이다. 즉 자신의 모습과 상관없이 사랑은 변하는 것인데 그 변함의 원인을 스스로의 외모에 둠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흔든다. 혹시 당신도 더 나은 존재를 만나면, 더 완벽한 존재를 만나면, 내가 좀 더 완벽해지면, 내가 좀 더 예뻐지고 멋있어지면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더 좋은 사랑, 멋진 사랑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지.


사랑은 완성 없는 감정이다. 지금 하고 있을 때 발휘되는 감정이지 그것을 형태화 시켜서 타자의 사랑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없다. 이런 현재적 실천인 사랑을 미완의 존재인 사람이 하기 때문에 사랑은 필연적으로 개별적이고 개성적일 수밖에 없으며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들킬 수도 있다. 사랑을 하면서 다른 나를 발견하고 찾을 수도 있다. 미완의 존재, 무형의 존재에서 점점 더 실체적이고 완성형의 존재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같은 처지이지만 나와 다른 타자, 그래서 레고 블록처럼 돋음과 패임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한다. 그래서 우린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완성 됐다는 착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아, 내 혼란스러움을 이 사람이 매워주는 구나.”하며 독백을 하면서.


연애 잘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나?

사람으로 변한 야수와 책벌레 벨의 사랑은 이제 시작이다. 영화 속에서는 사랑이 싹트는 과정만 담았지 본격적인 연애담은 시작도 못했다. 아주 좋을 때, 컷 사인이 난 것이니 우린 정작 이 두 사람의 연애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연애 잘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나?”


이 질문에, 사랑은 결국 타자를 알아가는 것이라는 답을 겨우 할 수 있다. 이 답에 그저 미지의 영역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다 알 수는 없고 완성도 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인간이라는 말도 더불어. 그러니 결국 사랑과 연인은 한사람 앞에서만 완성되고 완벽하면 된다. “너 하나로 충분해.” 이것이 바로 사랑의 완성형 문장이다. 그래서 설령 콩깍지가 씌워졌다고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결국엔 그 콩깍지라는 것이 주관적 완성의 메타포임을 잊지 말고 덮인 채로 사랑해야 한다.

<굿윌헌팅>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숀(로빈 윌리엄스)이 윌 헌팅(맷 데이먼)에게 자신의 아내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긴장하면 방귀를 뀌고, 심지어 잘 때도 방귀를 껴서 방귀를 뀐 그녀도 놀라서 깨서 “당신이 뀌었어요?”라고 묻곤 했다고, 그러면 “응, 내가 뀌었어.”라고 대답했다고, 회상하며 웃는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이런 말을 남긴다. “인간은 불완전한 서로의 세계로 서로를 끌어들이지. 중요하건 과연 서로에게 얼마나 완벽한가야. 남녀 관계란 그런 거지.”


다름은 결점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개성이고 그 개성이 그/그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결국엔 연인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그 다름으로 인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이고, 주체와 인생의 완성을 향해 좀 더 나아가고, 이 세상을 그럭저럭 헤쳐 나가며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숀이 말한 사랑과 연인의 정의이고, <미녀와 야수>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누가 봐도 완벽한 인간이 사랑을 잘 하고 좋은 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딱 맞는 그/그녀와 함께 할 때 우리는 사랑을 잘 하게 되고 완벽한 연인이 되는 것이다. 궁합이라는 말도 결국 그런 의미다. 모두가 만족하는 변강쇠나 카사노바, 옹녀가 되는 것보다 한 사람을 위한 변강쇠와 옹녀가 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결국, 우린 사랑으로 치유 받는다.

그렇다. 우린 결국 사랑으로 치유 받는다. 어느 광고 카피처럼 나중에 완성시켜 나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태어난 걸 멋진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 얼굴이나 몸에 그 어떤 짓을 하고 돈을 들이더라도 우린 궁극적으로 미완성인 채로 죽는다. 그 불안을 우린 직감하고 절감하고, 끝끝내 안고 살아간다. 그 불안, 그 미완성 된 주체의 불안이 보듬어지고 위로 받는 순간이 바로 사랑이다.


단점까지, 실수까지 예쁘다고 듣던 날들은 아주 짧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객관적인 지표로 평가 받고 대소변은 쉬는 시간마다 해야 되고 점심도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한다. 과목은 점점 늘어나고 계절마다 바뀌는 옷으로 친구는 평가된다. 왕따는 이미 초등학교 1학년부터 시작된다. 그저 친구여서 넘어가던 동심은 우리의 생각보다 일찍 사라진다. 이때부터 우린 단점을 숨기고 장점만 부각시키면서 하나의 완성 된 가면을 만들어간다. 니체가 말한 현대인의 가면을. 그 가면을 “나”라고 여기면서 누구는 공주로, 누구는 짐승으로, 누구는 동네의 인기남으로 삶을 살아낸다.


그러다보면 진짜 내가 누구인지 미완성과 완성의 차원이 아닌 자연인인 나, 남과 다르기에 그 존재 가치가 희귀할 수밖에 없는 원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게 된다. 그 잊음은 우리 내면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다. 내가 내 자신을 소외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게 성인이 된 어느 날, 누군가 날 사랑한다고 한다. 연애를 하면서 내가 오래 써 온 가면, 이미지를 벗어가면서 내 진짜 모습을 하나 둘씩 보여줘도 여전히 좋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을 하는 동안,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사랑을 하는 동안 우린 내 스스로와 화해를 하고, 미완성이지만 그렇기에 남과 다른 존재였던 나를 꺼내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미녀와 야수>의 사랑이다.

미녀와 야수는 발견 된다.

결국, 우린 발견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중 누가 더 좋은지, 배너와 헐크 중 누가 더 좋은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어쩌면 야수처럼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여야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고 놀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백상현의 말처럼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정체성을 “나”라고 받아들이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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