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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여행 그리고 순례

영화의 위로 24 . 와일드(2014)

by 최영훈

이 삶은 옳은가?

며칠 전 후배 민우를 만났다. 과거 대형 사고를 당해, 당시 의사에게 서른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어 늘 건강을 체크하며 살아온 놈이다. 이 놈을 처음 만난 건 모 대학 광고홍보학과 강사 시절이었는데, 졸업 후 만났을 땐 문화기획을 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작은 전시회도 기획하고, 음악과 다른 비주얼 아트를 접목시킨, 내 상식으론 희한한 전시회도 기획했다. 녀석 부탁에 그 전시회의 관객과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 한참 후에는 작은 통신 회사의 블로그 마케터로 일한다고 연락이 왔다. 잘 다니나 싶더니만 다시 연락이 와선 카페 창업하는 선배를 도와 마케팅 기획과 이미지 컨설팅을 한다고 했다. 그 몇 달 후 연락이 와서는 그게 엎어지는 바람에 잠시 수원의 고향집에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내려와 연락하길 자세히는 말 못 할 밤일을 한다고 했다. 최근 그놈 SNS에 와인을 들고 찍은 사진이 올라왔기에 물어보니 현재는 와인 전문점에서 와인 판매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우리 세대 기준으로 보면 뭐하나 꾸준히 하는 게 없는 놈이다. 한 우물 파는 건 기대할 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놈이 날 만나서 하는 말이, “선배, 전 취업난 없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 실시간으로 삽니다.”이런다. 인생엔 답이 없으니 그냥 제 내키는 대로 살면서 그 답 한번 써 보겠다는 심산인 건가? 서른다섯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놈과 헤어지니 이 영화가 생각났다.


결단의 여정

영화 <와일드>는 한 여성의 <PCT(Pacific Crest Trail)>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 도보 여행은 일종의 트래킹인데 미국 서부 종주다. 간단히 설명하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서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서 끝난다. 그 사이에 캘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턴 주를 지나고,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을 타고 간다. 가장 높은 곳은 4천2백 미터가 넘고, 이 사이에 25개의 국유림과 7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여기에 모하비 사막이 초반에 버티고 있다.


이 험난한 여정에 왜 이십 대의 청춘이 도전했을까? 이 의문에 영화는 답을 보여준다. 천천히, 느리고 고통스럽게, 한 여성이 발로 걸으며 그 답을 써가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다시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딸이 되기 위해,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보여준다.


그 여정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불쑥 덮쳐오는 과거의 기억들은 육체적 고통과 어우러져 밤의 휴식을 괴롭힌다. 하지만 주인공은 멈추지 않고 여정을 끝낸 후 인생의 새 여정을 시작한다. 배낭을 짊어온 시간 속에서 인생의 짐을 스스로 지는 힘을 얻게 됐고, 그 트레일 코스에서 내려야 했던 수 없는 의사 결정의 순간을 삶으로 받아들여 험난한 트레일 코스만큼 험난한 인생 여정을 온전히 내가 책임지는 삶을 시작한다.



여행의 짧은 역사

애초에 여행은 사치품이었다. 괴테 같은 작가나 귀족들의 유럽 여행은 마차로 몇 달씩 걸렸다. 평민들은 군대나 부역에 징발된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영리적 목적을 위한 여행사의 설립은 1841년, 토마스 쿡이 만든 회사가 시초라고 한다. 그러니 여행이 세계적인 상품이 된 건 이백 년도 안 됐다는 말이다.


한국 최초의 여행사는 1945년에 생긴 조선여행사고 해외여행이 자율화된 건 30년 정도 됐다. 그 덕에 아시아나 항공이 1988년에 생겼고 유명한 여행사인 M 여행사가 1989년에 생겼다. 그러니까 여행이 우리나라에서 산업으로 명함을 내민 게 길어야 70년 정도 된 거고, 복날의 삼계탕처럼 일상화된 건 30년밖에 안 된 것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여행업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패키지여행 덕분이었다. 경험 없는 사람을 위해 여권 업무며, 공항 수속도 대신해줬다. 여행지에선 깃발만 따라만 가면 되니 다들 안심하고 여행에 나설 수 있었다.


더불어 1990년대 들어서자마자 온갖 미디어에선 한국의 바다부터 산까지, 사찰에서 시장까지, 박물관에서 맛집까지 앞 다퉈 시시콜콜한 여행 정보에 지면과 시간을 할애했다. 여행사들은 세계지도에서 한국을 중심점 삼아 컴퍼스를 돌려 점점 큰 원을 그리듯 여행 갈 수 있는 나라와 도시를 발굴해 나갔다. 이국적인 나라와 장소를 소개한 뒤 사람이 몰리면 덜 몰리는 곳을 가르쳐줬다. 바쁜 사람을 위해 밤도깨비 상품을 만들어서 하룻밤에 찍고 올 수 있는 여행지도 소개했다.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슬로건 아래 블라디보스토크도 그렇게 발굴됐다.


인생=패키지여행?

그렇게 패키지여행은 대표적 여행 상품이 됐다. 덕분에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 삼십 년 만에 여행이 그야말로 기호품이 되어 버렸다. 복날에 삼계탕 먹는 수준으로 말이다. 문제는 복날의 삼계탕을 꺼려하는 사람 있듯이 여행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대중 매체에서는 끊임없이 여행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패키지여행은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고 정해져 있다. 미지의 장소와 길에서 마주할 선택의 불안도 없다. 패키지여행이 편한 건 이 때문이다. 가이드가 가라는 데로 가고, 쉬라는 데서 쉬고, 먹으라는 데서 먹고, 싸라는 데서 싸고, 자라는데서 자면 된다. 신경 쓸게 없다. 청춘도, 인생도 이렇게 패키지여행처럼 살면 편하다. 남들 사는 데로 사는 패키지여행 같은 삶은 개인의 불안을 없앤다.


초등학교 때부터 옆집 친구, 옆에 짝과 같은 학원 다니고, 같은 과정을 거치면 부모 마음이 편하다.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 국영수 학원 다녀야 편하고, 남들 다가는 대학 가고, 때 되면 취업하고, 때 되면 결혼하면 부모 자식 다 편하다. 패키지여행과 동일한 편안함이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은 여행의 한문에서 첫 번째 뜻을 놓쳐버린 여행이다. 여행(旅行)의 여에는 군사의 무리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가장 우선하는 뜻은 나그네라는 뜻이다. 패키지여행은 과정이 없는 여행이다. 신혼여행을 그리스로 갔다. 미코노스를 갔을 때 매일 헤매는 맛으로 다녔다. 어제 먹었던 기로스가 맛있어서 거길 또 찾아갔는데 어제 찾던 시간보다 더 걸렸다. 이게 여행의 본질이고, 어쩌면 청춘, 어쩌면 인생의 본질일지 모른다. 낯선 곳에선 실수하고 헤매는 게 맞다. 처음 가는 거니. 청춘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처음 사는데 당연히 실수가 있다. 헤매는 게 당연하다.


여행=청춘?

필자가 대학 다닐 때 배낭여행이 유행했다. 유행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는데, 여행이 어떻게 유행이 될 수 있을까? 예전 귀족들은 공부하러 여행을 갔다. 여행을 가면서, 또 가서 배웠다. 앞서 말했듯 서민들은 노역을 위한 여행과 순례였다. 그러니 서민의 여행은 애초에 상품이 아니었고, 그러니 유행이 될 수 없었다. 그건 의무고 고행이었다.


역설적으로, 앞서 말했듯이, 여행의 상품화가 유행이라는 단어를 불러왔다. 남들 다가는 거기 나도 가야겠다. 이런 심리는 모든 상품의 유행 원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추석 때 전 부치고 벌초 가고 집에서 추석 특집 영화나 보고 있으면 뒤쳐진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진정한 여행의 본질은 청춘과 같다. 같은 시기를 살지만 다르게 살아내어 개별적으로 기억되어 사적인 추억이 된다. 그러니 청춘을 보내는 방법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다 똑같이 청춘을 보내면 그다음 세대와 시대가 변하질 않는다. 다들 공부할 때 시위하는 사람도 있어야 세상이 좀 꿈틀댄다. 다들 동경대에서 점거 시위 벌일 때 한가하게 재즈 카페에서 음악 들으며 번역하고 술 팔고 커피 팔고 소설 끼적거려는 사람도 있어야 하루키 같은 소설가가 나온다. 청춘이 규격화된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여행 또한 상품화되선 안 되는 거였는지 모른다.


여행의 불확실성=청춘

<비포 선라이즈>를 보라. 그 영화에서처럼 기차에서 불쑥 내려 사랑에 빠지려면 패키지여행으론 안 된다. 이 영화의 시리즈는 여행과 인생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말한다. 예측 불가, 열린 결말, 평가 불가한 것이 인생이고, 사랑이고 여행이라 말한다. 여행도, 청춘도, 사랑도 해봤으면 된 거다. 자기 경험이 됐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누군가한테 설명해서 어느 정도 대단한 청춘, 여행, 사랑이었는지 평가받을 필요는 없다.


<이 투 마마>라는 영화는 이보다 더 나아간다. 두 친구가 없는 장소를 만들어낸다. <천국의 입>이란 해변. 그런데 가상으로 만들어낸 해변이 가니까 거기 있다. 관념이 실재를 만든 건지, 실재에 대한 기억이 관념을 만든 건지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존재의 불확실성을 넘어, 가상의 것이라고 확신한 상태에서 여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천국의 입"에 다다랐다.


여기엔 세 가지 은유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어떻게 살든 언젠간 천국에 간다. 죽는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인생에 천국을 잠시나마 실현시키는 건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동성애든, 불륜이든, 친구 엄마랑 자든-간에 사랑이라는 것. 그러니 그 사랑의 여정을 선택한 것에 대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는 길을 나서야 천국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말 그대로 긴가민가한 상태라도 일단 길을 나서야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여행이든 청춘이든 사랑이든 뭘 해야 천국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은유를 추가한다면, 청춘도 방황도 언젠간 끝난다.



여행에서 순례로

영화 장르로 생각해보자.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있다. 로드무비들은 대체적으로 허무한 결말을 담고 있다. 삶과 그 결말이 허무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와일드>는 그 삶의 무의미의 발견에서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그래서 <와일드>는 길 위의 여정을 담은 영화지만 로드 무비가 아닌 순례의 영화다. 반면 여행자, 특히 패키지 여행자의 길에는 실행은 있어도 고행은 없다.


그럼 실행과 고행은 뭐가 다를까? 실행은 성과를 낳고, 고행은 깨달음을 낳는다. 패키지여행의 실행은 최소 시간, 최단 거리로 이뤄진다.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의 이동은 말 그대로 이동이기에 기록되지 않고 경험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이런 여행은 동일한 결과의 반복, 성과의 반복을 낳는다. 결국 여행이 끝나는 순간 다시 여행을 계획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상품으로써의 여행의 본질일지 모른다. 여행을 갔다 오면 좀 달라지겠지, 삶의 여유와 휴식이 주어지겠지 하지만 그곳에서도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다음 여행에선 안 그래야지 하면서 또 여행을 계획한다.


인생=나만의 성지로 가는 여정

철학자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순례자의 길과 여행자의 길을 대비시킨다. 순례자의 여행은 고행이다. 오체투지로 가는 네팔의 순례자든, 산티아고의 길을 가든 순례자 앞에 놓인 길은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순례의 서사는 써진다. 순례의 끝에 다다른 성지는 그 서사의 마침표일 뿐이다. 그래서 순례는 스스로 하나의 경전을 써 가는 행위다. 성지를 향해 나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성자와 성인이 되가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한 이는 순례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파올로 코엘료의 <순례자>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일단 순례를 하고 나면 우린 다른 존재, 순례자가 된다.


그럼 여행자의 삶과 순례자의 삶은 뭐가 다를까? 순례자는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간다. 그 길은 그렇게 가야만 한다. <와일드>에 나오는 트래커처럼 입을 거, 먹을 거, 잘 거 다 짊어지고 간다. 이 순례의 길은 기도의 길이고, 회개의 길이고 반성의 길이다. 오체투지로 가든, 다리로 꾸역꾸역 걸어가든 그 길은 그런 길이다. 그렇다. <와일드>의 여정은 삶을 짊어진 여정이다. 과거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가면서 길을 스스로 만들거나 선택하며 가는 여정이다.


그러니 순례자처럼 산다는 건 자기 삶을 짊어지고 사는 삶이다. 끝없이 반성하며 사는 삶이고, 그럼으로써 과거를 짊어지되 동시에 그 과거와 결별해가며 사는 삶이다. 또, 순례자처럼 산다는 건, 성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깨닫는 삶이 아니라 그 여정 속에서, 그 길 위에서 깨닫는 삶이다. 오체투지처럼 여정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사는 삶이다.


<와일드>의 여정처럼 순례는 사적인 결단의 연속이다. 산티아고의 길을 가든 티베트의 라싸에 가는 길이든, 성산인 카일라스 산으로 가든. 평지가 됐든, 해발 6천 미터 이상이 됐든 모든 길은 본인이 선택한다.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며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미 개인의 성지화가 시작된다. 길을 나서는 순간 이미 그 딛고 서 있는 곳이, 몸으로 닿은 그곳이 성지가 되는 것이다. 성지는 순례라는 서사의 마지막 장이 될 뿐이다.

사소한 것의 차이로 본인의 서사를 만들었다고, 성지를 꾸몄다고 착각하지 말자. 친구는 저걸 샀는데 난 이걸 사서 저 친구와 난 다른 존재다? 상징으로 차이를 만드는 거에 불과하다. 경험이 서사다. 차이가 아니라 다름으로 서사를 만드는 거. 그게 순례자처럼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이 사람, 이날, 이 시간. 그걸 고스란히 느끼며 사는 것이다.


서른다섯, 민우의 여정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난 예측할 수 없다. 그 끝에 어떤 성지가 기다릴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남은 삶을 온전히 스스로 책임지며 앞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남과 다른 조건이어서, 그래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남 탓, 나라 탓, 세상 탓, 사회 탓 안 하며 앞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과거와 결별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의 희망을 믿고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갈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자>의 끝머리, 작가의 말에 남긴, “오늘도 나는 미래를 향해 걷고 있다.”는 말처럼.


딸은 이제 자기 책가방을 짊어질 만큼 컸다.

물론 책을 많이 빌려 넣어 가방이 무거운 날엔 아빠에게 못 이기는 척 맡긴다.

오늘 등굣길, 딸은 내 팔짱을 끼고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렸다.

"갑자기 뭐야?"

"왜? 나 결혼할 때 아빠 팔짱 끼고 들어 가잖아."

"그렇긴 하지."

"난 삼촌처럼 늦게 결혼하면 안 되겠어."

"왜?"

"너무 늦으면 아빠가 깨꼬닥 죽을 수도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너무 일찍 할 필요는 없어."

"응"

딸이... 생각보다 일찍 제 몫의 삶의 짐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지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일부턴 다시 아빠가 가방을 좀 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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