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하는 온라인 마케터 해성씨와의 인연으로 작업실에 종종 놀러오는 태빈이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올해 서른 한 살의 착실한 친구다. 첫인상은 한때 유행했던 캐릭터인 마시모로를 떠올리는데, 눈웃음도 덩치도 맞춤이다. 맛 집 찾아다니는 게 취미고 작업실에 올 때도 자잘한 군것질 거리를 들고 오곤 한다. 제법 오래 알고 지냈다는 해성씨한테도 언제나 깍듯이 존댓말을 하고 그보다 대여섯 살 많은 감독과 나를 늘 어려워해서, 우리가 실없는 농담이라도 해야 조금 긴장을 푼다.
올 봄 어느 저녁, 이동하는 길에 태빈이를 집까지 태워다 준 적이 있다. 나이불문, 남자 셋이 한 차에 탔으니 연애 이야기가 나왔는데 감독이나 나나 결혼 이십 년차를 바라보니 태빈이의 연애사가 궁금할 뿐이었다.
“니 연애는 해 봤나?” 감독이 물었다.
“예, 딱 한번 해봤습니다.”
“얼마나?”
“딱 삼 개월 했습니다. 손도 못 잡아 봤습니다.”
“니 그럼 밤엔 뭐 하노?”
“유튜브도 보고 게임도 좀 합니다.”
태빈이가 내릴 때까지 대략 십 몇 분 동안, 우리는 혀를 차가며 별 도움 안 되는 조언을 잔뜩 쏟아냈다. 그렇게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떠오른 영화가 이 영화다. 작년에 문화기획을 하는 후배인 민우가 옛날 영화를 보는 영상 콘텐츠 제작에 패널로 와주십사 해서 함께 옛날 영화에 대해 몇 번 얘기한 적이 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안성기 선생님의 성인 연기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80년대, 사랑도 어려웠다.-
영화는 80년대의 밑바닥 인생을 다룬 <영자의 전성시대>,<꼬방동네 사람들>과 유사한, 시대의 초상 같은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한데,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온 세 청년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결국은 세상에도 속지만 새로운 희망을 기약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큰 줄기에 여러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가 맥을 잡고 있으나, 그 사랑 이야기는 결국 실패담이다.
세 주인공인 덕배, 춘식, 길남은 다양한 이유로 사랑에 실패한다.
덕배는 부잣집 여대생인 명희에게 휘둘리면서 경제와 학력의 계급 차이를 절감한다. 1980년대의 대학 진학률이 30퍼센트 안쪽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변두리의 최하층 노동자였던 덕배가 대학생과의 연애는 둘째치고, 여대생을 마주할 일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연애의 주도권을 명희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지만 덕배는 그 주도권을 남성성으로 되찾으려 여러 시도를 하다 좌절 된다.
춘식은 면도사 미스 유를 좋아한다. 영화 내내 본명이 나오지 않고 그저 미스 유로 나오는 여성은 나이도, 고향도 모호하다. 다만 그녀가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은 영화 여러 곳에 암시 된다. 춘식은 좋아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고백은 못한다. 둘 다 생계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무게까지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사랑하고 가난도 감수하고 살림 차렸을 것 같은 시대였을 것 같지만, 그 시대부터 이미 연애 전선 깊숙이 삶의 팍팍함이 침투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스 유는 김회장의 첩으로 간다.
길남은 미용사 진옥을 좋아한다. 얼핏 보면 둘은 연인 같아 보이고 실제로 길남도 그렇게 믿는다. 자신의 월급을 진옥에게 빌려주면서 믿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진옥은 그런 길남을 촌스럽다며 구박한다. 입에서 김치 냄새 난다고 키스를 거부하고. 물론 길남은 그런 구박도 웃어넘긴다. 소위 아가씨의 튕김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그로인해 진옥이 꿈꾸던 다른 세계, 상상하던 세상의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한 채 호텔 주인이 되는 자기만의 꿈에 빠져 산다. 어느 날 진옥은 그 돈을 챙겨 떠나버린다.
사실 이 세 남자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자들이 사랑에 실패한다.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할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지키고 가정을 이루고 미래를 가꿔 나가는 책임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존재는, 그 리더는 남자여야만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정작 사랑 그 자체를 시작도, 하지도 못한다.
돈 많은 김회장 또한 사랑 앞에 눈치를 본다. 나이 많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돈 많은 남자가 가난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 까 전전긍긍한다. 결국, 역설적으로, 당시 돈 많은 중년 남자라면 의례히 그러려니 인정해줬던, 첩이라는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한다.
영화 속 남자들 모두 사랑에 좌절한다. 그 좌절은 자본의 차이, 학력의 차이, 계급의 차이, 미래의 불안 등이 원인이 된다. 그 좌절 끝에 모두 절망한다. 사랑을 가진 자도 불안해하고, 사랑을 읽은 자도 절규하며, 강남 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그 급작스러운 성취로 인해 불안해하고, 돈 없는 사람은 그 부자를 부러워하면서 그 벼락이 언젠가 자기한테도 치지 않을까 기대하는 동시에 그 벼락부자를 혐오한다.
우리의 80년대는 그렇게 모든 것이 가능했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했고, 모든 것이 안정 되어 가는 것 같았지만 누구도 안정된 터전을 가질 수 없었으며, 모두가 적당한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로인해 결국 지(知)와 부(富)로 형성 된 계급 상층부로의 이동이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체념하며 살아내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포기한 것들-
영화의 마지막, 덕배는 춘식의 동생, 춘순의 손을 잡고 군대 가는 길남을 배웅한다. 이 장면은 덕배의 침묵하며 살라고 호소하는 장면과 더불어 긴 아릿함을 남기는 장면이다. 분명 사랑이 이어지고 희망찬 미래의 설계가 가능한 유일한 커플의 뒷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덕배와 춘순의 손잡음은 알 수 없이 서글픈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덕배의 희망찬 뒷모습이 그의 침묵과 체념을 통해 얻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집 사모님의 불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후배에게 안 보고, 안 듣고, 말하지 말아야 이 서울에서 살 수 있다고 말하는 덕배의 간절한 호소와 여대생 병희와의 만남에서 늘 허둥대고, 어설프게 멋을 내서라도 병희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덕배의 버거운 노력이 그 마지막 뒷모습에 겹쳐졌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의 청춘들이 덕배처럼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삼엄한 군사독재 시대를 살아내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직장을 다니며 종이봉투에 월급을 받아오기 위해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외면하고, 들어야 할 목소리엔 귀를 닫고, 해야 될 말, 하고 싶은 말은 물에 만 찬밥처럼 꿀꺽 삼켜야 했다. 자신은 분수껏 살면서 자식만은 잘 되길 바라면서 “공부해라.”를 입에 달고 살았던 부모님들의 삶이 어쩌면 기차역에서 나온 덕배와 춘순에게 예정 된 삶일지도 모른다. 그 시대를 살아나갈 젊은 예비부부의 뒷모습이 짠한 이유다.
모든 시대의 청춘은 괴롭다.-
유튜브 콘텐츠 촬영 말미, 후배 민우는 마무리 멘트를 부탁했다.
예나 지금이나 청춘에게 사랑은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해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쉽지 않았고 그래서 신파극의 제목처럼 사랑에 속고 돈에 울었지만 요즘도 그런 사랑의 양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지 않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청춘의 삶이 수십 년 후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강남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중년의 김회장도 사랑은 어려웠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데로, 부자는 부자대로 사랑 그 자체를 오롯이 실천하는데 두려워하고 힘들어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는 경제적 가난과 마음이 가난했던 그 시대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시였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위로의 울림이 지금 더 절실히 필요하다.
N포 세대라는 말을 들은 지 대략 십여 년 된 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는 취업과 그로인해 안정 된 삶을 얻기까지 연애, 결혼, 출산, 취미 같은 인생의 즐거움을 유예시키고 살아야 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의 한숨을 제대로 담아낸 용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청춘이 N포 세대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지, 이 세상이 청춘에게 만만히 인생의 모든 것을 허락했던 시절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가난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살림부터 합쳤을 법한 80년대 같지만 그 시대에도 사랑은 쉽지 않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사랑에 실패한다. 그리고 목수정의 표현을 빌리면, 에로스의 주도권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사는 한국 남자들에게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사랑은 어려웠다. 어떻게 타자를 알아가고 사랑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전에 이 사랑을 오직 남자의 힘으로 지켜나가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정작 사랑 그 자체를 실천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의 좌절을 가져온 강박은 해결 되지 못한 채 지금도 여전히 반복 되고, 오히려 더 견고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고 “믿는” 타자의 정보로 인해 타자와 나의 부의 차이, 학력의 차이, 계급의 차이, 미래의 차이가 더 두드러지게 느껴져서 그 강박과 불안이 오히려 더 심화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어려운 사랑, 그걸 감당할 짧은 청춘-
며칠 전 TV에서 <사관과 신사>를 보다가 다시 이 영화가 떠올랐다. <사관과 신사>가 딱 2년 뒤에 개봉했으니 시기적으로는 비슷한, 다른 대륙, 다른 나라의 청춘 영화다. 얼핏 전혀 다른 얘기 같지만 여기나 거기나 청춘들은 사랑하기 어렵고 사랑이 괴로운 건 매한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아내의 차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길구봉구>의 <그래, 사랑이었다.>를 듣다보니 요즘도 그렇게 청춘들이 사랑 앞에서 서성이고 망설이다 “썸”이나 타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청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쩔 수 없이 서툴고 예민하고 그렇기에 모든 사랑 앞에서 아프고, 미련했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어리석음이 먼저여서 미련하고 아프게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서로 다르게 사랑했고 미워했었지만, 그래 아름다웠던 사랑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아름다운 것이 청춘의 사랑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N포 세대의 전형, 모태솔로라고 해도 무방한 태빈이와 몇 년 전에 연애가 끝난 후 지금까지 한참 그 연애가 개점휴업 상태인 민우에게 다음에 이어질 문장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수 백 년 전에도, 수십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한국이나 미국이나 청춘의 사정은 괴롭다. 세상이 뭘 원하는지 몰라서 괴롭고, 타자가 뭘 원하는지 몰라서 괴롭고, 어떻게 사랑을 하고 유지해야 할지 몰라서 괴롭고, 미래를 알 수 없어서 괴롭고, 궁극적으로 그렇게 찾고 싶은 인생의 정답이, 결국엔 없기에 괴롭다.
이 무책임한 위로에 이어,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나 더 얹자면, 그래도 사랑을 할 만한 이는 청춘 밖에 없다. 물론 안다. 한병철은 주체를 타자에게 던지는 것이 에로스라 했지만 그 던져짐을 시도하기엔, 그 던져진 주체를 넙죽 품에 안아 주기엔 청춘은 불확실한 존재이고, 오늘의 청춘은 불확실성이 더 심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 존재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한층 높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 모험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사랑이라는 모험은 어린 시절 자전거나 수영을 배우는 모험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게다가 사랑은 자전거나 수영처럼 한번 배우면 몸이 기억해서 매번 간단히 반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사랑은 매번 할 때마다 낯설어서, 마치 동남아에서 처음 두리안을 맛 본 이후에도 매번 먹을 때마다 “예상했지만 낯선” 그 괴로운 맛이 덮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가 <사랑 예찬>에서 말했듯 “위험제로”의 사랑은 없고,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다. 또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그 모험과 같은 사랑을 감당할 이 누구겠는가? 태빈이와 민우, 청춘 말고 누가 그런 괴로움을 감당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