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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그 사람다움

영화의 위로 11 . 월E (2008)

by 최영훈

대학 강사 노릇을 할 때 학생 상담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열 몇 살 많은 사람은 으레 인생을 좀 알겠거니 하고 기대들을 하니, 거절하고 내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사를 그만두고 나서,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 했는데, 웬걸, 쉰을 앞두고 흰머리가 늘어나니, 종종 청춘의 대화 상대로 불려 나가곤 했다. 어지간히 나이를 먹으면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고 생각하는지 젊은 후배들이 요 근래 종종 상담을 청하기 때문이다.


마흔은 불혹이요 쉰은 지천명의 나이라는 걸 철석 같이 믿는 후배들에게 마흔이 되도 불혹은 고사하고 마음속은 항상 전쟁 중이고 마음의 고요는 가장 사치스러운 순간으로 기억 될 만큼 드물게 찾아온다는 걸 구구절절 하소연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마주 앉곤 한다.


후배들은 술이 나오기도 전에 “선배, 마음이 좀 안 흔들렸으면 좋겠어요.”,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요. 가라앉히고 사는 비결, 어디 없을까요?”라며 답을 재촉한다. 이럴 때 고상한 여느 어른처럼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첫줄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나 김용택 시인의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의 한 구절인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읊어준 뒤 “술이나 마셔.”하고 서둘러 입을 봉해버리는 게 가장 손쉬운 대처방법이겠지만, 펼쳐진 술상에 혹해 우물쭈물 하다 결국 누구나 다 아는 애니메이션 하나를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안과 밖의 흔들림

우리는 매일 흔들린다. 사람이어서 흔들리고, 살아 있어서 흔들린다. 어떤 흔들림 앞에선 저항할 새도 없이 무기력하게 당하기도 한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외력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은 광대뼈처럼 도드라질 수밖에 없기에, 그 모든 외부로부터 기인하는 흔들림은 우리에게 공포감을 준다. 그래서 흔들림, 그 자체를 두려워하고, 흔들림을 스트레스로 여긴다. 하지만 잔잔한 흔들림은 끊임없이 있다. 지진에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 지진이 있듯이 흔들림 중에도 인지되지 못하는 흔들림이 있다. 그런 탓에, 심지어 분명 흔들리고 있는데 아니라고 우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마음을 흔드는 자극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 자극을 선택했기에 이별이라는 자극이 일상을 흔들 때까지는 좋은 스트레스로 여긴다. 이런 좋은 스트레스, 흔들림 중 어떤 건 스스로 찾기도 한다. 춤을 추기 위해 집에서 음악을 듣지 않고 시끄러운 음악이 고막을 쥐고 흔드는 클럽에 가기도 하고, 몸과 마음, 다 흔들리기 위해 술집을 찾기도 한다. 결국 내가 선택한 흔들림이고 그것이 적당한 자극을 준다면, 그 흔들림은 자극 없던 삶의 운율이 되고 리듬이 되어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사랑도 흔들림이다.

자극을 버틸 힘이 있는 젊을 때는 그 자극을 찾아다니고, 특히 새로운 사랑은 두려움 없이 찾는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새로운 자극이고 첫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주는 파동에 몸이 익숙해지면 그것은 옛사랑이 된다. 마치 여름날 선풍기 소리나 에어컨 소리, 컴퓨터 본체가 내는 소리가 어느새 소음의 인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그야말로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이 되어 버리듯이 사랑의 파동에도 익숙해지는 것이다.


백색 소음이 된 사랑의 파동은 우릴 흔들 수 없다. 카페의 소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공부를 할 수 있듯이 일상이 된 사랑은 자극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우린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되고, 그 일상에 존재하는 사랑을 염두에 두면서도, 새 사랑의 파동을 찾는다. 사랑의 현존을 지각하면서도 사랑의 부재를 절감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설렘이란 결국 마음의 울림이고 그 울림이 몸의 전율로 이어지고, 설렘이라는 마음의 울림이 없으면 신체의 전율은 격동에서 미동으로 이어지고 미동은 다시 정적이 되어 사라진다. 그 정적의 평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나이에는 그 잔잔한 호수 같은 안온한 일상에 감사하지만 그 정적을 지루함으로 받아들이는 청춘이라면 새로운 사랑의 파도를 찾아 나서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욕망의 충동

사랑 말고 우리를 흔드는 게 또 뭐가 있을까? 홈쇼핑 채널에 시선이 멈췄다면 이미 흔들린 것이다. 그래서 충동구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충동은 밖으로 찌르고 치고 들어오는 힘이다. 그 힘이 우리에게 와 닿으면 충격을 받고, 충격을 받으면 행동이 일어난다. 무엇으로부터 충격이기에 우린 충동구매를 할까? 그 충격의 대부분은 우리의 욕망이다. 그 욕망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인지, 알던 것인데 마침 딱 맞는 것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인지 그 순서는 알 수 없다. 아니 무의미할 수도 있다. 일단 사람에게 소비 충동이 생기면 어떻게 하든 그것은 합리화되어야 소비로 이어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없던 필요도 만들어내기에 세상의 모든 충동구매는 역설적이게 개인에게 꼭 필요한/했던 구매다.



공감과 반감

누군가의 주장에 공감 하든 반감을 갖든 그것도 흔들림이다. 타자에게 공감하는 것은 상대와 같은 마음의 울림을 갖고 있기에 나타나는 공명 현상이다. 그러니 흔들림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흔들림이든 간에 흔들림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휘발유 가득한 드럼통 같이 잠잠한 내면에 “탁”하고 손가락 튕기듯 무언가가 스파크를 일으키면 흔들림이 들불처럼 번진다. 스님들이 속세를 떠나 산중 사찰에서 수행하시는 것도, 가톨릭 수도원이 산속에 있는 것도, 심지어 기숙재수학원이 외딴 시외에 있는 것도 이런 외부 자극으로부터의 격리가 있어야 흔들림 없이 원하는 과업을 향해 정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며 컸다.

걸음마를 뗄 때부터 우린 흔들리는 존재였다. 그래서 흔들림을 긍정하는 것에 대해 우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흔들림을 부정하고 통제하는 사회는 영화 <이퀼리브리엄>같은 사회다. 이 사회의 사람들에겐 표정이 없다. 전쟁을 막기 위해 감정을 통제하다 보니 감정의 흔들림이 없고, 당연히 표정의 흔들림도 없어진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발생으로 육체가 흔들리듯이 감정이 있어야 표정도 흔들린다. 물론 그 흔들림의 결과가 <이퀼리브리엄>의 총사령관 생각처럼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들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부정적 감정을 두려워해서 감정 자체를 차단하면 그야말로 얼굴 없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남자 나이 마흔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넘어온 고뇌와 기쁨의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들이 만들어낸 표정, 그런 것들이 주름이 되고 눈빛이 돼서 중년의 매력을 만든다. 한 인간이 그 시간까지 살아온 인생의 파도가 얼굴에 나타난다는 거다.


감정은 그래서 인간적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인간적이다. 그 표현을 표정으로 하든, 옷으로 하든 말이다. 그래서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 또 그 사이에 오가는 수 많은 감정과 인연보다 신과 함께하는 사명을 우선하는 분들이 옷을 통일해 입는지도 모른다. 행여나 다른 옷이 수행하는 동료의 감정에 파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도, 수녀님도, 신부님도 그래서 옷이 비슷한 것 아닐까?


멈추면 퇴화한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정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좋을까? <월E>는 아니라고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최후의 인류는 커다란 방주 같은 우주선을 타고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해진 지구를 떠난다. 지구에는 쓰레기를 치우는, 꽃과 벌레를 사랑하는 아주 낭만적인 로봇 월E와 벌레들만이 남아 있고, 우주선에선 지구가 다시 회복됐는지 알기 위해 종종 첨단 정찰 로봇을 보낸다. 어느 날, 에바라는 정찰 로봇이 지구에 오게 되고, 월E는 에바에게 홀딱 반해서 그녀(?)를 쫓아 우주선까지 간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급진전 되며 모든 사건은 우주선에서 펼쳐진다.


아무런 육체적 고통과 흔들림이 없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우주선의 인간들은 퇴화했다. 외형은 하마처럼 되어 버렸고, 심지어 걷는 법조차 잊어버린다. 결국, 이들이 다시 지구에 돌아 와 우주선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걸음마부터 해야 했다. 최후의 인류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모든 육체적 활동을 금지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 걷기, 연애 등 땀을 흘릴만한 모든 활동을 말이다.


이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쉴 뿐이다. 나머지는 로봇이 다 한다. 이동은 노선을 따라 움직이는 안마의자를 닮은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고, 옆에 나란히 가고 있는 친구랑 얘기할 때는 고개조차 돌릴 필요 없이 눈앞의 모니터에 뜬 친구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흔들림, 그 사람다움

이렇게 고통과 흔들림을 없앤 곳, 최후의 인간이 보존되고 사육되는 온실 같은 우주선에서 최초의 움직이는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느닷없이 등장한 월E와 소통하려던 존이라는 남자가 이동하는 의자에서 떨어진다. 메리라는 여성 또한 월E 때문에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전망을 보게 된다. 우주선의 시스템과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그 평형을 깨는 존재가 두 사람을 흔든 것이다.


두 번째 움직임은 이 두 남녀가 우주선 밖에서 놀고 있는 월E와 에바를 보기 위해 의자의 궤도를 벗어날 때다. 그 광경을 처음 분 메리가 존을 불러 함께 창밖을 본다. 세 번째 움직임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수영이 금지 된 인공 해변에서 물장난을 할 때다. 네 번째 움직임은 두 남녀가 우주선이 기울어져서 아이들이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 서로의 손을 잡아 아이들의 완충재 역할을 하며 아이들을 구할 때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의 연쇄 속에서 두 사람은 사람다움을 회복한다. 고개를 들어 낯선 존재를 보고, 타자를 마주보고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풍경을 보기 위해 나란히 창가에 서고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내 몸을 움직여 물결을 일으킨다. 이렇게 육체를 처음 움직인 두 사람이 결국엔 돌아갈 지구의 미래 세대인 아이들까지 구한다.




사랑이 우릴 구원한다.

사람다움을 상실하는 한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사는 것을 인생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도, 언제 기꺼이 흔들림을 자처하여 사람다움을 회복할까? <월E>는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 왔을 때라고. 월E가 우주선에 탄 것도, 그래서 사건을 일으키는 시스템 에러 같은 존재가 된 것도 다 사랑 때문이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던 두 남녀가 움직이게 된다. 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자기 부상 의자 열차의 노선과 그 위에 뜬 홀로그램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 처음으로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본다. 그리고 감탄을 한다. 퇴화 된 육체와 감정이 서로를 향한 관심과 사랑,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인해 되살아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물장구를 치며 서로가 서로에게 즐거움이 되어준다. 이전까지 이들의 모든 즐거움은 모니터 안에 있었고, 로봇이 다 해결해 줬었다. 감탄이나 감동 없는 삶은 흔들림 없는 삶이었고, 무난하고 무탈한 삶이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삶은 아니었다.


<월E>는 몇 년 뒤에 나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을 연상시킨다. 더 뒤에 나온 영화 <패신저스>도 떠오르게 한다. 세 이야기 모두 우주를 방황하는 이야기 안에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 영화와 소설 역시, 인간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우주 탐험도 가능케 하는 첨단 기술이 아니라 그 어떤 기술로도 만들 수 없는, 아울러 인공지능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힘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닐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파피용>의 한 장면, 우주공학자 쥘 크라메르가 “빛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아들인 이브 크라메르는 “난 사랑이 우릴 구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하고 답하는 장면을 통해, 이 사랑의 힘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 대화 3년 후, 역설적이게도 쥘 크라메르는 사랑 때문에 자살한다. 베르베르는 이 죽음을 통해 광자역학이 우주선에 무한 에너지를 줘서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은하계를 항해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힘도, 심지어 그 삶을 포기하게 하는 절망적인 파괴력도, 결국은 사랑이 가진 힘임을 말한다.



흔들리는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연애든, 이웃 사랑이든, 인류를 향한 박애 정신이든-결국은 마음의 흔들림으로 시작된다. 마음이 동(動)해야 되는 것이다. 그 흔들림이 두려워서 최소한의 울림조차 묶어 놓으면 마음은 굳어져 퇴화한다. 요즘 친구들 표현을 빌려 가볍게 표현하면 그야말로 연애 세포가 죽는 것이다. 연애 세포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한 모든 애정의 세포가 죽어버린다. 운동(運動)또한 흔들림이고, 그 흔들림, 그 부대낌이 육체에 가해져야 우리는 튼튼해지고 건강해진다.


결국 사람다움을 얻고 유지하며 살기 위해선 안팎의 흔들림을 견뎌내며 육체와 마음의 근육 모두 단련해 나가야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월 E>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것일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로봇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지구를 향한 귀환으로 마무리 된다. 한명이 움직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타인을 위해 움직일 때 사랑이 시작되고, 모두를 위해 움직일 때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을, 지구란 결국 그렇게 사람다움을 갖은 이들이 사람답게 사는 터전임을 말한다.



언젠가 닳아 없어진다.

영국의 신학자 조지 휫필드는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를 원하노라.”라고 고백했다. 쓰임 받지 않으면 신의 사제로써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몸도 마음도 움직이지 않으면 녹이 슨다. 나이 들어 찾아오는 노쇠함 전에 이미 조로(早老)화 되는 것, 그것이 몸과 마음에 녹이 스는 것이다.


<월E>에 나온 최후의 인간들은 뼈와 연골은 전혀 닳지 않았지만 그 사용법을 잊어버렸다.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퇴화를 무릅쓰고라도, 속세를 떠나 고통 없는 우주 같은 곳으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곳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수도원의 수도사도, 산사에 사는 스님도 매일 감정의 물결을 마주한다. 단지 긴 수련과 수행을 통해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뿐이다. 일상을 사는 우린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쉽게 흔들리고 여진은 길다. 그러나 흔들림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 된 것이자, 사람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바이탈 사인 아닐까?


술자리에서의 조언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역설적이지만 흔들림은 마음과 몸이 건강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만간, 어지간한 흔들림에도 흔들림의 지진계가 꿈쩍하지 않을 때가 온다. 쉰도 훨씬 넘어서일거라 짐작만 하지만, 어쨌든 언젠간 오긴 온다. 모든 자극에 반응이 더디고, 심지어 반응하지 못하는, 그런 무감의 세월이 오기 전에, 흔들림조차 리듬으로 소화할 수 있는 청춘의 나날 중엔 좀 흔들리며 살아도 된다고 무책임하게 말해버린다. 그러고 나서... 뻔뻔하게도....


“자, 쓸 만한 조언이었으면 복채 대신 한잔 더.” 하고.

술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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