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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 혹은 존재론적 추첨기

영화의 위로 20 . 다크시티(1998)

by 최영훈

‘이생망’은 유행한지 제법 된 신조어로 알다시피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이다. 남정욱 숭실대 교수는 2016년에 기고한<누가 쉽게 ‘이생망’을 말하는가>라는 칼럼에서 이 말의 원조를 황지우 시인이라 주장했다. 1998년에 낸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실린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라는 시에 나오는 “나, 이번 생은 베렸어/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라는 구절을 그 근거로 들면서 말이다.


원조야 어찌됐든 요 몇 년간 젊은 후배들로부터 이 말로 시작하는 하소연을 많이 접했다. 그 하소연은 SNS에도 흔하고, 한두 잔 술이 들어가면 시작되는 “선배님. 전 진짜 노답에 이생망입니다.”하는 신세한탄 넋두리 1절에도 등장한다. 그 넋두리를 4절까지 참고 들어준 후엔 으레 이런 반문을 던진다. “어이. 한 번 더 살면 잘 살 것 같아?” 그 후 이 영화를 안주 삼아 왜 다시 살아도 다르게 살기 힘든지 말해준다.


리셋이 가능한 도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크시티>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의 기억은 전부 만들어진 기억이고, 애당초 그들이 사는 도시도 우주 공간에 만들어진 인공 도시고, 그 도시를 만든 이들은 이방인이라 불리는 외계 종족이다. 이들은 튜닝이라 불리는 현실 조작능력을 지녔는데, 그 초능력을 증폭시키는 장치까지 만들어 세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그런 능력을 무기삼아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인 탓에 이들의 세계는 멸망했고, 새 터전을 찾아 우주를 방황한 끝에 지구를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인간으로부터 구원의 단서가 나오길 바라며 우주 공간에 인공 도시를 만들어 그곳에 지구인들을 납치해 와서 실험을 한다. 매일 밤 12시마다 사람들의 기억과 도시의 지형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시간과 공간과 기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존재의 설정, 그 바꿈으로 인해 그 전과 후를 전혀 다른 삶을 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인생을 두 번 살아도-같은 삶이든 다른 삶이든, 같은 사람으로든 다른 사람으로든- 잘 사는 건 쉽지 않은 이유를 반증하고 있다.



한번 더하면 잘할 수 있을까?

인생을 리셋 하거나 특정 시간을 반복해서 다시 살고 싶다는 상상 또는 기대를 막연히 갖게 되는 건 시간과 공간을 맘대로 주무르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제법 많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윤회 사상에 익숙한 동양 문화권에 살아서 일수도 있고. 하지만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묘한 부조화가 느껴지지 않나요?


알다시피, 같은 시간을 반복하거나 병존시키는 영화들이 많다. 이런 영화들은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따라 그 장르가 다시 세분화 되는데 보통 타임 루프, 타임 리프, 타임 워프로 구분 된다. 타임 루프는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해서 겪는 것이고, 타임 리프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 타임 워프는 현재와 과거가 섞이는 것이다. 타임 루프의 대표작으론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있고, 타임 리프의 대표작으론 <백 투더 퓨쳐>, 타임 워프의 대표작으론 <프리퀀시>와 한국 드라마 <시그널>이 있다.


이런 영화들의 공통 된 질문은 한마디로 “다시 살면(하면) 잘 살(할) 수 있을까?”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렇다 쳐도, 서양에서 이런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건 앞뒤가 안 맞다. 서양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토대 중 하나인 기독교엔 윤회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고 정확히 써져 있다.


부연하면, 기독교의 세계관과 그것을 믿는 사람의 인생관은 선형적이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이런 서양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 “다시”를 외치며 현재의 삶을 고치려 애쓰고, 미래의 결과를 바꾸려는 영화들을 꾸준히 만든다. 왜 일까? 그들이 신을 믿으면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 또한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의지, 이성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 내면에 공존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의 나라인 미국 사람들에겐 신정론과 자유의지에 더해 개척정신까지 공존한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과거를 바꾸면 미래도 바꿀 수 있다는 영화적 설정에 더 쉽게 설득되는지도 모른다. 신의 뜻으로 이 시간들이 흘러갔다는 믿음과 상반 된다는 불편함 없이 말이다. 마치 사랑은 운명이면서 계약이라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런 이유로 할리우드 영화판에선 신정론(神正論)과 자유의지의 동거가 자연스럽다. 당연하지만, 영화 팬의 세계관에도 이 동거가 이뤄지고 있기에 많은 팬들이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건 과거의 어떤 일, 어떤 선택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며 이런 영화를 보고 받아들일테고 말이다.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살고 싶은 욕구를 이런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바꾸면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의 결과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영화 팬과, 또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한탄하는 후배에게 앞서 던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정말 과거로 돌아가면, 특정 시기와 공간을 다시 살면, 심지어 다시 태어나 두 번 살면 우린 잘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 하다는 걸 <다크 시티>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삶은 실험실 밖에 있다.

일단, 우린 <다크 시티>에 나온 외계인처럼 이 세상을 내가 원하는 데로 바꿀 능력이 없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비롯한 많은 타임 루프 영화의 핵심도 이것이다. 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가도 우린 실패하거나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이하는가? 그건 세상과 환경을 내게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역설적이게도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살더라도 노력을 해야만 한다. 모든 주체는 존재의 밖에 있는 환경을 이해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번 다시 태어날 때마다 새롭게 확장되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결국, 반복되는 하루는 개별적 하루일 수밖에 없고 처음 맞는 하루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보라. 해변의 1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수십 번 죽어야한다. 살아남기 위해 지독하게 훈련해야 한다. 반복 되는 하루를 살면서 작전을 수행하고, 훈련을 하면 할수록 그 능력이 발전되고 성취하는 것이 더 많아질수록 작전 목표에 더 접근한다. 예측 할 수 없는 전쟁터를 매일 반복해도, 딱 그 반복한 만큼만 수월할 뿐, 그 뒤로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반복할수록 더 잘 살(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있을까? 우리의 삶이 모든 가외 변인을 통제할 수 있는 실험실에서 행해진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이런 실험실 밖을 벗어난, 예측 불가능한 삶이라도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고, 개척할 수 있으며, 전선을 밀고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상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체념이나 무기력이 설 자리는 없다.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는, 아메리칸 드림의 SF 버전이다.

그러나 미개척의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렇다, 또 죽는 방법 말고는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SF 버전이 바로 <엣지 오프 투모로우>다. 그러나 현실에선 아프면 아프고, 죽으면 죽는 것이기에 저렇게 무책임하게 제목을 달지 말았어야 한다. 어쩌면 진짜 아파본 사람은 두 번 다시 아프고 싶지 않기에 저런 제목을 달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기억은 어쩔 텐가?

두 번째 이유를 말하기 전에 이 질문에 답해봐야 한다. 이번 생이 망했다면 다시 태어나면 잘 살 수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야 할까? 아니면 같은 존재로 태어나도 잘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의 공통 된 답의 핵심은 기억의 문제다. <다크시티>에는 기억을 바꾸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 기억에 맞춰 삶의 환경과 공간도 바꾼다. 사람의 기억에 맞춰 모든 걸 바꿔야 다른 공간,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나”로 다시 태어나면 그 기억도 고스란히 갖고 태어나야 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기억 속에는 상처, 분노, 두려움 등이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새로운 "나"로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즉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나를 만들고, 그렇게 인간의 오늘의 실존은 과거의 누적으로 형성 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결국 백지 상태인 “나”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새로운 두 번째 삶을 가능하다는, 어쩌면 그 삶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전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라는 단어를 둘러싼 역설이 탄생한다.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은 두 번째 삶에선 과거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두 번 사는 것”이라는 의미가 성립할 수 없겠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영화들을 보며 따져 질문하고 간과해야 되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은 사람으로 두 번 이상의 횟수를 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의 문제다. 후자일 경우엔 윤회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삶은 앞의 삶과 분리 되어 우리 기억을 통해 연결 될 수 없다. 즉 몇 번을 되 살아도 윤회는 매번 한 번의 삶일 뿐, 즉 1회 차 세상 구경의 반복일 뿐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할리우드를 비롯한 서구 영화에서는 두 번째 삶을 한 사람이 같은 존재로 하나의 삶을 반복하거나 다른 존재로 태어나도 과거의 삶의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것으로 설정 한다. 물론 그것이 영화적 장치로도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첫 번째 삶의 기억이 부재한 두 번째 삶을 "두 번째 삶"으로 명명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앞에 타자가 있다.

이 논의에서 세 번째 문제가 따라 나온다. 바로 타자의 문제다. 내가 어떤 시기로 돌아가 “나”를 반복하여 살면, “난” 이 삶이 다시 시작한 삶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새롭게 살아 내리라 다짐 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혼자서 살아 온 것이 아니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 온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연고(緣故)적 자아”인 것이다. 결국 내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타자와 우리의 기억도 바뀌어야 가능하다. 즉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도 리셋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다크시티>의 영화적 장치는 새겨 볼만하다. 도시 전체의 기억을 바꾸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기억을 바꿔야 모두가 다른 기억으로 내일부터 새롭게 살 수 있고, 도시 자체가 새로운 도시로 살아낼 수 있다고 설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외계인의 실험은 단 한사람, 기억을 잃지 않고 조작 되지 않은 사람 때문에 틀어진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살아도 이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더 나은 삶, 다른 삶을 사는 건 불가능하다고 <다크 시티>는 말한다. 그렇다. 설령 시간을 반복하거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해도, “나”로 다시 사는 다른 삶은 불가능하다. 내 안과 밖이 다 달라져야 겨우 가능성이 있다. 내 외부 조건에는 사랑했던 가족, 사람, 친구, 연인, 배우자와 자식까지 포함 된다. 영화<다크시티>의 알레고리가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왜일까? 당신이 변화를 원해도 세상이 그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의외로 세상과 당신 주변의 사람들은 당신의 진보와 변화를 부추기다가 정작 그것을 실현하려 하면 당신의 발목을 붙잡거나 변화 된 당신을 폄하하곤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의외로 당신의 변화를 싫어하기에 당신의 새로운 결심이 그렇게 새해 벽두부터 좌절되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광고나 마케팅의 사례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수많은 브랜드들이 극적인 변화를 줬다가 고생을 했다. 대표적인 게 코카콜라다. 85년인가, 코카콜라는 펩시가 뒤쫓아 오자 초조해졌다. 그래서 새로운 맛의 콜라를 만든다. <뉴코크>라고 이름 붙였다. 그냥 연구실에서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다. 임원회의 몇 번으로 맛이 결정되고 통과 된 것이 아니다. 무려 400만 달러를 들여서 20만회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쳤다. 그렇게 선택 된 맛이다. 시음에 참가한 소비자들은 분명 좋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콜라가 세상에 나오니 소비자의 반발은 엄청났다. 내 코크를 돌려달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뉴코크>와 함께 예전의 그 맛, 코카콜라 클래식을 함께 팔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뉴코크>는 그야말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물론 이 사례가 사람에게 적용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수 십 년 간 형성한 환경이 변화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거기엔 사람, 즉 친구나 가족도 포함된다. 늘 한결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쓰이는 이유다.


결별, 혹은 이 삶

결국, 어쩌면, 새로운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나와 타자,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가 모두 변해야 가능하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사랑했던 모든 것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속세를 떠나 출가한 스님이 법명을 받는 것, 시몬이 베드로가 되는 것,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어야 두 번째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겨우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우리는 태어날 때 거대한 존재론적 추첨기를 통과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하나의 우연과 하나의 필연이 존재한다. 태어남이라는 우연과 죽음이라는 필연. 다시 태어날 수도 없지만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그 우연의 추첨기를 통제할 수는 없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타협 할 수 없는 부조리한 양극단 사이에서 생은 꾸려진다.


결국, 지금 이 삶뿐이다. 오늘 하루는 최고의 삶을 향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면한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면서 이루고 싶은 것을 꿈꾸며 묵묵히 사는 수밖에 없다. 그 삶의 어느 순간에, 다시 살 순 없지만 다르게 살 가능성을 향한 다른 삶의 방향이, 그 출구가 보일 수도 있다. 도시와 사람들이 잠들 때 홀로 잠들지 않았던, <다크 시티>의 주인공 머독이 도시의 끝에서 끊겨버린 철도 뒤 텅 빈 우주 공간에 자신이 상상하던 바다를 만들어 낸 것처럼. 그러니 지금 살아가고 있다면 망했다는 판단은 미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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