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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Dec 09. 2022

엄마는 나의 타투가 역겹다고 했다

고작해야 피부에 새긴 잉크일 뿐인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타투 (주의: 내 타투 아님) 출처: nenedomi.ink

문신 (文身) 혹은 타투(tattoo). 살갗을 바늘로 찔러 피부의 피하조직에 상처를 낸 뒤 먹물이나 다른 색상 의의 잉크를 흘려 넣어 피부에 그림이나 무늬, 글씨를 새기는 행위를 말한다. 타투의 역사는 정말 길고 길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타투의 흔적은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여성 미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만큼 수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부터 시작된 타투는 종교적 의식이나 주술적 의미, 신분의 상징 등으로 이용되어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삼한시대 때부터 타투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규철, 타투의 유래와 역사, 2008). 타투(Tattoo)라는 단어는 타히티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1769년 7월의 한 신문에서 남태평양을 여행하고 돌아온 쿡 선장이 타히티 주민들을 묘사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나는 타투가 있다. 그렇다고 이레즈미라던지 팔뚝 전체가 뒤덮인 건 아니고, 여러 개의 타투들 몸의 이곳저곳에 분포되어있다. 가장 처음 타투를 받은 건 내가 만 18살,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는 19살..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뭐 그 당시에는 당연히 미성년자로서 타투를 받는 건 불법이었지만 3살 위의 친언니가 타투를 받으러 간 걸 따라가서 보게 된 것을 계기로 나도 그 자리에서 타투를 받게 되었다. 


왼쪽 발목 아킬레스건과 복사뼈 사이에 돛단배를 새겼다. 지금까지도 내가 받은 타투 중에서 가장 즉흥적이고 아무 생각 없이 받은 타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타투 아티스트도 무슨 생각으로 당시 미성년자였던 내게 타투를 해주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받고 집에 오긴 했는데 막상 나중에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이미 그 당시 피어싱이며 염색이며 반항 아닌 반항을 깔짝깔짝 하던 질풍노도의 고등학생이었음에도 이건 뭔가 커도 단단히 큰 일탈을 해버린 것만 같았다. 피어싱이야 빼면 됐고, 염색이야 다시 검은색으로 덮으면 됐는데 이건 지울 수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목긴 양말을 신으면 쉽게 가려지는 신체부위였기에 나는 이 타투를 용케도 이후 2년 동안 잘 숨기고 다녔다. 


그리고 나는 그 물결 위 바람에 떠다니는 돛단배 타투의 의미처럼 호주로 무작정 뚜렷한 목적도 없이 떠났다. 그렇게 호주에 몇 년 머물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내가 요양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 만났던 RN(Registered Nurse), 즉 요양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다. 이분은 다른 여성 간호사분들 중에서 단 한 분의 남자분이셨는데, 상당히 튀는 외모를 지니셨었다. 우선 첫 번째로 키가 굉장히 크셨고, 두 번째로는 남자분이신데도 길게 기른 머리를 상투를 튼 채로 다녔으며, 얼굴도 멋지게 잘 다듬어진 수염으로 덮여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가장 튀게도, 양 팔의 팔뚝부터 손목까지가 모두 타투로 뒤덮여있었다. 언뜻 보면 마치 모델이나 배우의 느낌도 나는 미남형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이 간호사는 이러한 특징적인 외모들의 조합으로 항상 주목을 받던 분이셨다. 


나는 이 분을 처음 봤었던 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우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간 외국인 호주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남자간호사는 아니지만, 이렇게 문신이 많고 상투머리를 한 수염이 멋지게 난 외국 남성 간호사는 처음으로 봤었기에 충격적, 아니 신선했다. 나도 타투가 있긴 했지만 내 돛단배 타투는 그냥 애들 장난인 정도였다. 그분의 아우라에 졸아있는 와중에 내게 하얗고 고른 치열을 빛내며 환하게 웃어주시며 다가와주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나, 편견에 사로잡혀있구나. 


그 이후로도 호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타투를 2개 더 받았다. 이번엔 잘 보이는 어깨에 하나, 그리고 옆구리에 하나. 크기도 꽤나 컸는데 겁도 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설렜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내가 가진 타투의 개수들은 늘어나게 되었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위치도 제각각이다.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문신이 신분을 구별하고 범죄자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예중 하나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도둑과 노비에게 가해진 형벌이었던 자자(刺字)이다. 특히 조선시대 때의 타투는 여러 범죄 유형 중 주로 절도죄를 범한 자를 대상으로 폭넓게 시행되었다. 신체의 손상을 가장 큰 불효요, 수치로 여겼던 사회적 관념 하에서, 살갗에 상처를 내고 글자를 새기는 타투는 가장 부끄러운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 2022).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과 신체발부 수지 불모 같은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비롯되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문신에 대한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다. 젊은 세대에서나 문신 대신 '타투'라고 부르며 패션이나 개성을 표현하는 용도 중의 하나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별로 오래되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지하철에서 만난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가 젊은 여자가 몸을 험하게 굴린다(?)며 내 어깨에 있는 문신을 나무라신 적도 있었다. 


여러 개의 타투 중에서 지난 1년 동안 받은 타투는 총 3개, 각각 뱀과 고양이, 그리고 호랑이를 모티프로 한 꽤나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도안의 타투를 받았다. 개인마다 타투에 부여하는 의미가 있겠다마는, 내게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타투들이고 나는 나의 타투들을 상당히 애정 한다. 문제는 이번 연도 10월 말에 한국에 방문하게 되며 생겼다. 네덜란드에서 살다 보니 보이는 곳에 타투가 있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막상 한국에 가려고 하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이번 한국 방문은 그냥 가족과 친구들의 방문을 넘어서서 회사에서 보내주는 출장이었기에 우선 미팅에서 입을만한, 타투들을 다 가려줄 수 있는 여벌의 블라우스를 구입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한국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었다. 이미 이 세 개의 타투들 전에 받았던 타투들에도 한소리 들은 바여서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은 확정이었다.


10월 후반, 한국의 날씨가 그렇게 덥지 않았기에 첫 번째 주는 무사히 잘 넘어갔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팔뚝을 모두 덮는 품이 큰 반팔을 입었다. 그렇게 무사히 잘 숨기고 넘어가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지개를 켜느라 방심한 틈을 타 우리 엄마가 나의 타투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너 이게 뭐야?!"


벼락처럼 날아드는 엄마의 높은 언성에 나도 모르게 움찔. 


"아 이거..? 예쁘지? 이번에 새로 타투받았어. 이게 뭐냐면..."

"아니 왜 너는 네 몸을 망치지 못해 안달이야? 엄마가 타투 절대 받지 말랬지? 이런 거 없어도 예쁜데 왜 이래 정말!!"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엄마의 아웃사이더 못지않은 속사포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었다. 예전 같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나름대로 대응 아닌 대응책으로 엄마의 눈썹 문신과 아이라인 문신을 언급했다.


"엄마 눈썹이랑 아이라인 문신한 거랑 똑같아. 그냥 잉크야! 왜 이렇게 난리야"

"그게 같아? 그건 미용목적이지. 네가 받은 타투들은 역겨워. 나는 내 딸이 정말 이럴 줄 몰랐어. 엄마는 문신 많은 사람들 보면 정말 역겹다고. 네가 교육을 못 받았니? 허접한 사람들이나 하는 게 문신이야. 껄렁껄렁한 사람들이 하는 게 문신이라고. 네가 깡패야? 네가 술집 여자야?"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 엄마의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점점 더욱더 높아지는 언성과 심해지는 폭언의 강도에 전의를 상실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봤자, 우리 엄마에게 내 타투들은 역겨운 못난이들의 상징이었다. 엄마와의 대화를 일일이 다 적진 못하겠지만 별것도 아닌 걸로 왜 이렇게 난리냐, 라는 나의 반응에 우리 엄마는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했으며 뒷목 잡고 쓰러지실뻔하셨다. 그녀가 내 타투에 그렇게 반대하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 남들 보기 흉하다.

-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 나이가 들면 쭈굴쭈굴해질 텐데 그땐 어떡할 거냐.

- 남들 보기 창피해서 이제 널 데리고 목욕탕도 수영장도 못 간다.

- 즉, 더 이상 자랑스럽게 뽐낼 딸의 몸뚱이가 손상되었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사실 내 입장에선 어이가 없고 그냥 황당한 이유들이었다. 우리 엄마가 나의 타투들을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들을 나는 단 하나도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내 몸에 내가 좋아서, 의미를 붙여서 영구적으로 새긴 것들인데, 남들의 의견이나 남들의 시선이 걸림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하나 반박하니 그녀는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역겹다는 말을 들은 채로 네덜란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네덜란드에 돌아와 이곳의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니 모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특히 내 파트너는 어떻게 엄마가 딸에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어쩌면 그녀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는 '외국에서 유학 마치고 취업까지 해서 사는 딸'이라는 타이틀에 내가 당당하게 남들 다 보라고 흠집을 크게 내버린 것이 더 싫은 것 같다. 한평생 본인에게 대들지 않았던 착한 막내딸이 외국물을 먹더니만 감히 본인의 말을 거스르는 것으로 모자라, 그것도 영구적으로 남는 행위를 했다는 것에 더 화가 치미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좋아하는 재미교포 타투 아티스트는 팟캐스트를 통해 왜 타투 아티스트가 되었냐는 질문에 "타투들은 우리 부모님께 내 인생, 내 몸, 그리고 나 자체는 당신들의 소유물이 아니란 것을 표현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라고 답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녀의 이 답변에 상당히 공감할 수 있었다. 첫 타투 두세 개는 그냥 호기심과 예뻐 보여서였다면, 이번 한국 방문에서의 우리 엄마와의 언쟁 아닌 언쟁은 내가 왜 타투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그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의 마음은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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