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시간 강사에게도 방학은 쉼과 새로운 충전의 시간이다. 그동안 장대처럼 쏟아지던 달근비가 포슬포슬한 가루비로 바뀌어서 우리 부부는 연풍리에 소재한 ‘GRAY M’ 카페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카페를 검색하다 우연히 찾은 카페이다. 두메산골 우리 집에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이렇게 소담스럽고 운치 있는 카페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피자와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로 가려는데 전시된 책에 시선이 갔다.
혹시 하는 마음이었는데, 진짜 그 책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김별아 작가의 ‘미실’을 빌려보려던 참이었다. 김별아 작가는 최근에 알게 된 페친이다. 강원도 문화재단 이사장인데 문화 행사가 있는 곳이면 한걸음에 달려가 강원도 문화 예술인들과 만나 꿈과 열정을 펼치신다. 거의 날마다 관련 글을 올리는데 댓글 하나하나에 공감하고 소통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여 김별아 작가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어 그녀의 베스트셀러 ‘미실’을 읽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카페 책꽂이에서 ‘미실’을 발견했으니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소년처럼 기뻤다.
커피를 마시며 책의 앞부분 작가의 말과 차례를 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데 깜짝 놀랐다.
드라마의 인물 관계도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혈연 및 혼인 관계도가 나오는데 주인공 ‘미실’의 이름이 여기저기 걸쳐져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노마드처럼 미실은 신라 왕실의 역사를 횡단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도무지 해독이 안 되어 한참을 들여다봤다.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씩 그 미스테리의 퍼즐을 맞춰나가기 시작했는데, 미실은 신라시대 3대 왕에 걸친 색공지신이었던 것이다. 색공지신이라니, 무슨 말인지 몰라 갸우뚱거리는 분들이 계실텐데, 세대 계승을 위해 왕을 색(色)으로 섬기는 신하란 뜻이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궁금해하실 폐친을 위해 살짝 말씀드리면 신라시대 골품제는 모계 혈통으로 유지되었고, 왕족은 자신과 같은 혈통을 지닌 자식을 많이 배출해 왕권을 사수했다고 한다. 그러니 색공지신이 필요했고근친혼은 기본이다. 모계혈통끼리 암투가 정치사였다.
미실은 6세기 신라 왕실과 정치를 자신의 치마폭에 감쌌던 여인이었다. 작가는 ‘화랑세기’라는 책에서 역사적 인물 미실을 발견하였고, 그녀의 자유분방했던 성적 욕망과 그 욕망이 어떻게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거침없는 상상력을 펼친다. 미실은 온갖 방중술에 능통했지만, 그녀가 왕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예보다는 마음을 유혹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 책에는 근친혼뿐만 아니라 혼음도 있고 화랑도 사이의 동성애도 등장할 만큼 파격적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유교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색의 카니발이 펼쳐진다. 하지만 정사의 장면은 천박하지 않고 질펀하지 않다.
마음 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던 미실이었기에, 색으로 자유로웠고, 색으로 권력을 잡고, 색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다.
작가는 여성이 다스리는 세상이 복되다는 고대 사회의 복음의 메시지가 지금 현대적 삶에서 울림을 지닐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인정투쟁에서 벗어나 사랑할수록 아름다워지고 따뜻해지고 지혜로워졌던 미실을 새로운 신라에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