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 장애 만점
공부하러 가는 첫날 월요일 아침. 큰 아이가 아팠다. 열이 높아 유치원을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를 돌보기로 하고 남편 혼자 공부하러 갔다. 혼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저녁 산책을 나섰다. 그날 배운 내용을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업 시간에 인격 장애에 대해 검사를 했는데 내 생각대로 적었는데 만점이 나왔다. ”
“우와 인격 장애 만점‘”
웃음을 터뜨리는 내게 심각한 얼굴로
“그럼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이 인격 장애의 삶이었다는 말이야? 잘못된 삶이었다는 말이야?”
“응. 아마도 “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남편은 정말 심각했다. 반듯하고 완벽주의인 남편이 인격 장애 만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완벽하게 잘 살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잘못되었다는 것과 그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연한 두려움에 힘들어했다.
“여보, 인격 장애 만점은 좋은 출발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이걸 알았다는 게 어디예요? 알아야 변할 수 있으니 노력하면 돼요”
남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당황했다.
남편은 완벽주의자였다. 아이들은 얌전해야 했고 아내는 제시간에 식사 준비를 해 놓아야 했다. 모든 것은 정리되어 있어야 했고, 모든 것은 반듯해야 했다. 웃지 않았다. 늘 화가 나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불완전한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늘 분노했다. 활발한 아들은 늘 혼이 났다. 어릴 적 아이들 사진에 벌서는 사진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놀이공원 사진에 아들은 늘 울상이다. 뛰어다니다가 남편에게 혼났다.
남편은 직장 생활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실무를 담당하는 자신과 달리 늘 빈둥거리며 노는 자신의 직장 상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집에 오면 늘 그 사람을 비난했다. 나도 비난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둘이 남을 비난할 때면 죽이 잘 맞았다. 나도 심각한 인격 장애를 앓고 있었다. 나도 내 안에 자아가 없이 남의 평가에 민감했고 내 안의 나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인격 장애 만점 사건 이후 우리는 월요일마다 상담기관에서 공부하며 그동안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강의를 들으며 때로는 특별 프로그램에도 참석하며 우리 부모님의 삶과 우리들의 삶을 헤집었다. 재미있었다. 흥미로웠다. 남에게 한마디도 못 하던 집안의 수치들을 꺼내고 나누었다. 수치를 숨기기 위해 웅크리던 삶에서 그 수치를 나누면서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경험을 시작했다.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나의 성장 과정들 아버지의 외도, 엄마의 분노, 나의 과거 수치들을 사람들 앞에 나누었다. 남편도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아버님의 외도, 엄마의 분노, 자신의 지질함을 나누었다. 직장 상사와 권위자들과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늘 권위자를 비난하고 적대감정을 드러냈는데 그런 모습들이 사라졌다.
우리는 본격 사역으로 나서기 전 좀 더 인간의 내면에 대해 공부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유학을 결심했다. 남편의 큰 누이가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었고 우리에게 미국에 건너오라는 제안을 몇 년에 걸쳐하고 있었다. 3년만 다녀오자. 우린 한국을 잠시 떠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