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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Apr 30. 2024

왼손과 마주한 시간

너와 마주한 시간의 재탄생

작년 아들이 입원했을 때 나열하듯 적어보았던 '너와 마주한 시간'. 글쓰기 수업을 통해 수필로 수정해 보았다. 뼈대에 살을 붙이는 느낌으로, 다시 쓴 글을 보니 또 다른 맛이 있다. 글쓰기를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


수정포인트:

1. 당위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글 중간중간 징검다리처럼 있어야 한다.

2.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감정을 최상급으로 표현하지 않도록 한다.

3. 대화문을 잘 살리면 글이 산다.

4. 첫 문장은 중요하다. 간결하게 시작하라.

5. 독자들이 의아함을 품지 않도록, 친절한 글을 써라.




아들이 입원했다. 다섯 살 인생 벌써 세 번째다. 세 살 때 폐렴으로 처음 입원했을 땐 정신없이 우왕좌왕했다. 네 살 때 장염을 거쳐 이번에 다시 폐렴으로 입원할 땐, 병실에 놓아두고 볼 그림까지 챙겨갈 정도가 되었다. 아이 놀거리와 책도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달리 갈 곳 없는 병실에선, 아이와 오롯이 마주 앉아 노는 시간이 길었다.   


지루해하던 아이는 침대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앞에 마주 앉아 아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시상대 단상 같기도 하고 건물 같기도 했다. 무어냐고 물었더니 화분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녀석은 내게 컬러펜을 가리키고 자신의 스케치를 톡톡 쳤다.


"칠하라고?"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까만 펜으로 화분 하나를 더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스케치를 멈추고 내가 색칠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의 채색이 끝나면 다음 화분을 그려 나갔다. 꼭 잡은 펜을 힘껏 누를 땐, 함께 힘이 들어간 입술이 뾰족해졌다. 작은 혀끝이 나왔다 들어가기도 했다. 당장 끌어안고 뽀뽀해주고 싶은 마음을 다스렸다. 잔잔한 음악도, 주고받는 말도 없었다. 고요 속에서 바둑을 두듯 서로의 차례를 존중해 주었다.  


화분이 열댓 개가 넘어가자 아이는 싫증이 났나 보다. 화분을 그리는가 싶더니 Tic Tac Toe (틱택토 OX) 게임판을 그렸다. 오목과 비슷하지만 ‘O’ 나 ‘X’ 세 개만 연결하면 이길 수 있는 간단한 보드게임이다. 아들과 남편이 게임을 하다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봤으나 나와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는 나의 X를 지우고 제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는, 이겼다며 좋아했다. 남편이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던 이유였으리라. 아이에게 한 판 져주는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 소란을 피웠는지. 그래도 다음 판에, 제 것을 지우고 그 칸을 가리키며 내 것을 넣으라 했다. 제 딴에도 미안했던 걸까. 그리고 찾아온 자랑스러움. 그 마음 꾹꾹 눌러 펴려는 표정이, 감추려는 마음 밖으로 새어 나왔다. 엄마에게 양보한 한 판은 본인이 생각해도 즐거웠던 모양이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점토를 조몰락거렸다. 왼손 끝에 덩어리를 올리고 오른손으로 굴리니 말랑한 공이 되었다. 그렇게 만든 공이 스무 개가 넘어갈 즈음, 점토 만들기도 시들해졌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곧 점토 담은 통을 몬스터와 좀비로 변신시켰다. 서로 뒤엉켜 싸우는 소리가 강력한 지진 소리에 묻히더니, 거대한 쓰나미에 살려 달라는 아우성으로 변했다. 한참을 점토 통으로 양몰이하듯 구석으로 밀어내며 놀더니 좀비가 다 죽었다며 통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는 게임기 두드리듯 뚜껑을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총알이라도 발사하는 듯. 그러나 곧 총알 속도가 점차 느려지며, 귀에 익은 곡조에 드럼 치듯 이 뚜껑 저 뚜껑 박자를 맞추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리드미컬하게 들리던지.


땀이 나도록 한바탕 노래와 드럼 치기를 하고도 에너지가 남았나 보다. 곧이어 천정까지 닿겠다며 통을 쌓아 올렸다. 침대에서 까치발을 할 만큼 쌓아 올리고 나선 깡충거리며 굉음을 냈다. 통이 무너지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며 침대 밑으로 뛰어내렸다. 수액 걸어놓은 스탠드가 휘청하고 주사줄이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주사가 빠질까 줄이 엉킬까 출렁이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상상 속 미션을 달성하고 뿌듯해했다.

‘그래 너 재미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입원이 길어지면, 오른손이 왼 손보다 굵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는 한 손으로도 잘 놀았다. 작은 병실에서 잘 놀아주니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호흡기 치료를 끝내고 나선, 병원 놀이를 시작했다. 자기가 의사란다. 나는 환자가 되었다가 간호사가 되기도 했다. 혈관을 찾는다고 내 팔을 걷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것을 보면, 멍이 든 거냐고 물었다. 그게 핏줄이라고 했더니, ‘아, 그렇구나’ 한다. 주사 놓을 때는, 상상 속 친구 호손 이를 불렀다.


“호손! 아픈 주사니까 잘 참아요.”


호손이 무서우니까 어깨와 팔을 잘 잡아주라고 위치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이다.

“아아악.”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 됐어요.”

호손이인 척 추임새를 넣어 주자, 지시를 내릴 때와는 다르게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주사실에서 오고 가던 대화였다. 아이의 움직임에 혈관이 터질까, 작은 몸은 엄마가 안아 고정시키고, 가는 팔은 간호사 선생님이 잡고 있던 순간. 수액이 잘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둘러섰던 이들의 긴장이 풀렸다. 용감했다는 칭찬을 듬뿍 받을 땐, 마치 별 거 아니라는 듯 태연히 주사실을 나선 너였는데.


호손이를 진정시켜 주는 네 마음이 그렇게 콩닥거렸겠지. 발버둥 치면 더 큰일이 날까, 숨죽이고 기다렸을 순간. 집에서였다면 젤리 하나 더 못 먹게 한다고 서럽게 울었을 다섯 살. 그 아이는 온 데 간데 없이, 담담하게 의사놀이 하는 아들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입원한 지 닷새가 되었다. 왼손에 놓았던 수액주사를 오른쪽으로 바꾸었다. 그동안 뻐근했을 왼손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로움에 신나 하는 것도 잠시. 책을 만들겠다던 아들은 펜을 쥐고 그리다가 바로 멈추었다.


"나 못 그려."


펜을 놓고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다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종이 위에서 펜을 가늠해 보았다. 이리저리 펜을 굴려 잡아 보더니 ‘탁’ 하고 다시 내려놓는다. 아이의 작은 왼손이 종이 위에서 한없이 망설이는 듯 보였다.


아이 곁으로 다가가, 나도 왼손으로 펜을 잡아 서툰 동그라미를 그려 보여주었다.

“어! 왼손으로 그리니까 엄마도 잘 안 그려진다. 우리 같이 왼손으로 해볼까?”

"싫어 안 해. 안 할 거야 엄마가 해!"

아들은 완강했다. 편하게 쓸 수 있는 오른손을 두고, 왼손으로 그리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나의 왼손에 쥐어 있던 펜을 빼어 오른손에 쥐어 주고 제대로 잘 따라 그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펜을 내려놓고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두 팔로 아이를 감싸 안고 귀속말로 속삭였다.

“맘대로 안되니까 속상하다 그치. 어떡하지?”

“몰라! 안 해!”

“그래 그래, 속상해. 그런데 안아. 우리 안이 이름, 지금 엄청 이쁘게 잘 쓰지? 처음부터 쉬웠어? 기억나?”


여전히 뾰로통한 채, 감싸 안은 내 팔을 여러 번 밀쳐냈다 당기기를 반복했다. 발끝으로 종이도 밀어냈다. 한동안 아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저 조용히, 아이를 품에 안고 머리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종이와 책은 살살 다시 챙겨 앞에 놓아주었다. 아이는 책 속 개미를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눈으로 먼저 그려보려는 것이었을까.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었을까. 펜을 집어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는 동안, 단단하게 틀었던 똬리가 조금씩 말랑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아이는 펜을 집어 들었다. 책 한 번 보고 종이 위를 가늠하며 개미 얼굴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서툴게 그린 동그라미 세 개가 조르륵 이어졌다. 그리곤 컬러펜으로 색까지 입혔다. 평소라면 벌써 종이가 구겨져 저 멀리 나뒹굴었을 그림이었는데. 녀석도 그게 어떤 개미인 줄 아는가 보다. 아이의 시도에 과하게 기뻐해 주었다.


“와! 안이가 왼손으로 그린 첫 번째 개미야. 진짜 멋진데”

“응,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며 등을 돌려 걸어가지만, 숨길 수 없는 표정이 또 한 번 새어 나왔다.


 ‘아이야, 고맙다. 너의 왼손과 당당히 마주해 주어서. 세상은 종종 왼손으로 살아야 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땐, 개미를 기억하렴. 그리고 점부터 시작해. 네가 점을 찍기 시작하면 선으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을. 설마, 우리가 개미 한 마리 더 못 그리겠니. 언제나 응원한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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