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병원 놀이
아들의 오른손이 자유롭지 않은 덕에,
왼손의 망설임을 목격했다.
병실에선,
달리 갈 곳 없이, 딴짓도 할 수 없이 아이와 오롯이 마주 앉아 노는 시간이 집에서보다 길었다.
침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방적 지시로, 채색 담당을 맡았다.)
아이는, 까만 펜으로 화분을 그리고 채색을 기다렸다.
나의 채색이 끝나면 다음 화분을 그려 나갔다.
잔잔한 음악도, 주고받는 말도 없이 고요 속에서 바둑을 두듯 서로의 차례를 존중해 주었다.
Tic Tac Toe (틱택토 OX) 게임을 했다. 아들과는 처음이었다.
아이는 내 것을 지우고 지 동그라미를 그려 이겼다며 좋아했다.
그래도 다음 판에, 제 것을 지우고 빈칸을 가리키며 내 것을 넣으라 했다.
성숙한 게임 문화도 이미 알고 있다니.
테이블에 마주 앉아 점토를 조몰락 거린다.
점토 만들기가 싫증 나면, 점토가 담긴 통으로 게임을 만들어했다.
혼자서 개발한 게임들의 규칙은 말이 되지 않아도 무조건 따라야 했다.
쌓기도 하고, 게임기를 두드리듯 열심히 뚜껑을 가격하며 상상 속 미션을 달성하고 좋아했다.
이번엔, 병원 놀이가 시작되었다.
자기가 의사란다.
호흡기 치료를 하고, 혈관을 찾고, 주사를 놓는다.
아픈 주사를 놓을 거라면서, 참으라고 했다.
친구들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친구 무서우니까 어깨와 팔을 잡아주라고 위치도 알려주었다.
책을 읽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책을 만들자고 한다.
페이지마다 똑같아야 한다며, 그림을 따라 그리라고 했다.
결국, 빠져나갈 궁리를 했던 것인가.
기껏 바닥에서 아픈 허리를 참아가며 그려주었더니,
'조금 비슷하다'는 평을 내렸다.
입원한 지 닷새가 되어, 수액 주사 손 위치를 바꾸었다.
오른손잡이라, 며칠 불편하게 생겼다.
왼 손으로 펜을 쥐고 그리려다, 오른손만큼 자유롭지 않은 것을 알고 시도를 멈추었다.
"나 못 그려."
펜을 놓았다. 그러다 그려보고 싶은 맘이 잠깐 들었는데, 종이 위에서 펜을 가늠해 보더니 다시 내려놓는다.
"안 해. 못해. 싫어."
점 하나만 찍어보라고 했다.
일단 시작만 해보라고 했다.
이제부터 둘 다 왼손으로 그리자고 했다.
왼손에서 펜을 빼어, 오른손에 쥐어 주고 제대로 잘 따라 그리라고 지시를 내렸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귀속말로 응원을 했다
아이가 개미 얼굴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버려 두는 게 감사했다.
아이의 시도에 과하게 기뻐해 주었다.
왼손으로 그려낸 첫 개미라고.
네가 점으로 시작하면 선으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일들이 생겨.
점부터 시작해.
그리고 마무리를 지어보자.
설마, 우리가 개미 한 마리 더 못 그리겠니.
Love you 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