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밑 빠진 독에는 물을 붓지 마세요
'사는 게 지옥이구나'싶을 때가 있었어. 그럴 땐 운전대를 잡고 안전벨트를 조여. 가스페달에 오른쪽 발을 올리고 희망을 향해 쏴. 1번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총을 쏘듯 달리다 보면 "Hope"가 나타나거든.
밴쿠버에서 1시간 30분쯤 달리면 가 닿는 소도시, Hope(희망)는 천국이 아니어도 괜찮았어. 그저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로 나를 끌어당기던 그곳에 발을 들이면 숨쉬기가 수월해졌거든. 이제 더 이상 가지 않는 그곳은 록키를 찾아가는 여행객들이 들러 먹거리와 가스를 채우고 다시 출발하는 곳이야. 1800년대 중반 모피무역 중개지였고 서부 개척시대 골드 러시가 일었던 곳이니 그곳에 희망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지명이 된 건 아닐까?' 생각했어. 희망을 안고 찾아왔지만 어떤 이에겐 천국, 어떤 이에겐 지옥이 되었을 "호프". 네가 우리 가족이 되기 전이니 가본 적 없는 네가 믿기는 어렵겠지만 그곳엔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단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희망(Hope)에 '지옥의 문(Hell's Gate)'이 입을 벌리고 있단 말이지.
프레이저 캐년의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한 'Hells Gate'는 철도의 역사, 연어의 산란과 삶에 대한 단편영화와 생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어업전시관이 있는 관광지야. 탐험가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가 자신의 탐험일지에서 프레이져 강에서 가장 깊고 좁은 협곡인 이곳을 보고 "아무도 모험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확실히 이곳은 지옥의 문이기 때문이다"라 기록했어. 그때부터 그곳은 Hell's Gate로 불리게 된 거야. 희망을 보려고 달려간 곳에서 지옥을 만나고도 천국과 지옥이 연결되어 있단 걸 그때는 알지 못했어.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문장을 지옥문 위에 걸어 두신 단테 할아버지를 읽기 전에는 말이야.
사랑하는 리오!
천국이 될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지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여자 까미유를 아니? 조각가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성공은커녕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살다가 쓸쓸히 죽어간 비운의 여인, 까미유 끌로델 말이야.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로댕과 함께 단테의 신곡에 영감을 받은 "지옥의 문"을 제작했지. 그중에서도 지옥의 문 중앙에 배치한 "생각하는 사람"의 손과 발은 그녀의 작품이야. 붓으로 그릴 때도 표현하기가 까다로운 손과 발의 조각을 까미유에게 맡겼으니 그녀의 실력을 따라올자가 없었단 증거지.
로댕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작품을 위한 영혼의 교감은 육체의 교감으로 이어졌어. 그에게는 사실혼 관계의 여인 로즈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럼에도 수많은 여자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던 로댕은 까미유에게 천국의 문이 아니라 '지옥의 문'이었어. 스승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그들은 모든 이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어. 단지 사랑했을 뿐인데, 사랑의 결과는 너무 끔찍했지. 로댕과의 결혼을 꿈꿨지만 로즈를 선택한 그를 떠나 자신을 위한 작품을 할 거라고 독립선언을 했어. 열정과 재능이 있었기에 혼자 일어설 수 있을 줄 알았고 노력했어. 노력과 재능만으로는 넘을수 없는 세상은 그녀의 창작품을 로댕의 아류라 비하하고 조롱했어. 로댕에 버림받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으며 경제적 어려움까지 닥치게 되지. 이런 일을 당하며 우울증이 찾아왔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병적으로 그녀를 미워했던 어머니와 가족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말아.
병원에 감금된 후 유일한 대화상대였던 동생 폴에게 작품을 할 수 있게 해 달라 부탁했어. 직업을 구하지 못한 폴에게 외교관의 자리를 주기 위해 힘써준 누나였는데 그런 누나를 외면했지. 창작활동을 할 수 없다는 건 예술가에겐 죽음을 뜻하는데 말이야. 외교관이자 시인으로 존경받던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갈까 두려웠던 폴은 자신의 치부가 될 누나는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되는 거였어. 작품만 할 수 있으면 갇혀있어도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예술로 치유받았을 텐데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지. 그렇게 육신은 살아 숨을 쉬어도 이미 죽은 존재였고 진짜 육신이 죽은 장례식엔 폴조차 참석하지 않았어. 무연고자로 공동매장되었고 지금도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는 거야.
리오!
언젠가 보여준 조각상 '다나이드' 생각나니? 길고 풍성한 머릿결에 새하얀 피부의 여자가 쓰러져 엎드린 아름다운 여체에 감탄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고통에 가슴이 시려오는 작품이지. 로댕은 '다나이드'를 제작을 하고도 '지옥의 문'에서 제외시키고 독립적인 작품으로 남겼어.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야. 아버지 다나오스의 명에 따라 첫날밤에 남편을 살해한 49명의 딸들 중 하나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형벌을 받다 지쳐 쓰러진 모습을 포착한 장면이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물항아리처럼 그녀의 삶 또한 결코 채울 수 없는 항아리였어.
아무런 보람이나 의미 없는 일을 무한반복하는 일, 그것이 지옥이니 그런 자신의 생을 예견했을까? 까미유는 다나이드의 모델을 자처했고, 다나이드였어. 사실혼 관계의 여자 '로즈'와 아들이 있다는 걸 알고서도 로댕에게 빠져들어간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거든. 로댕은 바람둥이였지만 젊은 시절 가난했던 자신에게 헌신했고 가정을 지킨 여자를 떠나지 않았어. 결혼한 대다수의 남자들은, 자신을 위해 헌신한 아내뒤에서 바람을 피우고 부도덕할지라도 가정은 지키려 하지. 까미유는 그걸 몰랐던 거야. 여성이란 성정체성만으로도 살기가 힘들었던 19세기에 로댕에 버림받고 '로댕의 아류'라 손가락질당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은커녕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도 누리지 못했지. 그녀가 선택한 건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독이었던 거야.
내가 물을 붓고 있는 항아리가 밑 빠진 독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있을까? 발의 역동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보는 사람에게만 발을 보여주는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위' 맨 중앙에 앉아 있지. 혹시 "누굴까?" 생각해 본 적 있니? 난 그 조각상에서 세상사람들이 추측하는 단테나 베르길리우스, 로댕도 아닌 아름다운 한 남자를 봤어. 넌 모르겠지만 지옥의 문을 제작한 시기는 1880년부터 1917년이야. 꿈에라도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이 아름다운 남자가 태어난 건 1914년이니 로댕이 내 말을 듣는다면 가슴을 치거나 실소를 터트릴지도 몰라. 그래도 어쩌겠어. 로댕은 죽었고 모든 예술의 완성은 관람자에게 있는 것이니 허무맹랑한 내 시선에 대해 실소를 하든 박수를 치든 나는 이 남자를 보고 말았어. 이 아름다운 남자 이야기는 다음편지에서 들려줄게. 그럼, 길었던 오늘은 잘 자고 내일 또 만나. 내 사랑하는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