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살기 좋은 동네란 1) 도서관이 있어야 하고, 2) 가벼운 트레킹이나 산책을 할 수 있는 공원이나 등산로가 있어야 하고, 3) 맛있는 빵집이 있어야 한다.
해리단길(해운대구 우1동)은 이 세 가지의 조건을 다 충족하는 곳이다. 동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 등산로나 공원이 없나 찾아보던 중에 황령산 봉수대 말고도 다른 봉수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름은 '간비오산 봉수대'. 간비오산이라고 검색하거나 봉대산이라고 검색하면 봉수대에 대한 정보가 나오고, 봉화를 했던 곳이기에 높은 곳에 위치해 주변 경관이 다 보인다. 한 마디로 뷰가 좋다는 뜻이다. 해운대 바다와 높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경관을 볼 수 있다.
많은 블로그 검색을 통해 알아낸 것은 해운대 여고와 협성 엠파이어 아파트 사이에 등산로가 있다는 것이고, 그 쪽으로도 봉수대에 올라갈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대망의 다음 날, 오전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조금 길어지면서 정성스럽게 포스팅을 끝내고 나니 4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늦지 않게 봉수대에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준비를 마치고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집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더 좋은 점은 이 동네는 학생들과 주민들이 많은 곳이고 대체로 조용하다는 점이다.
입구에서 봉수대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감하기로 30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였지만 길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높은 곳으로 등산로가 펼쳐져 있다면 그쪽을 향해서 올라갔고, 정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데크가 하나 나왔다. 그 데크에서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도 멋졌다.
봉수대에 도착하니 해운대 전경이 보였다. 탁 트인 시야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더 좋았던 것은 아무도 없어서 나 혼자 그 풍경을 독점했다는 사실이다. 곧이어 몇몇 분들이 올라오시긴 했으나 정상을 만끽하시고는 금방 내려가셔서 혼자서 여유로이 일몰과 월출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경험,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보통 일몰은 구경해도 달이 떠오르는 것을 함께 보기가 힘들다.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해서 날마다 달이 뜨는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니! 오늘은 운이 좋은 게 틀림없다.
달은 5시 10분쯤 되어서야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달이 뜨는지도 모르고 셔터를 눌러대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체가 동그란 것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 오늘이 정월대보름이었지!' 어제 정월대보름이라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잊어버렸다가 직접 사진을 찍으며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올라간 봉수대에서, 일몰과 월출을 동시에 구경한 것도 좋은데, 마침 그 달이 정월대보름달이라니. 달이 서서히 뜨기 시작해서 해가 질때 즈음되니까 더욱더 선명해졌다. 그 혼자만의 한 시간은 정말 황홀한 시간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파도소리처럼 느껴졌다. 분명 산인데 바다같은 느낌. 바람이 차가웠지만 서쪽에서 강렬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던 태양 덕분에 따뜻하기도 했다. 매직 아워, 해가 질 무렵 그 한 시간은 정말 아련한 색감을 보여준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그라데이션에 마음이 녹는다. 눈도 즐겁고 귀도 즐겁고, 철저히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기분이었다.
가끔 나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적절한 타이밍이 가져다 주는 기쁨'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원할 때 원하는 것이 펼쳐지는 상황 또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원해왔던 상황이 펼쳐지는 순간. 이 적절한 타이밍의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진심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써서 말이다. 그 순간이 자주, 매번 펼쳐지지 않기에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제주도를 여행할 때 며칠 동안 구름이 잔뜩 껴서 해가 지는 것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아쉬움이 남아 그것을 보기를 원했었나 보다. 이렇게 혼자 일몰을 전세내고 구경하다니. 사진을 취미로 가진 이후, 달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 망원렌즈도 없고 아파트에 가려 달이 잘 안보이기도 해서 매번 실패했었다. 그러나 딱 오늘, 타이밍 좋게도 보름달이 떠서 내가 가진 표준렌즈로도 담을 수 있었고, 또 하필 오늘 망원렌즈가 하나 도착하는 바람에 산을 내려와서도 실컷 달을 찍을 수 있었다.
짧은 운동코스를 발견한 기쁨, 멋진 뷰를 조용히 감상할 수 있다는 기쁨, 월출과 일몰을 함께 구경하는 즐거움, 새로 산 렌즈로 보름달을 담았다는 만족감, 이 모든 게 하나씩만 와도 좋은데 한꺼번에 몰려왔다니 난 운이 좋은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게 우연 같지만 미래의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만들어낸 건 아닐까? 영화 <컨택트>를 보고 나니 괜스레 드는 생각이다.
Camera: Fujifilm X-S10, XF 18-55mm F2.8-4, Nikkor 105mm micro F2.8
Location: Ganbiosan Beacon, Haeundae-Gu, Bu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