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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May 21. 2024

중3 아들의 중간고사 시험지

행방불명된 종이뭉치를 찾아서

“승리야, 중간고사 시험지 내일 책상에 두고 가.”

중간고사를 치른 다음 주에 내가 승리에게 한 말이다. 시험 점수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값이고 최소한 승리가 시험지를 어떤 자세로 풀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시험 내용과 난이도도 궁금했다.

“네.”

평소처럼 대답을 하고 승리가 들어간다.

다음 날, 승리가 집을 나가고 승리 책상을 보니 비어 있다.

‘이 녀석, 시험지 올려두고 간다더니 잊었군.’ 

그날 저녁 승리가 밥을 먹을 때 내가 말했다.

“승리야, 너 시험지 깜박 잊고 안 놓고 나갔더라. 내일은 두고 가.”

“네.” 승리는 어제와 똑같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가고 한 주가 갔다. 또 한 주가 갔다. 그리고 어제.

승리의 책상은 시험지는커녕 펼쳐진 문제집 하나 없었다. 승리는 영원히 시험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넌 언제까지 승리 형 책가방 속에  있어야 했을까?

나는 승리와 남편에게 훈제 오리고기로 저녁을 차려주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최애 프로그램 중 하나인 <최강야구>를 보려고 TV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야구 팬들에게 야구 경기가 없는 쓸쓸한 월요일을 공략한다는 발상을 하다니! <최강야구>는 정말 발상도 내용도 인기도 최강이다. 인정!)

엄마와의 약속 따위 하나 중요하지 않은 아들의 저 여유로운 태도를 더는 용납해선 안 되었다. 나는 그 태도로 이어져 간 희미한 시간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최강야구>를 소파에서 보다가 설거지를 하러 씽크대에 자리를 잡고 선 남편을 향해 내가 말을 걸었다.

“승리 아빠, 승리가 중간고사 시험지를 보여준다더니 2주가 흘렀어요.”

“엉?” (아빠는 이런 처음 접하는 정보에 취약하다. 어찌할 줄 모르는 중립적 반응.)

“2주간 엄마 요구를 안 들어주었으니, 엄마도 내일부터 2주간 승리가 차려달라는 저녁을 안 차려주려고요.”

“하하, 그래야겠네.” (슬며시 승리의 표정을 살피다가 승리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걸 확인하고는 엄마 편을 들어도 되겠다고 판단한 뒤 선택한 아빠의 대답.)

이렇게 대화를 마치고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일단 너의 행동이 잘못이고 엄마가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표출하였으니 되었다.


흠, 그런데 이렇게 상황이 종료되면 뭔가 애매하다. 사춘기 아들이 “죄송해요, 엄마.”라고 하면서 시험지를 내밀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의 시험지를 내가 보지 않고 너의 밥을 정말 2주간 차려주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

3분 정도 고민의 시간을 가진 뒤 나는 안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승리를 향했다.


“11시까지야. 시험지 식탁에 올려둬.”


11시까지는 정확히 11분이 남아 있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자존심 너무 상하지 않고 여유 있게 가방에 있는 시험지를 챙겨 식탁에 올려둘 정도의 시간이다. 나는 그 말을 최후의 한마디처럼 남기고 다시 안방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래, 싸우지 않아서 나 정말 잘했어. 화내지 않고 남편을 활용해 우회한 방법도 좋았어. 잘했어, 잘했어.’

기다리는 시간에 유튜브 앱을 켜고 ‘사춘기 아들’을 검색했다. 김윤나의 <엄마 말 그릇>, 양재웅 의사 강연 등이 이어졌다.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니 11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11시가 많이 넘은 시각, 나는 빼꼼 안방 문을 열었다. 아까와 동일한 자리에 승리가 앉아 있었다. 승리는 엄마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11시 1분 전에 갖다놨다요.”


식탁 위에는 시험지로 추정되는 종이뭉치가 다소곳한 자세로 서, 아니 앉아, 아니 누워 있었다.

나는 무심한 얼굴로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종이뭉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이렇게 하나하나 체크를 하면서 시험을 봤어? 이야, 우리 아들 멋지네. … 어머어머, 이렇게 어려운 걸 배우는 거야? 아, 루트 n, 루트 3n, 루트 5n을 왜 더하래, 정말.”

틀린 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어쩌나 했던 아들은 엄마의 반응에 마음이 좀 놓인 듯했다.

“루트? 루트가 뭐야?” 아빠의 한 술 더 뜬 반응에 승리 얼굴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까지 변한다.

나는 시험지를 한번 훑은 뒤 종이들을 차곡차곡 삐져나오지 않게 잘 갰다. 그리고

“엄마 이거 보면서 공부 좀 해야겠다. 승리야, 당분간 내가 좀 볼게.” 허락을 구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가 잠식당하지 않도록

서재 책상에 시험지 뭉치를 올려두었다. 맘처럼 시험지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시험지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저 시험지를 항상 봐야 한다 생각하니 인생의 황금기 청소년기로 다시 보내주는 경품에 당첨되더라도 그 경품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겠다고 다짐했다.


한번 승리 입장이 되어 본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본 결과에 대해 부모라고 선생님이라고 이런저런 코멘트를 할 걸 승리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 아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반항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시험지 자체를 주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르겠다. 시험지를 줄 수도 안 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승리는 상대방이 그 시험지라는 걸 잊어버릴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전략을 쓴 건 아닐까. 시험과 시험지 속에서 가장 속이 터지고 속상한 건 시험을 본 당사자인데, 엄마는 선생님은 당사자 앞에서 한숨부터 쉬고 있으니 아이들은 자기 속상한 걸 표현할 기회마저 빼앗긴다. 참 억울하겠다. 교복 입은 게 죄인지 어른들은 맨날 시험, 시험, 시험만 강조한다. 다 널 위해서야, 라는 와닿지도 않은 사족을 붙여가면서.


나는 시험지를 더 보지 않고 한쪽으로 치운다. 당분간 가지고 있다가 승리한테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꺼내 보기로 했다. 화는 결국 아이에게 덧씌운 엄마의 무모한 기대에서 비롯한 거니까.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에 최선을 다해 맞춰보려는 아이의 성의를 떠올리며 나의 기대를 뭉개 보겠다. 기대인지 걱정인지 구분을 해보겠다.

승리, 넌 몽글몽글 피어나는 5월의 장미야

잘 안될 것이다. 항상 100점을 맞고 싶지만 잘 안되는 승리처럼. 그래도 우리 모자는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해치지 않으며 자신의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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