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a bad day with you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정리할 때 티셔츠들이 뒤집혀 있었다.
‘세탁기에 넣을 때 뒤집힌 걸 못 보았는데….’
다 마른 셔츠들을 뒤집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게 되니 슬쩍 귀찮아졌다.
오늘 땀에 젖은 셔츠를 갈아입을 때였다.
‘그래, 아예 뒤집어서 벗으면 되겠구나.’
나 좀 천재 아님?
벗을 때도 쉽고 다시 뒤집는 수고도 덜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잖아.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는 일이 이리 설렐 일인가.
나는 띵띠리리~ 건조 완료 알림음이 울리자마자 달려갔다.
뜨끈뜨끈한 옷들을 품에 안고 와서 거실 바닥에 뿌렸다.
뒤집힌 옷이 뒤집혀 원상태로 되어 있으렷다!
학창시절 수학 과목 도형의 회전 문제에서,
한 도형을 180도 회전한 뒤 다시 180도 회전을 하면 어떤 모양인가요? 고르라고 하니 원래의 도형을 딱! 찾아낸 기분이랄까.
나는 내가 뒤집어 벗은 티셔츠를 손에 들었다.
헉!
이건 또 무슨 조화지?
티셔츠는 뒤집힌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버드나무잎을 가지고 ‘그애가 나를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반복하면서 잎사귀를 하나씩 뜯어 나갔다.
‘좋아한다’에서 잎사귀가 끝나면 정말 좋아하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가지 하나를 더 뜯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안 좋아한다’에서 끝나면 그걸 믿기 싫어 ‘좋아한다’가 나올 때까지 여러 개의 가지를 희생시켰다.
왜 항상 ‘좋아한다’보다 ‘안 좋아한다’가 많이 나오는 거지? 순정의 마음은 애꿎은 버드나무잎에 원망의 독침을 날렸다.
(땅에 떨어진 초록의 잎들에게 지금이라도 미안함을 전한다. 관세음보살.)
확률에서는 그 행위가 유의미하게 무한히 행해질 때 얻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전제한다. 무한히 던졌을 때 동전의 앞면이 나올 확률은 동전의 뒷면이 나올 확률과 2분의 1로 같다고 수학에서는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동전을 몇 번 던지고 계속 앞면이 나온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동전 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올 확률은 2분의 1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정된 경험에서 비롯된 추론의 오류다.
건조기는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번 뒤집힘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 손에 쥐어진 티셔츠가 원상태로 되어 있을 확률은 50 대 50. 분명 뒤집히지 않은 셔츠들도 있었을 터인데, 그건 너무 당연해서 나는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뒤집혀 나온 셔츠가 신기해 보였을 테고, 그러므로 “건조기에서 나올 때 셔츠는 뒤집혀 나온다”라는 편견의 명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삶이 버거울 때가 있다. 왜 이리 나에게만 이런 불운이 닥치는지 모르겠다고,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내 인생에 행운보다 불운이 더 자주 찾아온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불운은 내게 뒤집힌 셔츠일지 모르겠다. 행운은 멀쩡한 셔츠라서 행운으로 못 느끼고, 불운은 뒤집힌 셔츠처럼 낯설기 때문에 강렬하게 불운으로 인식되는지도. 그래서 ‘왜 맨날 셔츠가 뒤집혀 나오지?’라고 불평하는지도.
셔츠를 일부러 뒤집어서 빨고 건조를 시켜도 여전히 뒤집혀 나올 수 있듯, 올 불행은 어떻게 해도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큰일은 아니다. 뒤집으면 원 상태가 된다. 그냥 조금 수고로울 뿐이다.
무엇보다 뒤집혔다고 꼭 불행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을까.
뒤집힌 셔츠를 입었을 때 실밥이 몸에 안 닿아서 일부러 뒤집는 스타일의 셔츠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니까.
그저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두고
일어난 일에 대해 무심하게 대하고 싶다.
실은... 불량 건조기라고 무료 반품할 시기가 지났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