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시아문학 – 그것의 쓸모를 따지던 자
러시아소설을 떼어놓고 나의 20대를 말할 수 없다. 체호프를 들이마시고 톨스토이를 내뱉었다. 나의 들숨과 날숨에 100여 년 전 저 먼 대륙의 거장들을 초대했다. 조금 행복했다.
30대 때 업무로 그들을 다시 만났다.(나는 세계문학전집 편집자로 일했다.) 20대와 달라진 건 돈을 내고 만났던 그들을 돈을 받으며 만난다는 것?! 신비롭게도 작품 내용의 90퍼센트는 기억나지 않지만, 읽을 때 설렘 분출이라는 몸의 작용은 여전했다.
40대. 업무에서도 일상에서도 소설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업무용 책상 위 도서들은 기획을 위한 논픽션 검토서들이었고, 집 안 식탁에는 잘 크는 아이, 똑똑한 육아법, 우리 아이를 위한 전래동화 등 일상 밀착형 실용서들이 흩어져 있었다.
러시아문학은, 소설은 어따 써먹어야 하나.
조금 행복했던 20대에도, 그것으로 입에 풀칠했던 30대에도, 절교한 지 오래된 친구 사이로 지낸 40대에도 소설은 답답한 고구마 같은 면이 있었다.
“엄마는 학교에서 무슨 공부 했어?”
“러시아문학을 공부했지.”
“참 어려운 걸 공부했네.”
“….”
“그거 공부하면 돈 잘 벌어?”
아들이 초등 6학년 때 내게 물었었다. 그거 공부해서 돈은 버냐고. 나는 니 기저귀값은 벌었다고 답했다.
생활에 어떤 쓸모를 주는지, 러시아문학 공부의 필요성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었다. 아들이 콕 집어 말한 대로 이걸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더 깊은 연구를 포기하기도 했다. 문학을 ‘공부하는 자’는 문학을 ‘창작하는 자’보다 설명하기가 복잡하다. 구차한 면이 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소설가인데,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은 뭐라고 부르지? 문학가? 소설연구자? 심지어 러시아문학?
2. 한국소설 – 그것의 창작자 되기
작년에 지인의 소개로 소설반 수업을 듣게 됐다. 소설을 공부하는 수업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공부를 하는 수업이다. 살면서 내가 소설을 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초등학생 때 일기장을 보니 그때도 꿈이 소설가는 아니었다. 여러 꿈 중 하나에 ‘시인’이 있기는 했다. 짧은 시를 쓰는 시인이 소설가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까?
무튼, 꼭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설반 학교에 다니려면 과제를 내야 했다. 소설 창작 과제와 더불어 소설 비평 쓰기 과제가 더해졌다. 비평문 대상 작품에는 근현대 세계문학과 역대 신춘문예 수상 작품이 있었다. 과제를 하려고 보니 내가 한국 현대소설을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었나 까마득했다. 현대소설의 분위기도 모른 채 소설을 쓴다고 앉아 있는 내가 민망했다.
현대 한국 단편소설의 경향성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신춘문예 선정작과 별도로 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을 택했다. 등단 10년 미만의 ‘젊은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 작품들 중에서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선정해 상을 수여하고 이를 묶어 다음 해에 책으로 출간한 책이다.
이를테면 올해 출간된 책 제목에서 ‘2024’라는 의미는 2023년에 잡지 등에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해 2024년에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했다는 뜻이다. 또한 2024년은 이 상이 제정된 지 열다섯 번째 해이므로, 최종 책 제목은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2023년 작품집까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올해 작품집은 7,700원 특별 보급가에 혹해 구매를 했다. 수록된 작품은 총 일곱 편이다. 대상 한 편을 포함한 숫자다.
대상 수상작인 김멜라의 <이응 이응>을 비롯해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김기태 <보편 교양>, 김남숙 <파주>, 김지연 <반려빚>, 성해나 <혼모노>, 전지영 <언캐니 밸리>를 순서 상관없이 내킬 때마다 한 편씩 읽어 나갔다.
최근 5년여의 수상작품집을 보긴 했지만 이번처럼 수록된 모든 작품을 읽은 적은 없었다. 관심 있는 작가 중심으로 읽었고, 우연히 펼친 작품을 추가로 읽는 정도였다.
3. 한국 현대소설과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이어서 짝 만들기
그런데 이번 작품집은 이상하게 다 읽게 되었다. 재미있을까?보다 뭐, 재미있겠어, 하는 의심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빨려들 듯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작품보다 재미있는 작가노트를 돋보기 쓴 눈으로 가까이 다가가 읽었고,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해설까지 읽고 있었다. 뭘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몇몇 작품에서 뭔가 기시감 같은 게 느껴졌는데, 그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책장 속에서 먼지 입은 책들을 꺼내 뒤적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고구미 답답이들-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단편집들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기보다 ‘익숙한 만큼 갖다 붙이고 싶다’가 이 상황에 적절한 표현일 게다.
나는 한국 단편 하나와 러시아 단편 하나를 이상한 색의 끈으로 이어 붙이기를 하고 있었다. 성해나 <혼모노>의 주인공 만수가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의 후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150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똑같이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진화하고 변형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무장한 모습이랄까.
소설적 기법이 아닌 등장인물과 주제에 밀착한 한 쌍 만들기. 지금도 아이들 문제집 연습문제에서 왕왕 나오는, 왼쪽 목록을 오른쪽 목록과 상관관계에 따라 선으로 잇는 문제와 같다. 나는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한국 단편소설을 기준으로 삼아 왼쪽에 놓았고, 러시아 소설들을 오른쪽에 배치했다. 잇다 보니 자연스럽게 착 감기는 조합이 있는 반면 어떤 작품은 무엇과 이어야 할지 딱 떠오르지 않기도 했다.
자만추. 선 잇기에도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이론이 적용됐다. 이거는 저거다! 전기가 찌르르한 커플만 골라 매칭했고, 그렇게 해서 총 네 결합이 이루어졌다.
① 톨스토이 <무도회가 끝난 뒤> - 김남숙 <파주>
②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 성해나 <혼모노>
③ 고골 <외투> - 김지연 <반려빚>
④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각각을 결합했지만 한 회에는 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기로 했다. 짧은 브런치 글에서 두 작품의 교차를 한 회 분량에 다 녹이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더불어 두 개를 매칭하는 최종 막대기는 내가 아닌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손에 달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작품에 대한 각각의 글은 별개로 존재하지만, 서로 이어지는 접점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써 나갈 것이다. 두 회의 글이 나중에 한 세트로 다시 읽히기를 소망한다.
시작은 한국 현대소설이 먼저지만 글에서는 러시아 소설이 먼저 등장한다. 이유는, 기시감의 원천을 먼저 제시하고자 함 때문이다.
나머지 세 개의 한국 단편들이 짝을 만나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 내가 읽고 기억하는 러시아소설이 턱없이 몇 개 안 되어서이고 둘째로, 요새 드라마 회차도 짧은 게 대세 아닌가. 오랫동안 재미있게 쓸 자신이 없음을 요즘 트렌드를 방패 삼기로 했다.
연재를 결심하게 된 딱 한 가지 이유는 이거다.
재미있게 읽기, 재미있게 수다 떨기.
책 읽기는, 그리고 책에 대한 책을 읽기는 항상 재밌어야 한다.
내가 가장 즐거운 일이 누군가에게도 재미있는 일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그 누군가들이 여럿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