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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Jun 21. 2024

은설과 오백 원(상)

한반도문학 여름호 단편소설 #1/2



1.

화사한 벚꽃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어느 봄날, 그녀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어깨에 살짝 드리운 까만 머리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까만 구두를 신고. 구두 조금 위에서 살짝 접혀있는 하얀 양말 그리고 그 위로 하얀 양말만큼이나 흰 그녀의 종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와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훔쳐보았다. 그녀는 바쁘게 왔음인지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오뚝한 코에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얼굴의 중앙선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보며, 나는 목이 바짝 마르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런 그녀가 내가 이야기할 때, 까맣고 큰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녀도 나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녀는 설이, 은설이라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은설? 백설이 아니고 은설? 은빛 눈이라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 내리는 추운 겨울 산을 덮은 하얀 아니 회색 눈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떨어져 바닥에 쌓이는 눈은 흰색이지만, 그게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면 오히려 회색빛에 가까웠다. 그리고 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눈 쌓인 먼 산의 모습도 회색빛으로 보였다. 은색은 흰색과 회색의 어디쯤이다. 은설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왜 하얗게 반짝이는 은빛이 아니라 색깔이 퇴색된 회색빛을 떠올렸을까?


"상철아, 너는 어떤 여자를 좋아해?"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그녀 생각에 가득 차있었던 나는, '바로 너 같은 여자'라는 말이 거의 입에서 튀어나올 뻔하였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이성이 내 혀를 꽁꽁 묶었고 대신 다른 말을 끄집어냈다.


"그냥 얌전하고 착한 여자가 좋지. 거기에 조금 예쁘면 더 좋고."


"어, 알겠어."


그리고 그다음 주에 그녀는 자기 친구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2.

은설과 나는 짝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은 원래 남자와 여자 5:5의 미팅이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여자 쪽에서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겼다며 두 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남자 다섯 명에 여자 세 명, 짝이 맞지 않는 미팅이 되고 말았다. 짝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카페에 모여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대학생이니만큼, 학교, 동아리, 축제 이야기 등이 오갔고, 서로 좋아하는 이성상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나서 짝 정하기 게임이 진행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남자들에게는 짝이 정해질 확률 60%, 피 볼 확률이 40%나 되었다. 당연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이 자기 소지품 한 개씩 내어놓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그중 하나를 골랐다.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내놓았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실수였다. 겨우 오백 원짜리 동전에 눈길을 줄 여자는 없었던 것이다. 은설은 짙은 갈색의 두툼한 지갑을 집었다. 오백 원짜리 동전과 두툼한 지갑. 누가 봐도 선택의 결과가 뻔하였다. 그렇게 나와 은설은 어긋났고, 그녀는 지갑 주인인 명석과 짝이 되었다.


명석은 훤칠한 키에 유머와 머리를 겸비한 친구였다. 자기 이름답게 두뇌가 명석하여 공부도 잘했고, 성격도 쾌활하여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물론 여학생들도 그런 명석을 좋아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주변엔 여자들이 많았고, 그는 여학생들과 사귐과 헤어짐을 반복하였다. 여자들과 사귀면서 어느 정도까지 깊은 관계로 발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가끔 명석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학과 친구들 사이에 퍼지곤 하였다.


은설이 명석의 지갑을 집어 들고 그 주인이 명석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먼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길을 돌려 명석을 보고 인사를 나눴지만,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주쳤던 그녀의 눈길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그녀가 나와 짝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것은 아니었을까?


카페에서의 미팅은 그렇게 끝났다. 짝이 된 세 쌍은 끼리끼리 자리를 떠났고, 짝이 없는 두 명만 남았다. 나와 또 다른 친구 한 명. 그 녀석도 어지간히 재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명품 가죽벨트 정도면 여자가 집을만한데, 그렇지 못했다. 그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색 가죽벨트를 다시 허리에 찼다. 역시 남자는 아무 데서나 벨트를 푸는 게 아니었나 보았다.


어쨌든 나 그 친구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실망감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게다가 패배자 둘이 뭔가를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나 애매하였다. 나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목구멍에 단숨에 털어 넣었다. 무척 썼다. 카페를 나온 우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길가에 죽 늘어선 벚나무에는 분홍색 벚꽃이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쓸쓸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3.

일주일 뒤, 명석을 통해서 은설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가 자기 친구를 나에게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귀는 여자친구가 없기는 하였지만, 여자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은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틀 후 시내 카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여기는 내 제일 친한 친구 은경이. 그리고 이쪽은 상철이."


은설이 옆에 있는 여자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은설과 이름도 비슷한 은경이라는 여자는 곱게 빗은 검은 머리를 뒤로 묶고 감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 때문이었을까? 나를 보고 살짝 미소 짓는 은경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얼굴은 예쁜 편이었으나 표정이 굳어서인지 다가서기 어려운 어떤 벽 같은 게 느껴졌다.


"얘는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정말 순진하고 착한 애야. 상철이 네가 잘해줘야 한다."


은설이 나에게 당부하였다. 그러고 보니 은설은 내가 대답했던, '얌전하고 조금 예쁜 여자' 딱 거기에 맞는 친구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였고, 은설은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나와 은경 둘만 남겨놓고 자리를 떠났다. 그날 나는 은경과 저녁을 같이 먹었고, 그녀의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졌다.


그 후로 나는 세 번 정도 은경을 만났다. 그러나 은경과의 만남은 길게 가지 못하였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녀였는데, 태어나기도 전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 신앙인이었다. 그런 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 상대로 교회 오빠를 꿈꿨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종교부터가 다른, 그녀의 꿈을 절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상대였다.


은경이 말했다. '정말 괜찮은 남자가 있다'는 은설의 말을 듣고 나오기는 했는데, 사실은 마음을 열지 못하겠다고 했다. 내가 싫은 건 아닌데, 몇 번 만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남을 계속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와 은경과의 만남은 끝났다. 내가 차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도 그녀와의 관계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그녀가 좋은 교회 오빠를 만나길 빌며 깨끗하게 헤어졌다.



4.

내가 은경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은설이 다른 여자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밝고 활달한 성격의 친구가 있다며 만나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며 거절하였다. 그녀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헤어지고 바로 다른 여자를 다시 소개받는다는 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은설은 그 뒤로도 나에게 계속 연락하였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러내기도 하였다. 그녀는 나에게 명석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자기 마음을 잘 몰라준다',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다' 등등 끝이 없었다. 내 귀에는 그녀의 푸념이 오히려 둘의 사랑싸움으로 들렸다.


은설이 왜 굳이 나를 불러내서 명석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명석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더라도,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명석이 의논을 해오면 모를까, 명석은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명석은 사실 은설을 좋아하였다. 그가 워낙 인기가 있는 친구인 데다가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해서 만나는 여자가 은설 말고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딱히 여자친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여자는 은설 하나였다. 그러나 은설 입장에서는 자기와 사귀는데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녀가 몇 번 명석에게 이야기하였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은설이 너무 민감하게 생각한다고 타박하였다. 그러다 보니 은설은 번번이 그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았고, 나는 그녀를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는 이상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티격태격하면서 명석과 은설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가끔 심하게 다투기도 하면서 둘의 관계가 끝나는 것 같다가도 다시 화해하고 만남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이쪽저쪽을 오가며 둘의 관계를 이어주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니었고, 오로지 은설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연락하여 만나자고 하였고, 끝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5.

내가 은설과 둘이 여행을 떠난 건, 그녀를 처음 본 후 일 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사실 여행이 아니었고, 군에 간 명석을 함께 면회하러 간 것이었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받은 명석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명석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던 은설이 남자들만 있는 곳에, 그것도 낯선 외지에 혼자 가는 것이 두렵다며 나에게 동행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부탁도 있었지만, 사실 나도 명석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면회가 가능한 주말에 맞춰 그녀와 나는 기차를 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전방의 어느 산골에 있는 부대로 향했다. '명석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불과 두 달 남짓 지났지만 이제 민간인 때를 벗고 군인태가 날까?'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차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농촌 풍경에 눈길을 맞추었다.



* 이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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