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하루가 걸리고 나서야 겨우 소장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장!
우리가 사는 대장과 바로 이웃하고 있지만, 대장이 워낙 길기도 하고, 대장만큼 비옥한 땅은 없다 보니 소장에 사는 미생물과 왕래할 일은 거의 없다. 간혹 소장 근처에 살던 미생물들이 음식물에 쓸려 내려와 그곳의 소식을 전해주곤 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융털의 숲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소장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 그 말이 허황된 소리가 아니었음을 단박에 깨달았다.
융털의 숲.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형형색색의 융털들이 끝없이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융털들은 소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고, 촘촘히 솟아오른 융털들 아래로는 풍부한 양분들로 가득한 점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들이 뿜어내는 향긋한 내음은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기나긴 여정으로 지친 나는 그 달콤함 향기에 취해 점액 사이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정신줄을 놓고 점액의 양분을 빨아들이다 보니 노곤함이 밀려왔다.
'그래 조금만 쉬었다 가자.'
난 잠시 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듯이 쓰러졌다.
"이봐! 넌 뭐야!"
등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는 나의 단잠을 깨웠다.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미생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미생물치고는 꽤 덩치가 컸다. 그런데 덩치도 덩치지만 날카롭고 공포스럽게 자라난 섬모는 그들을 더 크고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거기다 말뽐새까지 우락부락한 외모를 꼭 닮았으니 어찌 오금이 저리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이 동네에 사는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뭐 하러 남의 동네 와서 얼씬거리는 건데?"
"전 '기쁨'이라고 합니다. 대장에 살고 있는데, 잠시 지나는 길에..."
"잠시 지나는 길이라고? 근데 왜 여기 널브러져서 걸리적거리는 거야? 여긴 우리 '평온함'이 점령한 구역이라고! 함부로 너 따위가 알짱거릴만한 곳이 아니라고!"
평온함.
소장에 평온함이 살고 있다는 건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 깡패 같은 자들이 '평온함'인거지?
난 적지 않이 놀랬지만, 차마 그걸 티 낼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실은 저희 마을 감정의 나무가 갑작스럽게 이상해져서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러 다니는 중에 아주 잠시...."
"팔자 좋은 소리 하는구먼! 우리는 감정의 나무를 '불안'한테 뺏겨서 벌써 몇 달째 구경도 못하고 있다고! '불안'이 좀만한 새끼들! 걸리기만 하면 아주 아작을 내버려야지! 원래 우리가 정면으로 싸우면 절대 질 수가 없어! 그래서 융털의 숲이 빛을 발하던 시절에는 이 좀만한 새끼들은 우리한테 걸릴까 봐 무서워서 도망 다니기 바빴지! 그런데 말이야, 몇 달 전부터 융털의 숲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고! 그때부터 이것들이 우리 뒤통수를 치고 다니기 시작한 거야. 몰래 숨어있다가 치고 빠지는데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걸 잡을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지!
근데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니네 나무가 이상해진 게 '불안'이 새끼들 때문은 아닐걸. 이 새끼들이 비열하기는 해도 감정의 나무는 꽤 애지중지하는 편이거든. 그런 새끼들이 감정의 나무한테 해코지를 했을 리는 없어! 안 그래? 아마 저 위에 사는 '분노' 새끼들이 또 지랄병을 하는 게 틀림없어!
그 새끼들은 가끔 한 번씩 지랄병을 하는데 그럼 위액이 흘러넘쳐서 여기까지 넘어온단 말이야. 그럼 그때는 '불안'새끼들이 깐죽거리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융털이고 뭐고 싹 다 녹여버린다고. 한마디로 싹 다 뒤지는 거지!"
그때, 뒤에 있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미생물이 냅따 소리를 질렀다.
"야! 거기서 언제까지 노닥거리고 있을 거야! 저딴 새끼들 감정의 나무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서 '불안'새끼들을 잡아서 X칠 궁리나 하라고! 그리고 꼬맹이 넌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여기가 무슨 놀이터인 줄 알아! 니네 감정의 나무가 말라죽든가 말든가 우리랑은 상관없으니깐 씹어먹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잔뜩 섬모를 세우고 고함을 질러대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난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융털들 사이를 쉬지 않고 달렸다.
'이 아름다운 융털의 숲에 저런 깡패같이 포악한 녀석들이 살다니. 더군다나 저런 것들이 '평온함'이라고? 도대체 인간들은 어떻게 '평온함'이란 감정을 저런 이기적인 녀석들한테서 얻을 수 있는 거지?'
난 의아했다. 인간의 몸에서 산지 꽤 오래되었지만, 대장 밖의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나 달랐다. 얼마나 지나온 걸까? 어찌나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내 몸은 겨우 채워놓은 점액이 잔뜩 빠져나가 반건조 오징어처럼 쭈글쭈글해진 해괴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잠시 쉬어야 했다. 난 멈춰 서서 바닥에 흐르는 점액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넌 누구니?"
분명 아까와는 다른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한번 놀란 가슴은 당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마시던 점액마저 다 토해내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딜 보는 거야? 여기야! 여기!"
나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따라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보다도 훨씬 작은 미생물이 있었다.
"난 '불안'이야. 넌 누구니?"
"나? 난 '기쁨'이라고 하는데, 내가 '불안'이라고?"
'불안'은 '평온함'과 달리 작고 귀여웠다.
"기쁨이라고? 넌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너희는 저 아래 대장에 살고 있지 않아?"
"그게 우리 감정의 나무가 좀 이상해졌어. 그래서 사정을 알아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난 내 사정을 이야기하면서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방금 전에 만났던 그 덩치들이 분명 감정의 나무를 '불안'에게 빼앗겼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 저 작고 귀여운 미생물들이 그런 흉포한 괴수들을 이길 수 있는 거지?
"근데 지금 감정의 나무는 너희가 점령하고 있다던데... 넌 어떻게 '평온함'한테 이길 수 있었던 거야?"
"점령? 우리가? 그런 일이 가능할 것처럼 보여? 감정의 나무는 우리가 점령한 게 아니라 그들이 못 찾고 있는 거지. 평온함은 항상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그래서 융털들이 빛을 잃는 순간이 오면 그들은 감정의 나무를 찾을 수 없어. 여기 이 빼곡한 융털들에 가려서 감정의 나무가 보이지 않거든.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서로 연결되어 있지.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어두운 융털의 숲 속에서도 감정의 나무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
"그럼 너도 감정의 나무가 어디 있는지 알겠네? 너희 감정의 나무는 어때? 기쁨의 나무는 무언가에 의해 우리와 완전히 차단되었어. 마치 봉인된 것처럼."
"그렇군. 우리도 너희와 마찬가지야. 사실 우리도 지금 그 이유를 찾고 있긴 한데,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건 없어. 감정의 나무가 빛을 잃은 채,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 근데 이상일이 하나 더 있긴 해. 뭐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융털의 숲의 어둠이 이어진 적은 없었거든. 원래 이곳은 항상 밝은 곳이었어. 어둠의 시간은 간혹 찾아오긴 했지만, 길어봐야 반나절 정도가 지나면 다시 밝아지곤 했지.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시작된 어둠이 끝나지 않고 있어. 처음에는 평온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어둠이 이어지는 것은 분명 안 좋은 신호 같아. 이 두 가지 일이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한데..."
"혹시 위장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거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어. 위액이 넘쳐서 넘어오거나 한일은 최근에 없었는데..."
"아니면 위에 살고 있는 '분노'가 새롭게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는 거 아닐까?"
"나야 모르지. 하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그래! 분명해. 틀림없이 그들의 짓일 거야"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 순간 '분노'가 범인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 위장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이 방향으로 쭉 올라가면 돼"
난 '불안'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곧장 발걸음을 떼며, 도움을 준 '불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소장을 지나는 것은 빽빽한 융털의 숲 때문에 대장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빛을 잃은 융털의 숲은 미로와 같았고,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불안'이 알려준 방향을 따라 곧장 달려가니 소장의 경계가 나왔다. 난 소장을 벗어난 뒤 곧장 위장으로 향했다.
위장은 위험한 곳이다. 이곳에는 항상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위액으로 가득하고, 그래서 자칫 발을 헛디뎌 위액 속으로 떨어졌다가는 그대로 한 줌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어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난 아주 바짝 긴장한 상태로 위장에 들어섰지만, 실제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거기에는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위액도, 악마의 모습을 한 '분노'도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위를 가득 메우고 있을 법한 음식도 하나도 없었다. 위장은 바닥을 훤히 드러난 채 그야말로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난 조심스럽게 위장 바닥으로 내려갔다. 아마 이곳에는 며칠째 음식이 내려오지 않은 듯하다. 바싹 말라버린 위장의 바닥은 시베리아의 동토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왜 아이는 음식을 먹지 않고 있는 거지? '분노'들은 다 어디로 간 거고? 이런 곳에 감정의 나무가 있기는 한 걸까?'
차디찬 바닥에서 올려다본 위장의 모습은 거대했지만, 그 크기에 비례하여 공허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막막했다. 이곳에 오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완전한 오판이었다. 이 황량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함은 나를 지탱해 주던 마지막 끈을 놓게 만들었다. 난 바닥에 주저앉아 위의 천장을 응시했다. 인간이 원망스러웠다.
'넌 정말 이대로 죽어버릴 생각인 거야? 내가 얼마나 개고생 해서 이곳으로 넘어왔는데... 지난 15년간 너를 위해 아낌없이 기쁨의 에너지를 바쳤잖아? 넌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러는 거지? 매 순간을 죽기 살기로 살아온 내 삶을 니 멋대로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거야? 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나의 삶을 이렇게 무너트리는 거지? 난 너의 기쁨이라고!'
그렇게 원망하듯 탄식을 쏟아내고 있을 때, 위벽에서 꿈틀거리는 아주 작은 점을 발견했다.
그건 '분노'였다.
분노를 발견한 나는 삶의 실낱같은 희망을 본 것 마냥 부리나케 그에게 달려갔다. 가만 보니 위벽에 바싹 달라붙어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녀석을 막아야 해!'
난 한달음에 분노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당장 멈춰!"
다급한 부름에 '분노'도 놀랐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봐! 뭐 하는 짓이야! 너 때문에 우리가 떼죽음을 당할 지경이라고! 당장 이 아이를 자극하는 일을 멈춰!"
다짜고짜 쏟아내는 내 말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듯 분노는 고개가 갸우뚱하며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아래에 있는 '감정의 나무'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융털의 숲은 빛을 잃었고, 지금 네가 살고 이곳도 죽음의 사막처럼 변해버린 게 안 보여?"
"그러니깐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당신이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거야!"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의 이 일들이 '분노'때문에 생겼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난 어찌 대꾸해야 될지 우물쭈물했다.
"지금 당신이 '분노'를 일으켜서 이렇게 된 거 아닌가요?"
"분노? 어이가 없군. 이봐! 당신 분명 저 밑에 있는 녀석들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인데, 그건 정말 오해라고! 저들은 내가 분노를 일으켜서 위액이 넘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라고.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 아래쪽이 불같이 뜨거워지지. 그럼 위액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고. 그러다가 너무 뜨거워진 위액이 끓어올라 아래로 넘치는 거라고. 똑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은 맨날 내 욕만 하고 있지!
우리는 사실 그 일을 막고 있다고! 우리가 '분노의 나무'를 통해서 그 열기를 다른 곳으로 빼내지 않는다면 위액은 영원히 끓어서 넘치고 있을걸. 정작 고맙다고 인사받아야 할 자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바로 나 때문에 저 아래서 호위호식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난 매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말이야!"
'분노'의 항변에 난 말문이 막혔다.
"그게 사실인가요?"
"못 믿겠으면 여기서 나랑 같이 살면서 같이 한번 뜨거운 위액 맛 좀 보던가! 그럴 거야?"
"아니, 당신을 오해해서 미안해요. 난 단지 '평온함'이 떠드는 말만 믿고..."
"그 건달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근데 아까 당신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감정의 나무가 봉인되었다고?"
"네. 맞아요. 며칠 전부터 갑자기..."
"그럼 '분노의 나무'가 봉인된 것과 같은 시기군. 여기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나도 이유는 몰라. 근데 이상한 일은 그전부터 있었어. 음식이 넘어오지 않아. 이렇게 오랫동안 음식이 넘어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야! 그리고 위벽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해졌지. 원래는 아주 부드러운 곳이었다고. 보라고! 지금 위벽은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 버렸어! 이 냉기가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게 원인일지도 몰라."
"냉기?"
"그래 원래 이곳은 용광로처럼 뜨거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빙하 속처럼 차가워졌지. 열기가 전혀 내려오지 않고 있다고!"
"열기? 그럼 혹시 심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심장? 그래 맞아! 심장이 문제인 게 틀림없어! 난 느꼈었어. 며칠 전 심장에서 아주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고. '쿵!' 하는 소리였어. 그건 정말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어.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한 소리였는데... 그래!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 그때부터 음식은 내려오지 않았고, 조금씩 위벽도 단단해졌던 것 같아."
"그렇군요! 지금 당장 심장으로 가봐야겠어!"
난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다시 서둘러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