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으로 가는 동안 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말라비틀어진 식도의 벽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 나오는 핏방울과 저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역한 냄새뿐. 소장에서부터 몸속에 점액을 제대로 채우지도 못했다. 이제 내 몸속에는 점액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은 몸은 꽈배기처럼 뒤틀리기 시작했고, 뻑뻑해진 섬모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은 그보다 갑절은 힘든 일이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희망은 점점 옅어지고, 마음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고통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고행을 감내하기로 결심한 순례자도 아니고, 난 왜 이 고통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거지? 어쩌면 이건 나의 운명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내가 처음 이 아이에게 넘어오도록 선택된 것도, 우여곡절 속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지금 이 길을 걷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운명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통은 필연이고,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에게는 이 상황을 거부할 권리 따위는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것은 어차피 '운명' 니 맘대로 할 거였잖아? 그렇지? 날 내버려 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잖아? 그러니 무의미한 저항은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할 뿐이야.
생각이 이즈음에 다다르자 거짓말처럼 고통은 연기처럼 산화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식은 희미해졌지만 그 속에서 느리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심장에 도착했다.
심장!
멀리서 육중한 울림이 땅을 뒤흔든다. 강인한 근육의 움직임은 아주 정확한 간격으로 이어진다. 1분에 50번 이상 움직이는 이 근육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는다. 마치 기계처럼. 저들은 감정도 피로도 느끼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힘은 저 기계로부터 나오고 있다. 인간에게 어쩌면 감정이란 저 기계를 숨기기 위한 위장 같은 것 아닐까? 인간에게 사실은 감정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일지도. 저 기계를 돌리는데 감정 따위는 필요 없으니깐.
심장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저 용광로에서는 쉬지 않고 2L가 넘는 피가 뿜어져 나온다. 붉은 피는 용암과 같다. 용암처럼 뜨겁고, 위험하다. 심장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심장은 항상 백혈구로 가득하다. 그러니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근데 왜 '슬픔'은 이렇게 척박하고 모진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어리석은 질문이다. 아마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아니겠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의 나무가 필요했으니, 슬픔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그렇다면 그들의 운명도 나 못지않게 가혹하다. 평생을 이 척박하고 모진 곳에서 살아가야 하다니, 그들이 왜 잠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슬픔'을 찾아보자!'
난 심장에서 일어난 일을 알기 위해 슬픔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슬픔'은 지독한 잠꾸러기니깐. 그들은 심장 주변 곳곳에 숨은 채 잠들어 있다. 그들과의 숨바꼭질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을 빨리 찾아서 질문을 해야 한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먼저 슬픔을 찾는 것은 예상과 달리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난 슬픔들의 기나긴 행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행렬은 슬픔의 나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모든 슬픔들이 잠에서 깨어나 있다니!
난 순간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난 슬픔의 행렬에 다가가 소리쳤다.
"잠시 멈춰요! 왜 다들 일어나서 슬픔의 나무를 향해 가고 있는 거죠?"
그러나, 나의 다급한 외침에 반응하는 '슬픔'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스쳐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완력을 사용했다.
"이봐요. 내 말 안 들려요? 도대체 왜 다들 일어나서 슬픔의 나무에게 가고 있냐고요?"
있는 힘껏 섬모를 뻗어 긴 행렬 중의 한 명을 잡아당기며 따지듯 캐물었다.
"뭐야. 귀찮게 하지 마. 시간이 없다고. 어서 슬픔의 나무를 막아야 해!"
'이게 무슨 소리지? 슬픔의 나무를 막아야 한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슬픔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할 듯하다. 난 일단 행렬의 틈에 섞여 슬픔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슬픔의 나무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빼곡하게 슬픔의 나무 주변을 둘러싼 슬픔들은 슬픔의 나무에 엉겨 붙은 채 난리법석을 부리고 있었지만, 슬픔의 나무는 완전히 봉인이 되어 있는지 요지부동으로 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외침이 들려왔다.
"슬픔의 나무를 막아! 슬픔의 나무를 없애야 해!"
난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왜 그들의 감정의 나무를 스스로 파괴하려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들의 공격이 다른 감정의 나무를 얼어붙게 만든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들을 막아야 했다.
난 '슬픔'의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소리쳤다.
"이봐요! 잠시 멈추고 내 말을 들어봐요! 지금 당신들이 감정의 나무를 공격해서 인간의 몸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고요. 식도부터 위장까지 가는 길은 사막처럼 말라버렸고, 소장에 융털의 숲은 빛을 잃었어요. 제가 살고 있는 대장도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고요!"
하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슬픔'들의 광기는 나의 외마디 외침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요행히도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이봐! 넌 그때 콧구멍에서 만났던 '기쁨' 아니니?"
난 슬픔의 무리 중에 15년 전 이 아이에게 넘어오던 날, 동행했던 '슬픔'을 만날 수 있었다. 난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어? 넌 그때... 제발 날 좀 도와줘. 지금 다른 곳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도대체 너희들은 왜 너희 감정의 나무를 파괴하지 못해 안달이 난 거고? 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슬픔들이 한 번에 잠에서 깨어난 거야?"
"그래. 아마 너희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우리 '슬픔'들의 삶은 다른 감정들과 조금 다르니깐. 우리는 너희와 달라. 너희는 기쁨의 에너지를 감정의 나무에 전달해서 먹이를 얻지? 하지만, 여기를 둘러봐. 여기서 어떤 음식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양분으로 가득한 점액이 한 방울이라도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이 황량한 곳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그래! 맞아. 사실 슬픔의 나무는 우리의 먹이야.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먹이이지. 사실 우리는 슬픔의 파괴자야. 하지만 적당히 먹어야 해. 슬픔의 나무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우리의 양식도 영원히 사라지는 거니깐. 그럼 더 이상 이곳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 없게 되겠지. 그래서 우리는 아주 일부만 가끔씩 깨어나서 슬픔의 나무를 먹지. 우리한테 필요한 만큼만 아주 조금씩. 그리고 슬픔의 나무의 양분을 먹고 힘을 채운 슬픔들은 눈물에 실어서 떠나보내지. 원래 우리가 태어난 고향으로."
"그런데 왜 모두 일어난 거야? 방금 너도 말했잖아. 슬픔의 나무를 다 먹어버리면 안 된다고. 근데 왜 모든 슬픔들이 한 번에 일어나서 슬픔의 나무를 먹어치우려 하는 거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원래 우리의 잠을 깨우는 건 감정의 신이 하는 일이지. 그가 왜 우리 모두를 깨운 건지는 알 수 없어. 분명 그분이 뜻하신 것이 있겠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고귀한..."
"그럼 혹시 '쿵'하는 소리는 못 들었어? '분노'가 말했어. 분명 심장에서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음식물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쿵? 글세.. 아마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깨어난 이후로는 그런 소리는 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상황이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해. 슬픔의 나무가 너무 빨리 자라고 있어. 더군다나 슬픔의 나무가 완전히 봉인이 되어 있어서 슬픔의 나무를 먹어치우는 것도 불가능한데 말이야. 이미 너무 위험할 정도로 슬픔의 나무가 자라났어."
"위험하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슬픔의 나무가 자라는 게 왜 위험한 건데?"
"슬픔의 나무는 작은 나무일 때는 슬픔의 나무이지만, 다 커버리면 '증오의 나무'로 변해. 그럼 그때부턴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먹을 수 없어. 껍질은 철갑처럼 단단해지고, 뿌리는 심장과 단단히 연결되어서 어떤 일에도 꿈쩍하지 않는 불변의 존재가 되어버리거든. 다시 슬픔의 나무로 돌아오지도 않아.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슬픔의 나무를 막아야 해. 슬픔의 나무로 남을 수 있도록... 하지만 봉인이 된 지금도 슬픔의 나무의 성장은 멈추지 않아.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지. 이제 곧 영원히 증오의 나무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되기 전에 무슨 수라도 써야지? 대체 아무런 방법이 없단 말이야?"
"보라고! 지금 우리도 필사적이지만, 슬픔의 나무를 둘러싼 봉인은 너무나 견고해! 저건 필시 신들이 만들어놓은 봉인일 거야!"
"신? 감정의 신?"
"그래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래. 신! 난 그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