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새벽 내내 모은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 우리들은 기쁨의 나무 아래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때, 맨 앞에서 나무에 에너지를 전달하려는 자가 소리쳤다.
"이상한데. 기쁨의 나무가 이상해!"
그는 편모를 뻗어 기쁨의 나무에 에너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기쁨의 나무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고, 에너지도 기쁨의 나무에게로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기쁨의 나무가 우리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이 비단 우리 마을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곧 알게 되었다. 대장 속 모든 기쁨의 나무가 일순간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대장 속 기쁨의 마을 우두머리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 일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왜 모든 기쁨의 나무에 저런 일이 생긴 건지 아시는 분이 있나요?"
모두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도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전에 이런 일을 겪어본 분이 아무도 없나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로만을 응시할 뿐이다.
"기쁨의 나무에 무슨 변화는 없나요?"
"변했어요. 기쁨의 나무는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검게 변해가고 있어요! 이러다가 기쁨의 나무가 모두 멸종해 버리는 건 아니겠죠?"
"인간에게 뭔가 심각한 병이 생긴 거 아닐까요?"
"그렇지만, 특별한 징후는 없는데요. 면역군들도 별다른 활동이 없잖아요."
"병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답답한 대화만 오가는 중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여기 대장 속에서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해봐야 뾰족한 수도 없으니, 대장 밖으로 나가서 이 상황을 어떻게든 파악하고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막상 누가 갈지를 묻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누가 이 상황에서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대장 밖은 너무 위험하다고!
그때 누군가 말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미생물은 오직 한 명뿐이라고 생각해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수많은 항생제의 공습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분이죠. 그 분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뭣이!? 지금 내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난 당황한 표정을 감출새도 없이 주변에서 터져 나온 환호 속에 대장 속 모든 '기쁨'들의 대표가 되어버렸다.
'나보고 어쩌라고?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 줄 알아? 내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아직도 나에게 운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 있다 해도 그런 게 있다 해도 난 이미 다음 생의 운까지 다 땡겨썼다고! 더 이상 나에게 행운 따위는 없어! 이렇게 날 도살장으로 밀어 넣어야 속이 시원한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대장 밖으로 나간다면 가늘게 연명해 오던 내 삶은 불구덩이 속의 날파리처럼 삽시간에 산화해 버릴걸!'
난 이렇게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봐요. 다들 차분히 다시 생각해 보자고요. 밖에 나간다고 한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요?"
"그럼 다른 대안이 있나요?"
난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다시 한번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내가 말을 더듬는 사이, 여기저기서 간절히 외침이 터져 나왔다.
'구원?'
내가 누굴 구원했단 말인가? 난 지금까지 도망만 다닌 것이 전부인데! 하지만, 그들은 나를 영웅시했다. 아니 그들에게는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나를 뒤에서 세게 밀었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난 수많은 미생물들 앞에 구원자처럼 서 있었고, 그들의 교활하고도 간절한 시선은 예외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럼 일단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여러분..."
'젠장! 왜 나만 희생해야 되지?'
길고 긴 대장을 거슬러 오르는 내내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추대를 받아 떠나온 길을 다시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난 대장을 오르는 길에도 여러 개의 기쁨의 나무를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기쁨의 나무는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기쁨의 나무는 점점 영롱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힘없이 쳐진 가지는 곧 바닥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난 문득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아무 걱정 없이 놀고먹던 시절. 그런데 이 몸에 건너온 이후에는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터를 일구고, 다른 기쁨들을 맞이해서 마을을 만들었다. 겨우 자라난 기쁨의 나무는 애지중지 돌본 보람도 없이 툭하면 죽어버렸다. 어찌어찌 키운 기쁨의 나무는 병원균의 등장과 항생제의 공습으로 말라비틀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에너지를 모으고 기쁨의 나무를 다시 키워냈다. 그렇게 피땀으로 일군 나의 마을과 기쁨의 나무는 또다시 나를 배신했다. 아무 이유 없이 저 모양이 돼서는 나를 사지로 밀어 넣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끝도 없이 이어진 대장 벽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서 가자!'
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 그 길만이 내가 살 길이다. 절박한 마음이 샘솟는다.
'신이시여. 부디 나를 구원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