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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Aug 29. 2024

#3. 슬픔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폐로 호흡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불규칙한 거친 숨을 연신 내쉬었다. 나는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콧속의 점막을 간신히 붙들고 버텼다. 최종 목적지인 대장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로지 얼마 되지 않는 점액을 모은 뒤 그 속에 몸을 숨기고 폭풍과도 같은 호흡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다행히 아기의 숨은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큰 고비는 넘겼다.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감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죽다 살아날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서인지 극도의 피로감을 몰려왔고, 그대로 정신을 잃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폭풍 같은 호흡은 잠잠해졌고, 주변은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래. 여기는 콧속이지!'


콧구멍은 인간과 바깥세상을 연결해 주는 가장 큰 관문 중의 하나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바깥세상으로 나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아기의 콧속이지만 벌써부터 다양한 미생물들로 시끌벅적하다. 대부분 공기 중에 떠돌던 뜨내기 미생물들처럼 보였는데, 아직 면역세포들이 입구를 지키지 않는 틈을 타 얼른 몸속에 들어가려 아우성이다. 저렇게 난리를 치며 몸속에 들어가 봐야 곧 생겨날 면역군에 의해 산산조각 날 운명일 테지만. 


"이봐! 너 혹시 인간에 대해서 잘 아니?"


얄팍한 점액 밖으로 고개만 살짝 빼고 부산한 콧속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슬쩍 뒤돌아보니 나랑 생김새는 얼추 비슷한데, 왠지 모르게 자아내는 분위기는 정반대인 누군가가 있었다.


"어, 그리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에 인간 몸에 있다가 와서 대충은.... 그런데 왜?"


"아 그래! 잘 됐네. 난 심장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혹시 길을 좀 아나해서.."

"심장! 그것도 몰라? 그냥 아무 핏줄이나 타고 가. 그냥 큰 길만 따라가면 무조건 심장에 도착할 수밖에 없다고!"

"아 그래. 간단해서 좋네. 고마워."

"근데 넌 누구야?"

"나? 난 '슬픔'이라고 하는데..."


'슬픔'


슬픔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살던 인간의 몸에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종종 들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슬픔은 대게 심장 근처에서 모여 사는데, 잠꾸러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삶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심한 경우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깨지 않는 녀석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게으름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과 연결된 '슬픔의 나무'는 여러 감정의 나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슬픔의 나무가 내뿜는 에너지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다른 감정의 나무의 에너지는 슬픔의 나무가 활성화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슬픔의 감정만이 온몸을 지배하게 된다. 만일 슬픔이 잠들지 않고 계속 활동을 한다면 그건 곧 재앙이다. 인간은 영원히 슬픔에 휩싸일 것이다.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의 지배로 인해 다른 감정의 나무는 에너지를 받을 수 없고, 그 시간이 지속된다면 다른 감정의 나무들은 힘을 잃고 시들해지다 결국 고사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슬픔'은 심각한 잠꾸러기이다. 


"아 반가워! 난 '기쁨'이라고 하는데 혹시 나도 대장까지 가야 하는데 같이 핏줄 타는 곳까지 갈래?"

"어 정말? 그러면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어디서 핏줄을 타야 할지 몰라서 걱정하고 있었거든.."


비록 나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지만, 낯선 땅에서의 동료 감정과의 만남은 큰 위안이 되었다.


"넌 어디서 왔어?"

콧구멍을 지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가 먼저 '슬픔'에게 물어봤다.


"난 깊은 바다에서 태어났어. 햇살도 잘 닿지 않아서 어둡고 추운 곳이었지. 처음에는 그곳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어. 그러다 어느 날 빛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 난 호기심에 빛을 따라 계속 바다 위로 올라갔지. 그러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났지. 그래서 두려웠어.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 하지만 우리는 에너지가 너무 낮아. 난 힘을 다 잃고 잠들어버렸지.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난 바다 위를 날고 있더라고. 아마 어떤 새의 몸에 붙어버린 모양이야. 그러다가 육지로 넘어왔고, 난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 그 뒤로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옮겨 다녔어. 어제까지만 해도 난 어떤 강아지의 털에 붙어 있었다고. 근데 인간의 몸은 처음이야. 기대가 되긴 하지만 두렵기도 해. 넌 어때?"

"나?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꽤 막막하다고. 아무것도 없는 인간의 몸이라니. 정말 최악이야. 그렇지만 어떡하겠어? 이게 운명이라는데."

난 이야기를 마친 뒤, 아무 대꾸 없는 슬픔이 궁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느샌가 잠들어 있는 슬픔이 있었다.  


'역시 듣던 데로 대단한 잠꾸러기군...'


난 슬픔이 다시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려 같이 기도를 통과한 뒤 폐로 내려갔다. 폐는 입과 코로 들어온 미생물들에게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여기서 다들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흩어진다. 난 마지막으로 심장으로 가는 정맥 앞에서 슬픔에게 질문을 했다.


"넌 그러면 아직 '슬픔의 나무'를 본 적이 없겠네?"

"맞아. 난 인간은 처음이니깐. 하지만 바다에서 살 때, '슬픔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난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엄마하고 아빠는 모두 인간의 몸에서 꽤 오래 살았거든. 그래서 사실 난 좀 두려워. 엄마, 아빠가 늘 나한테 말했거든. '슬픔의 나무'를 잘 지켜야 한다고. '슬픔의 나무'를 지키지 못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인간'도 지킬 수 없다고."

"그래? '슬픔의 나무'는 엄청 크고 튼튼해서 죽을 일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하면 '슬픔의 나무'가 죽을 수 있는 거지?"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 그냥 엄마는 반드시 '슬픔의 나무'를 지키라고만 했어. 근데 어떻게 슬픔의 나무를 지키라는건지? 나보고 뭘 어쩌라는거야? 그리고 그게 왜 중요한지도 말 안해주고..."

"그래? 나도 잘 모르겠네. 누가 감히 '슬픔의 나무'를 해칠 수 있다는 말이지?"

"뭐 심장에 가서 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그 이유들도 말이야."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슬픔'은 적혈구를 향해 뛰어내렸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인간의 몸 속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도 벌써 1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말해서 뭣하겠는가. 아무리 곪고 터져도 어떻게든 버티면서 사는 게 인생인거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7살 때였던 거 같다. 무심코 아이가 주워 먹은 코딱지에는 병원균들이 잔뜩 숨어있었고, 그들은 삽시간에 장까지 내려와 이곳을 점령하고 모든 먹을 것들을 수탈했다. 비옥했던 장벽은 금세 피폐해졌고, 이들을 막기 위해 나타난 면역군과 한바탕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며칠간 치열하게 이어졌다. 백중세였던 전쟁은 조금씩 병원균들이 밀리기 시작하며 전세가 기우는 듯했지만, 잠시 면역군이 방심한 사이 코딱지의 짭짤한 맛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또다시 코딱지를 주워 먹었고 병원균 쪽 지원군이 도착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결국 대장 속에는 산더미 같은 면역군들의 시체만 남았다. 이곳은 병원균들의 차지가 되었고, 그들은 예전보다 더욱 기세등등하여 스스로를 대장의 '왕'이라 칭하며, 다른 미생물들을 핍박했다. 그 오만함이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들은 인간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서라도 그들을 가만 내버려 둘리가 없다. 그리고 곧 진짜 저승사자들이 도착했다. 


항생제.


병원균들이 장 속을 완전히 점령한 다음 날, 바로 항생제는 투하되었다. 처음으로 항생제가 투여된 날, 그날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원자폭탄을 처음 마주한 인간들이 이러했을까? 항생제는 투하되자마자 주변의 모든 것들은 삭제시켰다. 병원균도, 미생물들도, 기쁨의 나무들마저도. 비옥했던 장 속은 한순간에 사막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항생제가 쓸고 간 자리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종족 중 아주 소수만이 운 좋게 장 속 아주 깊숙한 주름 속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항생제로 인해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런 일은 몇 년 한번 꼴로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떼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모든 일을 겪고 살아남은 미생물은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 난 자연스레 마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다른 '기쁨'들은 나를 수호신처럼 여기며 따르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단지 우연과 행운의 오묘한 조합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난 우상화되었고, 나 또한 그게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들은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더욱 단단해졌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듯한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섰고, 다시금 번창했다. 이제 우리는 절대 전멸하지 않을 만큼 대장 속 수많은 '기쁨의 마을'을 건설했다. 기쁨의 나무는 대장 속 여기저기 생겨났고, 건강하게 자라났다. 이제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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