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따스한 '점액'의 바다였다. 선홍색 대장의 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점액은 우리들에게 집이고, 식량이고, 놀이터이다. 점액은 우리를 항시 위협하는 면역군과 항생제로부터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절망적인 순간에는 일용한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점액'인데, 천만다행으로 난 아주 질 좋은 점액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아주 건강한 '대장'속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이 깊은 잠에 빠지는 새벽녘이 되면 항상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대장 속을 여행했다. 우리는 장 속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장벽의 깊은 주름 속 남아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한가로이 점액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둥실둥실 떠다니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동안은 면역군의 침입도 없었기에 우리 가족은 여유로운 장 속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면 인간이 깨어난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하룻밤동안 모은 에너지를 전달하러 '기쁨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기쁨의 나무'
기쁨의 나무는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기쁨의 나무'가 있는 곳에 우리가 모여사는 것이지만. 눈치챘겠지만 '기쁨의 나무'는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아니 우리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혹시 까먹을까 봐 알려주는데, 난 '기쁨'이라고. 어떻게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미생물이 '기쁨'일 수 있는가? 그래! 바로 기쁨의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밤새 모은 에너지를 '기쁨의 나무'에게 전달하고, 기쁨의 나무는 그걸 다시 그들의 신에게 전달한다. 그럼 그 에너지는 '기쁨'이 되어 인간들은 행복해지고, 스스로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 건강해진 인간의 대장은 풍부한 음식과 양분으로 가득 찬다. 그래! 인간의 기쁨은 곧 우리의 풍요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과 함께 살아간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런 풍요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사는 대장 속에는 수많은 '기쁨의 나무'가 자라났고, 기쁨의 나무 주변마다 우리 종족은 부락을 이루어 살아갔다. 끝없이 펼쳐진 우리네 부락만큼 내 삶 또한 끝나지 않는 행복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평화롭기만 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일은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지만, 대장이 갑자기 요동을 쳤다. 누군가는 인간이 악몽 때문에 몸을 뒤척인 거 같다 했고, 몇몇은 인간이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 것 같다며, 어서 '기쁨의 나무'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심장의 박동은 여전히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다시 사방은 고요해졌고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일을 넘겼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강하게.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기쁨의 나무' 옆에서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그건 바로 아직 작지만 분명 또 하나의 '기쁨의 나무'였다. 이를 본 마을의 원로는 말했다.
"이건 이곳의 기쁨의 나무가 아니다!"
난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의 기쁨의 나무가 아니라고? 이곳에 있는데 이곳의 기쁨의 나무가 아니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지만 곧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기쁨의 나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과 연결된 기쁨의 나무가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래! 지금 이 안에는 또 다른 인간이 있다. 그래! 그러니깐 아주 간단히 말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은 '임신'을 한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존재.
그것은 단지 대장 속을 흔들어 우리의 식사를 방해하고, 조용한 오침 시간의 정적을 깨는 그런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우리 세계만의 규칙! 그 거역할 수 없는 불문율을 마을의 원로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 우리 중에 누군가는 새 아기가 태어나는 날, 아기의 몸으로 이주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한 분씩 앞으로 나와서 새로 태어날 아기의 감정의 나무와 소통을 해주세요!"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 아이에게로 누군가는 이주해야 한다는 것인가? 왜!? 어떤 권리로 나의 행복한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망가트릴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기쁨'들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고, 나도 그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우리는 모두 그 보잘것 없이 자그마했던 기쁨의 나무 앞에 한 줄로 늘어섰고, 차례차례 새로운 기쁨의 나무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전달했다. 만일 흘려보낸 에너지에 화답하여 기쁨의 나무가 환한 빛을 발한다면, 그자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 이곳을 떠나 아이의 몸으로 넘어가야 한다. 모두 긴장된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차례차례 한명씩 에너지를 흘려보냈지만, 좀처럼 기쁨의 나무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도 선택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이런 어리석은 궁금중을 잠시 가졌었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던 기쁨의 나무가 나에게 화답했다. 나의 섬모가 작은 기쁨의 나무는 닿는 순간, 기쁨의 나무는 아주 환한 빛으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자신의 것이라고...
'이런 젠장!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치 모든 이들이 짜고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 명씩 나에게 다가와 위로와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나는 그저 그 위로를 묵묵히 듣고 있을 뿐,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이곳을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이제 안락한 삶과 영원히 작별이다. 난 새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 대장의 경계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기하다 새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절벽에서 몸을 던져 새 생명으로 건너가야 한다.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아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 장 속은 지옥과도 같았다. 점액으로 가득했던 대장의 벽은 바닥을 드러날 정도로 황폐해졌고, 거친 심장의 박동을 이겨내지 못한 핏줄들은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용암처럼 검붉은 핏덩이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것들을 피해 대장의 가장 깊은 골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평소 같으면 점액을 타고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가 순식간에 대장의 끝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바싹 말라버린 장벽을 따라서 기어가려니 영 더딜 수밖에 없다.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고, 예정된 시간 안에 대장의 가장자리 절벽까지 도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거대한 소음과 함께 거대한 진동이 땅을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장 속의 공간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뱃속까지 들려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기가 나오려 해!'
시간이 없다.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넘어가지 못한다면, 난 돌아갈 곳이 없다.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한번 이주가 결정된 이상 난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 아기가 태어나는 찰나의 순간만이 유일한 기회이다. 그 순간 절벽에서 뛰어내려 아이의 몸에 들러붙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난 영원히 허공을 떠돌다 말라비틀어져 죽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그게 바로 선택받은 자의 운명이다.
다급하다. 아직 대장의 가장자리 절벽까지 가려면 반나절은 더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몇 분 안에 새 생명은 바깥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 순간 난 머리 위를 강하게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일그러진 대장 속 공간은 그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강하게 응축된 공기를 밖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 이 방법 말고는 없어!'
난 결단했고, 다시 한번 폭풍 같은 바람이 몰아치기를 기다렸다. 장의 뒤틀림을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꿈틀대던 장은 무언가에 눌린 듯 잔뜩 찌그러졌고, 순간 다시 한번 강한 폭풍이 몰아쳤다.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폭풍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강렬한 폭풍은 나를 순식간에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성공이다!
난 강력한 바람을 타고 곧바로 아기의 얼굴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아기의 콧잔등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서둘러 인간의 몸속으로 피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이어 사정없이 쏟아질 소독약에 의해 흔적도 없이 부식해 버릴 것이다.
'콧구멍을 찾아야 해!'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콧구멍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렸다. 작은 몸을 연신 접었다 폈다 반복하며 콧구멍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소독약과 계면활성제의 공습을 피해 콧구멍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칫 조금이라도 지체되었다면 난 이미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선택받은 자로서의 첫 번째 소임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