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기쁨'이다.
사람들은 보통 나를 추상적인 개념일 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난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나는 일정의 질량을 가지고 있으며, 만약 매우 비싼 현미경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운 좋게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나를 관찰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해서, 내 겉모습을 보고 내가 '기쁨'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난 구역질 나게 추하거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모든 물리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바람이 불면 공기의 흐름을 따라 날아오르고,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평온한 날에는 땅에 살포시 가라앉아 나뭇잎 아래 조용히 숨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공기나 물속에 있을 때의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이다. 그저 아주 작은 미생물일 뿐.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몸속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인간의 몸속에 있을 때, 비로소 '기쁨'이 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길을 가다 우연히 나를 들이마신다면 그건 신의 축복 같은 일일 것이다. 우리는 '기쁨'이고 우리를 통해 당신은 행복을 느낄 테니깐. 하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을 우연찮게 당신이 눈치챘더라도 너무 요란 떨 필요는 없다. 왜냐면 그런 일은 수도 없이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깐. 실제로 거의 매 순간 우리는 당신의 몸속을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마음먹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면 우리는 당신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들이 그런 일에 너무나 쉽게 익숙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라나며 어느 순간 우리가 주는 은혜를 당연시 여기게 되고, 우리의 존재조차 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사실 우리에게도 인간은 꼭 필요한 존재이니깐.
우리도 인간처럼 먹고, 자라고, 번식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자고, 아기들을 잘 키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땅은 '대장'이다. 1년 365일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고, 온갖 영양분들이 가득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녹록하지만은 않다.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온 다음 가장 빠르게 대장까지 가는 방법은 가까운 혈관으로 이동해 적혈구에 올라타는 것이다. 하지만 초속 150cm로 이동하는 적혈구에 올라타는 일에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간들 입장에서야 초속 150cm가 별거 아니겠지만, 난 땀구멍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존재란 말이다. 초속 150cm로 이동하는 적혈구에 올라타는 것은 우리 입장에선 공중에서 뛰어내려 초음속 제트기에 올라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기쁨'들이 적혈구에 올라타는 것을 시도하지만 그중에 아주 운 좋은 소수만이 그 일에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성공했다고 해서 앞으로 순탄한 길만 열려 있느냐 하면 그 또한 아니다. 가는 도중 면역군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불심검문에 우리가 몸 밖에서 온 존재란 사실이 발각되는 날엔 우린 면역군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 따위는 없다. 그들은 오로지 신의 명령만을 따르며 상대를 파괴하고 섬멸하려는 목적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상대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두려움조차 없다. 자신들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명령에 복종하고, 상대를 향해 돌진한다. 그런 상대한테는 그냥 걸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적혈구에 일단 올라타면 바짝 엎드려 대장에 도착할 때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 험난한 여정을 모두 마쳤다면, 그곳에는 분명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대장!
우리의 지상 낙원. 점액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소화되고 남은 음식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축복의 땅! 우리는 이곳에서 성장하고, 아이들을 낳으며, 대대손손 번성한다. 그리고 우리가 번성할수록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왜냐면 나는 '기쁨'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