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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Sep 12. 2024

#7. 감정의 신

길게 이어진 척수는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아마 평소라면 이곳을 지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물처럼 촘촘하게 이어진 신경세포는 지뢰와 같은 존재이다. 신경세포를 살짝 스치기만해도 면역군은 바로 출동한다. 그다음은 상상도 하지 마라.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면 갈기갈기 찢겨 걸레처럼 땀구멍을 통해 버려지는 것은 자명한 일일테니. 하지만, 감정의 나무와 마찬가지로 척수를 따라 빼곡하게 자리 잡은 신경세포들도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덕분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다. 신에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난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왜 그들은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장난으로?  나 같은 미물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의문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원래대로 바꿔놓는 것이다. 나의 안락했던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단지 그뿐이다. 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신의 영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화려한 빛의 세계였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섬광은 혼을 쏙 빼놓았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빛의 흐름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한동안 어둡고 긴 터널 속을 헤매야만 했던 난 그 광경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 가만히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때,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나를 짓누르듯 들려왔다.


"넌 뭐지? 어떻게 너 같은 하찮은 미생물이 여기에 있는 거지? 아! 이런 젠장! 감정의 신이 척수의 신경까지 마비시킨 거야? 정말 말세로군. 그나저나 너 같은 게 여기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기어올라 온 게야?"

"누구시죠? 당신은 '신'인가요?"

"그래 난 이 인간을 지배하는 인지의 신이지. 너 같은 미물이 감히 마주할 대상이 아니라고!"

"죄송해요. 부탁이에요. 제 말을 잠시만 들어주세요. 지금 저희가 사는 곳은 위험에 빠졌어요. 감정의 나무가 모두 봉인이 되어버렸다고요!"

"감정의 나무? 봉인? 이봐. 미안하지만 넌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어. 그딴 건 감정의 신에게 물어봐야지. 니가 말하는 건 다 그 작자가 꾸민 짓이야. 난 합리적인 신이라고. 누구처럼 제멋대로 굴지 않아! 난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그나저나 그 녀석은 정말 평생 도움이 안 되는군! 사사건건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만 하더니. 결국 그 녀석 때문에 고대의 신까지 나서고 말았잖아. 고대의 신이 이 사태에 간섭하도록 만든 것은 분명 그의 책임이야.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고대의 신은 또 누구고, 그가 뭘 어쨌다는 거죠?"

"고대의 신을 몰라?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전지전능한 고대의 신의 존재조차 모르다니! 그는 우리 신들에게도 절대적 존재이지. 누구도 그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어.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봐. 사실 난 아무 잘못이 없다고..."


인지의 신은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는 비겁한 수다쟁이가 분명하다.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물론 내 실수가 조금은 있었지. 물을 엎질렀으니깐. 그래서 엄마가 아끼는 옷을 더럽혔고, 아빠도 기분이 상했지. 그렇지만, 부모님들은 아무런 꾸중도 하지 않았다고. 그건 아주 작은 실수잖아. 안 그래? 그러니깐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겠지. 하지만 감정의 신은 찰나의 순간 그걸 보고 말았어."


"경멸의 눈빛을..." 


"감정의 신은 부모님의 눈에서 경멸의 감정을 느꼈지. 그리고 그 순간이 기억에 각인된 거야. 아주 깊고 또렷하게. 난 그 기억이 싫었어. 다시는 그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지. 근데 감정의 신은 틈만 나면 그 기억을 꺼내 보는 거야. 난 그때마다 감정의 신을 꾸짖으며 기억을 꺼내지 못하도록 했지. 기억을 꺼낼 때마다 슬픔의 나무가 조금씩 자라났거든. 난 그런 일로 슬픔을 잠에서 깨우고 싶지 않았어. 그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일이잖아. 부모님들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걸. 감정의 신만 제외하고는 말이야.

근데 그 녀석은 어리석게도 그 이후에도 내가 잠든 틈을 이용해 그 기억을 계속 꺼내보고 있었던 거야. 난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말이야. 무의식 중에 기억에 새겨진 상처가 점점 곪아가는 것도, 슬픔의 나무도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도.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거야. 바로 고대의 신이..."


인지의 신은 넋두리하듯 그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고대의 신은 너무 커져버린 슬픔의 나무의 존재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고대의 신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사용했지. 그런 능력은 아무 때나 쓰지는 않아. 오직 이 아이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만 그는 능력을 발휘해. 생존만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거든. 하지만 그가 아이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면 누구도 그를 막을 수는 없어.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성격이거든. 그래서 모든 슬픔의 잠을 깨우고 만 거야. 거기까지는 괜찮았어. 슬픔의 나무는 슬픔에 의해서 제거되겠지만, 괴물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깐. 그리고 슬픔의 나무가 완전히 고사한다 해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결국 감정의 신이 제대로 사고를 치고 말았지."


"슬픔의 나무가 영원히 사라질까 봐 두려웠던 그는 우리 신들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거대한 고리를 끊어버린 뒤, 무의식의 영역으로 도망쳐버렸지. 고대의 신조차 감정의 신의 그런 돌발행동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어. 심장이 뛰는 것조차 멈췄었지. 정말 난 그때 이대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고. 다행히 고대의 신이 능력을 발휘해 겨우 심장과 연결된 고리는 복구를 했지만 다른 것들은 여전히 마비된 상태이지. 이런 대형사고를 치고 지금도 감정의 신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 내가 찾아가서 몇 번이나 불러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아. 완전히 제멋대로라고! 버러지처럼 쓸모없는 감정 따위가 우리를 죽일 뻔했다고!"


"무의식의 영역? 그건 어디죠? 감정의 신을 거기에 가면 만날 수 있나요?"

"왜 니가 직접 만나보려고? 그래! 어쩌면 너의 말이라면 들어줄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니가 일생을 바쳐 그에게 에너지를 전달했으니 어쩌면... 그럼 내가 안내해 줄 테니 잘 따라가 봐. 내가 보내는 빛의 신호를 따라가면 무의식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거기 가서 제발 고집 그만 부리고 어서 신경의 고리를 들고 나오라고 해봐. 신경의 고리만 회복한다면 니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이 정상이 될 거야!"




인지의 신은 친절함은 나를 감정의 신이 있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니 친절을 위장한 술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 인지의 신 덕분에 어럽지 않게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감정의 신을 향해 호소했다.


"신이시여! 당신은 우리 모두를 죽일 건가요? 내 말이 들린다면 이리 나와서 어디 대꾸를 좀 해보세요. 난 당신을 위해 평생 기쁨의 에너지를 전달했어요. 근데 이게 당신의 보답인가요?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건가요?"


난 원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깊은 한숨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 감정의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신이 슬픔의 나무를 구하려고 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다른 감정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인가요? 다름 감정들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어떻게 우리들한테 이렇게 가혹할 수 있는 거죠? 나를 이 몸으로 이끈 것도 사실은 당신이었죠? 난 다 알고 있다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걸레짝처럼 버린다고! 당신은 살인자야!"


그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미안해요.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요."

감정의 신이 응답했다.

"원망하지 말라고요? 어떻게? 왜!"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감정의 신의 목소리를 아주 낮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거대한 공포에 질려있는 듯했다.

"슬픔들로부터 슬픔의 나무를 지켜야 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지금 잠에서 깨어난 슬픔들이 모두 슬픔의 나무를 공격한다면 슬픔의 나무는 견디지 못해요. 슬픔의 나무는 완전히 타서 없어져 버릴 거예요. 영원히..."

"왜 당신에게는 슬픔의 나무만 중요한 거죠? 다른 감정의 나무들은 모두 이대로 말라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슬픔의 나무가 사라지면 다른 감정의 나무들도 살아갈 수 없어요. 슬픔은 특별한 감정이에요. 모든 감정은 슬픔에서 시작돼요. 그래서 슬픔이 사라지면 다른 감정들도 머지않아 죽게 될 거예요."

"그건 무슨 소리예요? 왜 슬픔처럼 쓸데없는 감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슬픔은 사실 타인에 대한 연민이에요. 그래서 슬픔의 감정을 통해서만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슬픔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게 될 거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어요. 당신이 기쁨의 나무에게 전달하는 에너지는 더 이상 기쁨이 아니에요. 우리는 쾌락만을 느끼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인지의 신은 점점 더 타인에게 무관심해질 거예요. 타인에게 무관심해지다 보면 타인의 체온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평온함도 서서히 사라질 거예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불안도 사라지겠죠. 타인과의 관계가 뜸해지는 동안 분노도 사라질 질 거예요. 그렇게 천천히 감정들은 멸종되고 말 거예요. 그래서 나는 슬픔의 나무를 지켜야 했어요."  


"그렇지만 슬픔이 말했어요. 이대로 슬픔의 나무가 봉인된 채 자라면 슬픔의 나무는 증오의 나무가 될 거라고. 그렇게 되면 어차피 슬픔의 나무는 없어지는 건 똑같지 않나요? 당신이 이렇게 여기 웅크리고 있다고 해서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

감정의 신은 깊은 한숨만 내쉴 뿐, 나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난 슬픔의 나무가 사라지는 걸 잠시 멈췄을 뿐. 슬픔의 나무의 멸종을 막지는 못했어요."


"그럼 다시 신경의 고리를 회복시켜 주세요. 당신 말대로 슬픔의 나무가 사라질 수도 있지만, 운이 좋다면 슬픔의 나무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 않나요? 이대로 시간이 지나 모두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은 거 아닌가요?"


"...."

감정의 신은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 정적이 흐른 뒤 그는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 말대로 하죠.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당신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예요. 난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에게도 행운이 있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감정의 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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