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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Sep 19. 2024

#9. 슬픔의 정체

슬픔의 폭발이 남긴 거대한 구덩이 속에서 난 망연자실해 있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슬픔의 나무를 파괴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무리 되뇌어 생각해도 지금의 결과보다 더 나쁜 결말은 없었을 것 같다. 최악이다.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하필 내가 이런 괴로움을 떠안아야 하는 거냐고?'

난 자책, 분노, 슬픔, 절망을 차례로 느끼며 끝없는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난 구덩이의 끝자락을 맴돌며 어서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면역군에 의해 처단되기를 기다렸다. 그것만이 나의 자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심장 주변에는 면역군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슬픔의 폭발로 인해 더 이상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원치 않게도 나의 수명은 꽤 오랫동안 연장되었다. 


'그나저나 슬픔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이지? 폭발로 인해 슬픔들이 모두 한순간에 산화해 버린 걸까? 아니면 모두 이 아이를 떠난 것일까? 슬픔의 나무가 사라져서?'


난 슬픔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그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달간 슬픔뿐만 아니라 근방을 지나치는 어떤 미생물도 면역군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다시 대장으로 돌아갈까도 몇 번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떠나지 못했다.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만날까 봐. 내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나를 경멸할 것이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망쳐버린 자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난 대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쇠약해져 갔다. 어쩌면 이제 난 굳이 면역군이 처단하지 않아도 말라비틀어진 쭉정이가 되어 밖으로 배출될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한 누군가가 있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자가 있었군. 왜 아직 여기에 있는 거지? 너의 다른 친구들은 아주 오래전에 여기를 다 떠났다고.."


면역군이다! 면역군이 나타났다!

난 스스로 목숨을 버릴 각오로 면역군을 기다렸지만 막상 면전에서 그를 마주하자 숨길 수 없는 공포심에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봐. 자네 왜 그러는 거야? 지금 내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허허... 걱정 말라고. 난 이미 퇴역한 몸이야. 이제 더 이상 미생물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난 살포시 고개를 들어 면역군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확실히 노쇠했다. 삐쩍 마른 몸에 힘겹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양새가 명이 얼마 남지 않은 면역군이 틀림없다. 


"정말 해치지 않는 거죠?"

하지만 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면역군이란 말이다!


"난 아주 오랫동안 이 몸에 살았어. 그동안 많은 전투를 경험했지. 수많은 병균들과 싸우며 생긴 상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 하지만 이제는 보다시피 수명을 다해서 사라져야 할 때가 왔어. 그래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심장을 한 번 보고 싶었어. 이곳은 내 고향이니깐. 그래서 온 거야. 더 이상 누굴 해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걱정 말라고. 근데 자네는 왜 떠나지 않고 홀로 여기에 남은 거지?"


그는 나를 '슬픔'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심장에 사는 미생물이 '슬픔'말고 누가 있겠는가? 근데 만일 내가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의 태도가 달라질까? 내가 이 파국을 만든 장본인이란 것을 알면, 나를 무슨 일이 있어도 처단하려 하지 않을까? 난 일단 얼버무리기로 했다.


"전 아직 이곳에 볼일이 좀 남아서..."

"볼일이라고? 별일이구만. 보통 너희들은 감정의 나무가 사라지면 눈물을 타고 떠나는데 말이야. 설마 자네는 다음 나무를 계속 기다리는 건가?"

"다음 나무요?"

"그래.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시 생겨날 감정의 나무말이야."

"다시 슬픔의 나무가 생겨날 수 있나요?"

"슬픔의 나무? 허허.. 너희는 그걸 그렇게 부르나 보지? 그래, 생각해 보니 그걸 슬픔의 나무라고 할 수도 있겠군."

"슬픔의 나무가 다시 살아나는 건가요? 언제 슬픔의 나무가 다시 부활하는 거죠?"

"부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한번 죽은 게 어떻게 되살아나? 그리고 네가 말하는 슬픔의 나무는 사실 슬픔의 나무가 아니야!"

"슬픔의 나무가 아니라고요? 그럼 도대체..."

"그 나무는 타인의 사랑으로 자라는 나무야. 여기에 있던 나무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씨앗이 되어 자라난 사랑의 나무였지. 그런데 때가 되긴 했지. 사랑의 나무를 갈아엎을 때가... 보통 그래. 어느 정도 아이가 자라면 부모의 사랑으로 싹을 틔운 사랑의 나무는 탈이 나기 마련이지. 그래도 고대의 신은 현명했어. 슬픔을 이용해서 그 나무를 태워버렸으니깐. 아마 그냥 뒀으면 엄청난 말썽거리가 되었을 거야. 그래도 당분간 사랑의 나무가 없는 공백기는 혼란스럽기는 하겠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니깐. 그래도 너무 걱정 말라고.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사랑의 나무는 생겨날 거야. 그럼 다시 다른 감정의 나무들도 자라나겠지. 사랑의 나무는 모든 감정의 나무의 시작이니깐."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사실은 슬픔의 나무가 아니라 사랑의 나무였단 건가요?"

"허허. 넌 그것도 모르고 여기서 살았단 말이야? 근데 네가 슬픔의 나무라고 하니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모든 슬픔은 사랑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니깐. 사랑하는 타인이 없다면 슬플 일도 없겠지."

"근데 왜 당신들은 슬픔이 사랑의 나무를 먹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사랑은 좋은 감정 아닌가요?"

"그건 현명한 고대의 신이 관장하는 일이야. 그는 절대 틀리지 않았어. 사실 사랑의 감정은 좋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매우 위험한 감정이기도 하지. 적당한 크기의 사랑의 나무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지.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너무 커져버리면 한 순간 사랑은 증오로 바뀌기도 하거든. 한없이 자라난 사랑의 나무가 증오의 나무로 돌변하는 순간, 난리가 나지. 증오의 나무는 다른 감정의 나무를 허용하지 않거든. 증오의 나무는 감정의 신을 독점하고, 그때부터 이 아이가 오로지 증오만을 느끼도록 만들거야. 아주 지옥 같은 인생이 되겠지? 그런데 진짜 문제는 뭔지 알아? 증오의 나무는 그 생명력이 너무나 질기다는 거야! 인지의 신과 고대의 신이 합심해서 증오의 나무를 없애려고 하겠지만, 심장에 뿌리 깊게 내린 증오의 나무를 완전히 없애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다행히 다른 사랑의 나무를 키워서 증오의 나무의 힘을 좀 누그러트릴 수는 있겠지만, 증오의 나무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로 남아있을 거라고. 그러니깐 슬픔은 그냥 내버려두어야 돼! 그들만이 증오의 나무로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그런데 왜 모두 떠난 거죠? 언젠가 다시 사랑의 나무가 자라나면 다시 그걸 먹으면 되잖아요!"


"그건 아마 향수병 때문이겠지. 잠깐! 근데 왜 네가 그런 걸 묻는 거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아니요. 전 '슬픔'이 아니에요. 전 사실 '기쁨'이라고요!"

"네가 '기쁨'이라고! 완전 정신이 나갔군. 넌 분명한 '슬픔'이야! '기쁨'과 '슬픔'은 서로를 쏙 빼닮아서 구분하기 어렵긴 하지만, 내가 그 정도도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다고!"


다행히 이 퇴역한 면역군은 내가 정체를 실토했음에도 나를 계속 슬픔이라 믿고 있었다.


"근데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래, 향수병! 슬픔은 사실 지독한 향수병이 있지. 어쩌다 인간의 몸까지 흘러들어왔지만,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태어난 바다를 그리워해. 그래서 인간이 바다를 보고 있자면 슬픔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그러니깐 너무 오래 바다를 쳐다보고 있으면 안 돼! 너무 많은 슬픔들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아무튼 이 녀석들은 끊임없이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하지만, 다시 바다까지 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해. 그걸 사랑의 나무에게서 얻는 거야. 슬픔과 인간은 일종의 공생관계 같은 거야. 인간은 슬픔을 통해 감정을 제어하고, 슬픔은 에너지를 다시 얻어 눈물을 타고 바다로 떠나지!"


"근데 왜 고대의 신은 당신들을 통해 미생물들을 학살한 거죠? 증오의 나무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된 거 아닌가요? 고대의 신이 뭔가 착각하고 이상한 명령을 내린 거 아닌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절대 틀리지 않아. 미생물들은 죄 없이 희생되었으니 억울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시작되는 거야. 기쁨의 나무도 분노의 나무도 평온함과 불안함의 나무도 모두 사랑의 나무에서 파생된 거지. 하지만, 인간은 살아가면서 몇 번의 내적 탈피를 하게 되어 있어. 새로운 사랑의 나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감정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야 해. 고통스럽더라도 그 방법밖에 없는 거야!"


말을 이어가는 동안 퇴역한 면역군의 몸은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나도 끝이 보이는군. 곧 내 몸은 부스러져 없어질 거야. 넌 여기 남아 있을 거라고 했지? 그럼 다음 사랑의 나무를 잘 부탁해. 넌 왠지 모르지만 잘 해낼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나도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의식은 흐릿해져 갔고, 사물의 형체들은 점점 모호해졌다. 퇴역한 면역군이 사라지고 난뒤, 난 깊은 잠에 빠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다시 헤어나올 수 없는 영원한 잠일 것이다.


'그래. 이제 떠날 때가 왔구나."


난 오히려 담담해졌다. 내가 살아온 십수년의 인생을 곱씹으며 여러가지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기
쁨으로 주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지만, 늘 행복할 수만은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의 1막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 


'안녕!'

마지막으로 생을 함께한 아이에게 작별인사를 끝으로 난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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