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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Sep 16. 2024

#8. 종말

감정의 신은 그가 한 말을 지켰다. 자신이 끊어놓았던 신경의 고리를 다시 붙였고, 감정의 나무를 둘러싸고 있던 봉인은 사라졌다. 결국 내가 원하던 대로 된 것이다. 내가 대장을 떠나던 날, 우리 모두가 염원했던 일이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과연 기적이 일어났을까?


아니, 정반대였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잠에서 깨어난 모든 슬픔들이 슬픔의 나무를 공격했고, 슬픔의 나무는 한 번에 쏟아진 슬픔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슬픔의 나무는 그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그 선택은 슬픔과 슬픔의 나무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심장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주었다. 심장을 에워싸고 있던 신경들도 그 폭발의 영향으로 큰 손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심장의 박동은 불규칙해졌다. 심장은 엄청난 압력으로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주변의 혈관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심장의 이상을 느낀 고대의 신은 이 상황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대의 신은 심장을 고장 낸 범인이 바로 우리 '감정'들이라고 판단하고, 모든 면역군에게 명령했다.


"몸속의 모든 감정들을 처단하라!"


고대의 신의 명령을 받은 면역군들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흩어져 광기의 살육을 시작했다. 몸속의 모든 미생물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위에 사는 '분노'도, 소장의 '평온함'과 '불안'도, 그리고 대장 속 나의 동료들도... 아드레날린은 그 미치광이들을 더욱 흥분시켰고, 삽시간에 장기들 속마다 미생물들의 시체더미가 만들어졌다. 미생물들의 시체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식도를 타고 올라갔고, 인간도 그 냄새를 맡았는지 하루종일 이를 닦고 입 안을 헹궜지만, 배 속 깊은 곳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냄새가 없어질 리 없었다. 그래도 곧이어 청소부들이 출동해서 미생물들의 시체를 처리했다. 일부는 피에 흘려버리고, 작은 덩어리들은 근처의 땀구명, 콧구멍, 눈구멍.. 어디든 구멍이 뚫려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버려졌다. 하지만 냄새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죽이고 치우고, 죽이고 치우고, 결국 이 세계에 감정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고대의 신과 면역군은 멈추지 않았다.


감정의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감정의 나무는 그래도 꽤 오래 버텼지. 하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에너지를 전달해 줄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천천히 감정의 나무도 말라갔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버린 감정의 나무는 완전히 말라버린 뒤 모래알처럼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한 줌 모래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뒤, 감정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러니한 일이지. 슬픔의 나무가 폭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고대의 신이 모든 면역군에게 감정을 처단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난 더 이상 이 세계에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다시 돌아가기 위해 척수로 내려왔을 때, 척수를 감싸고 있던 신경들은 신경의 고리가 회복되어 모두 살아난 상태였다. 난 죽음을 직감한 채 척수를 기어 내려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온몸의 면역군들이 미생물들을 학살하기 위해 총출동한 덕분에 척수의 신경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고, 덕분에 난 목숨을 부지한 채 다시 심장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파괴된 슬픔의 나무를 마주하게 되었다.

거대하게 자라났던 슬픔의 나무의 폭발은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 주변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그 속에는 검게 타버린 슬픔의 나무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를 에워쌓던 슬픔들의 자취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난 한동안 깊은 자책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내가 만일 감정의 신을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감정의 신을 만나러 가지 않았더라면, 대장 밖을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태초에 이 아이의 몸에 넘어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니었다면 슬픔의 나무가 파괴되는 일도, 모든 감정들이 학살당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괴로웠다. 모든 파멸의 근원이 바로 나 인 듯했다. 그래서 나는 슬픔의 나무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슬픔의 나무가 남긴 거대한 상처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눈을 감고 면역군들이 어서 나를 발견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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