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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Jun 08. 2024

감정의 세계 #5

봉인

내가 이 곳에 도착한지도 벌써 1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말해서 뭣하겠는가. 어떻게든 버티면서 사는게 인생인거지.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7살 때였던거 같다. 무심코 아이가 주워먹은 코딱지는 병원균들이 잔뜩 숨어있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장으로 내려와 이 곳을 점령하고는 모든 먹을 것들을 수탈했다. 비옥했던 장벽은 금새 피폐해졌고, 이들을 막기 위해 나타난 면역군과 한바탕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며칠간 치열하게 이어졌다. 백중세였던 전쟁은 조금씩 병원균들이 밀리기 시작하며 전세가 기우는듯 했지만, 잠시 면역군이 방심한 사이 코딱지의 짭짤한 맛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또 다시 코딱지를 주워먹었고 병원균 쪽 지원군이 도착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결국 병원균들은 면역군을 모두 물리치고 장속을 장악했다. 예전보다 더욱 기세등등하여 스스로를 장 속의 '왕'이라 칭하며, 다른 미생물들을 핍박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오만함이 더욱 큰 재앙을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모른채.


인간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서라도 병원균을 제거하고야 만다. 진정한 저승사자들이 나타났다. 항생제이다.


병원균들이 장 속을 완전히 점령한 다음 날, 바로 항생제는 투하되었다. 처음으로 항생제가 투여된 날, 우리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원자폭탄을 처음 마주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항생제는 투하되자마자 주변의 모든 것들은 삭제시켰다. 병원균도, 미생물들도, 기쁨의 나무들마저도. 비옥했던 속은 한 순간에 사막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항생제가 쓸고 간 자리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종족은 아주 소수만이 장 속 아주 깊숙한 곳의 피신처로 운좋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역경을 딛고 일어나 마을을 일궈냈고, 다시 종족을 번식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의 위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고 더욱 단단해졌다. 우리의 수호신 '기쁨의 나무'와 함께. 우리는 다시금 번창했고, 장 속의 '기쁨의 마을'은 끝도 없이 펼쳐졌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여겼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우리의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 기쁨의 나무 곁으로 모였다. 그런데 맨 앞에서 나무에 에너지를 전달하려는 자가 말했다.


"이상한데. 기쁨의 나무가 반응하지 않아."


뒤에 서 있던 자들도 기쁨의 나무 곁으로 다가가 에너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기쁨의 나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리는 기쁨의 나무를 자세히 관찰했고, 기쁨의 나무의 표면에 어떤 얇은 막이 자라나서 우리와 연결되는것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마을 뿐만 아니라 장 속의 모든 기쁨의 마을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곧 알게 되었다.


마을의 장로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 일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왜 모든 기쁨의 나무에 저런 막이 생겼는지 아시는 분이 있나요?"

장로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도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전에 이런 일을 겪어본 분이 아무도 없나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막은 어떤가요? 더 두꺼워지거나 하진 않나요?"

"막은 조금씩이지만 점점 두꺼워지고 있어요. 이제 기쁨의 나무는 누가봐도 이상할정도로 어두워졌다고요!"

"인간에게 뭔가 심각한 병이 생긴거 아닐까요?"

"그치만, 특별한 징후는 없는데요. 면역군들도 별다른 활동이 없잖아요."

"병이 아니라면 도데체 왜 이러는거죠?"


마을의 장로들이 모두 모였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 채 답답한 토론만이 이어졌다. 

그 때 누군가가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여기 장 속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봐야 뾰족한 수가 있나요? 여기 이렇게 웅크리고 있지말고 장 밖으로 나가서 이 상황을 어떻게든 파악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누군가가 나가서 이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어서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특사'를 뽑아봅시다!"

 

'특사!'

공동체의 운명을 모두 짊어지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떠나야 하는 존재!


"그런데 누가 특사로 가죠?"

아무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당연한거 아닌가? 누가 이런 일을 자원하려 하겠는가?


"제가 가볼게요!"

몇 년전에 옆 마을에서 태어난 꼬마였다. 도대체 뭘 믿고 나선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용기는 가상했다.


"근데 믿음직한 동료가 필요합니다. 우리 일족은 지금까지 3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항생제의 공습이죠.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살아남은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정말 천운을 타고 난 존재일거에요. 전 그 분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지금 내 이야기하고 있는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주변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고, 일순간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나는 철부지 같은 아이 때문에 엉겹결에 막중한 임무를 띤 '특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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