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얼라인먼트
어느새 1년이 또 빠르게 흘렀다. 블록체인 업계에 발생했던 수많은 사건과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인해 찾아온 긴 암흑기를 지나 금리 인하와 비트코인 ETF 승인에 대한 기대감으로 블록체인 시장은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는 것 같다. 올해는 회사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회사에 초점을 맞추어 회고를 작성해 보려고 한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했던 일들은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바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 " 즉 얼라인먼트이다. 블록체인 업계에 발생했던 연쇄적인 사건들로 인해 크립토 윈터가 길어지던 올해 초, 자그마치 1년을 끌었던 시리즈 A 투자 유치를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돌아오니 회사 내부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성공하고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떤 목표와 전략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의하고 공유하여 팀원들의 공감대를 얻어야 했던 것이다.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명확한 비전도 있었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팀원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마구 생기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저기를 보아라. 산초 판사야. 서른 명이 좀 넘는 거인들이 있지 않느냐. 나는 저 놈들과 싸워 모두 없앨 생각이다. 전리품으로 슬슬 재물도 얻을 것 같구나.'
"저, 주인님.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니라 풍차인데요. 팔처럼 보이는 건 날개고요.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면서 풍차의 맷돌을 움직이게 만들지요."
돈키호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감 넘치던 내 모습이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고 섭섭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명확해 보이는 비전이 왜 저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것일까? 혹은, 내가 돌진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 거인이 아니라 풍차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다가 날개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건 아닐까?
설득이 되지 않는 이유는 나의 말에 논리적인 허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 이후 며칠에 걸쳐서 우리의 비즈니스 계획과 전략을 정리하고 논리적인 허점을 보완해서 일종의 바이블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를 팀원들에게 공개하여 질문을 받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더 명확하게 전달하고 논리적인 허점을 보완했다. 이번에는 설득이 될 것만 같았다.
글로 생각을 공유하니 확실히 나의 생각이 명확하게 전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사람들이 어디에서 의문을 가지는지도 선명해졌는데, 1) 우리가 푸는 문제가 충분히 중요한가? 와 2) 우리가 문제를 푸는 방식이 충분히 타당한가? 중에서 후자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문제를 푸는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러한 방법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방법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나? 와 같은 의문이었다.
테슬라의 미션은 세상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테슬라는 전기차를 개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론 머스크는 전기차를 만드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만약 테슬라에 있었다면 전기차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화성로 이주하기 위해 로켓을 만들겠다는 생각에는 공감할 수 있었을까?
20년 전, 테슬라가 전기차를 만들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현대나 도요타, 벤츠, BMW, 폭스바겐 등 거대 자동차 기업들은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기차를 만들어야 할 이유보다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테슬라의 직원으로 있었다면 이런 걱정들을 했을 것 같다. 대기업들이 아직 전기차를 만들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전기차가 대세인 미래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전기차가 대세인 미래가 왔을 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게 되면 여기에 열정과 노력을 바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중요했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실현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고, 그 주인공이 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중요했다. 일론 머스크가 로드스터라는 스포츠카를 출시해서 시장의 반응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긴 호흡으로 만들어야 하는 메인넷(오버 프로토콜)과 별개로 짧은 호흡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을 출시하여 시장의 반응을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단한 리워드형 어플리케이션을 먼저 출시해서 시장의 반응을 일으켜보기로 했다. 이때가 2023년 3월이었다.
우리의 로드스터인 오버월렛은 4월에 사전 등록 페이지를 오픈하고 마케팅을 시작했다. 앱 출시도 처음이고 글로벌 대상 마케팅도 처음 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도 걱정이 되었다. 오버월렛의 실패가 우리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팀원들의 불안을 증폭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줄 경험 있는 시니어 마케터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채용에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해보기로 했고, 제품에 바이럴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여 마케팅을 시작했다. 공식 홈페이지와 미디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만한 자료들을 업로드했고, 공식 디스코드 채널도 만들어서 소소한 이벤트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시리즈 A 투자 유치 기사를 해외에 송출했다. 그리고.. 대박이 났다.
오버월렛은 7월 31일에 사전 등록자 686,663명을 기록하며 유저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함께 출시되었다. 출시 첫날 오버 프로토콜의 공식 트위터 팔로워 수가 1만 명을 넘었고, 해외 유저들은 투자사인 SK, 넷마블, 네이버(Z)를 검색하며 이들이 얼마나 큰 기업인지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는 월드코인 앱의 MAU(월간 활성 사용자 수)로 추정되는 58만 명을 넘는 것이었는데 하루에 100만 명의 유저가 방문하며 출시 첫 달에 목표를 초과 달성해 버렸다. 이후 채널을 늘려나가며 우리가 제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공유했다. 그 결과 현재 트위터 팔로워 수는 35만 명, 유튜브 구독자 수는 18만 명,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는 16만 명을 넘었다.
9월에는 모베러웍스와 협업하여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도 열었었다. 누구나 자신의 컴퓨터에서 노드를 운영하고 수수료 수익을 획득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아직 오버프로토콜 출시 전이기 때문에 오버월렛의 포인트로 결제하는 경험을 제공했고, 포인트를 사용하고 싶도록 하기 위해 매력적인 굿즈를 제작하고 크림과 협업하여 래플도 진행했다. 팝업스토어에는 하루 300명씩 4일 동안 1,200명이 방문했는데, 우리의 유저들을 직접 대면하고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사이 오버 프로토콜도 어느 정도 개발이 완료되어 10월에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하고 12월에 오픈 베타 테스트를 진행했다. 베타 테스트도 큰 관심을 받고 수만 명의 참가자가 참여해서 테스트를 도와주었다. 덕분에 이제는 우리가 문제를 푸는 방식이 타당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니, 걱정할 여유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전 세계에 있는 유저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우리를 도파민 수용체가 고장 날 정도로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관심과 응원이 우리가 쉴 틈 없이 일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이렇게 우리 조직은 얼라인먼트를 달성할 수 있었다.
..라고 결론짓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과연 오버월렛 출시 전에 우리가 얼라인이 안 되어 있던 게 맞았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두가 오버월렛의 성공을 위해 달렸고, 필요하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해도 발 벗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팀원들이 내비치던 불안은 우리 조직의 성공을 위한 것이었지, 나에 대한 불신이 아니었다. 팀원들은 이미 설득될 준비를 하고 나에게 설득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직은 어떻게 얼라인먼트를 달성했던 것일까?
"대표님이 결정을 번복할 때는 있지만 말을 바꾸지는 않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조직의 얼라인먼트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확신, 그리고 일관된 비전 공유가 사람들을 얼라인 시키고 같은 방향을 보고 달릴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한두 번 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사람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말로 설명하고, 글로 설명하고, 일관성 있는 질의응답을 하다 보면 "그래, 한번 믿고 가보자"는 결심이 서는 게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오버월렛의 마케팅 전략 역시 비슷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몰라도 쉽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또한, 배워야 할 수 있는 환경(learn to run)이 아니라 하면서 배울 수 있는 환경(run to learn)을 제공하려고 했다. 이러한 일관된 철학 아래에서 제품과 마케팅을 적절히 연계해서 반복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24년에는 메인넷 출시라는 더 큰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우리가 부딪히고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드러나겠지만, 잘 성장하고 극복해서 내년 회고에서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효용을 주는 글로벌 서비스를 런칭한 소회를 나눌 수 있길 기대한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