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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이야기 3

by 안지안

천천히 해가 지면서 빠르게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저기, 마을의 서쪽 언저리에 아주 적은 양의 여우비가 사뿐사뿐 뿌려지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 호기심이 부쩍 왕성해진 고양이가 요즘 서쪽 동네에 볼일이 많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혹시 저 비에 젖지는 않았을까 하고 부엉이 곤은 생각했다. 걱정은 아니었다. 한창인데 비에 좀 젖은들 어떠하리.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밝은 톤의 고등어 무늬에, 코는 살짝 누렇고 아주 새파란 눈을 한 고양이가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나 달동네 위를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것을 부엉이 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고양이 길라는 약간 심통이 난 듯 보였다.


“비에 맞아 기분이 영 안 좋은가 보군.” 오돌토돌 빛바랜 붉은색 벽돌로 쌓아 올려진 담벼락 위에 앉은 채로 곤이 인사대신 말을 건넸다.


“그래-” 길라가 부르르 떨어 자신의 털에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가을비는 맞으면 추우니까.”


“그래도 덕분에 뜬 무지개는 이쁘지 않나.”


“그래- 그래-” 고양이는 자신의 목덜미와 몸 이곳저곳에 남은 물기를 혀로 연신 닦아내며 대답했다. 그리고선 담벼락 위로 사뿐히 올라가 자리를 잡은 뒤 고개를 돌려 말없이 무지개를 감상하였다. 곤의 말대로 이쁜 무지개였다.


“일찍 일어났군.” 고양이가 말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 너야말로 얼마나 일찍부터 서쪽 마을에 다녀온 거야?”


“아니야, 난 아예 아침을 샜어.” 고양이가 대답했다.


부엉이는 놀란 눈으로 길라를 쳐다봤다.


둘이 처음 알게 된 것은 둘 다 아주 어렸을 때였다. 고양이는 달동네에서 유명한 미친개 한 마리에게 쫓기고 있었고 때마침 그것을 본 부엉이 곤이 후우-후우- 소리쳤다.

“담벼락 위로 올라가!”

미친개는 달동네 동물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누가 외쳤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그 소리를 듣고 고양이는 담벼락을 잽싸게 타고 올랐다. 그 조그만 것이 빠른 판단력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자기 자신을 구한 것이다. 담을 오를 수 없는 검은색과 누런색 털이 뒤죽박죽 섞인 미친개는 그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꼬마 고양이를 올려다보았다. 거품을 물고 동네 시끄럽게 짖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가 다 저물고서야 개는 결국 제 풀에 지쳐 침을 질질 흘리며 어디론가 가버렸고, 고양이는 그제야 숨을 한번 크게 내쉬며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네가 아녔으면 큰일 날뻔했어.”


“벽을 타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던데?”


그것을 인연으로 고양이는 달동네를 자주 찾았다. 그리고 둘은 대체적으로 무용한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치 지금처럼 담벼락 위에 가만히 앉아서 둘이 같이 무지개를 보고 있는 것 같이 말이다. 둘은 쓸데없는 수다도 참 많이 떨었다. 예를 들어 물속의 물고기들도 과연 하품을 할지, 재채기도 하는지, 장미에는 왜 가시가 나는지, 무지개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무지개 색으로 보일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은, 뭐 어디에 딱히 쓸데는 없는 질문들 일지라도, 고양이의 밤을 더 밝혀주었고, 그의 푸른 눈을 반짝이게 하였으며, 그의 세상을 더 크게 하였다.


물론 고양이보다 몇 년 더 일찍 태어났고 또 훨씬 위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부엉이는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일 년만 해도 꽤나 큰 차이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세월이고, 세상을 하늘 위에서 멀리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래도 세상을 직접 알아가는 것이 길고양이의 특권임을 알기에 부엉이 곤은 어설프게 고양이를 가르쳐 들려하지 않았다. 그저 맞장구를 쳐주며, 잠자코 고양이가 스스로 세상을 깨우쳐가는 것을 지켜보며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몇 개의 계절을 같이 지나 보내는 동안 부엉이는 고양이에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동네의 미친개가 근처에서 보일 때마다 어디서든 길라가 들을 수 있도록 후우-후우- 울며 신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후, 고양이 길라에게 부엉이 곤은 이제 정말로 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길라의 말을 믿어줬기에, 진정한 의미로 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가 사라졌던 「그날 밤」의 세상에서 길라는 어쩌면 영원히 혼자가 될 뻔했다. 곤이 그곳에서 함께 했던 건 아니었지만, 길라의 말을 믿어준 것 만으로 길라는 혼자가 아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곤이 길라를 믿어준다면 그는 길라의 세상에 속한 것이나 다름없다. 믿어만 준다면, 같이 있지 않더라도 혼자가 아닌 것이다. 만약 언젠가 「그날 밤」 같은 일이 또 한 번, 아니 몇 번이고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곳에서 잠시 혼자가 되더라도, 세상이 다시 돌아왔을 때 길라는 부엉이 곤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면 둘의 세상은 다시금 「이어지는」 것이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 만으로도 큰 의지가 되는 법이다.」


언젠가 곤이 고양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집고양이가 아닌 길고양이로 살면서 불공평하다고 느껴진 적 없었느냐고.


“솔직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고양이는 대답했다.

“하지만 길고양이가 되길 원한 건 나의 선택이었는 걸. 그리고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건 진작에 깨우쳤어. 불공평하다는 것에 대해 너무 사로잡혀서 화만 내봤자 나만 더 불행해질 뿐이지-”


정말이지 씩씩한 고양이라고 곤은 새삼 감탄했다.


“있는 집 귀한 고양이로 입양이 됐다면 겨울에도 등 따시고 평생 편히 좋은 사료만 먹으며 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걸 누구에게다 대고 한탄을 하겠어? 길고양이로 태어나서 인간의 지붕 아래 살려면 내가 어렸을 때 눈도 땡그랗고 그나마 조금 귀여웠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여운 고양이만 집에 들이려 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것도 오래전 일인걸. 다 큰 고양이 또한 정말로 인기가 없지.”


“그럼 그러지 왜 안 그랬어? 너의 무늬는 충분히 이쁘게 생겼잖아. 게다가 너의 그 파란 눈은 인간들이 참으로 좋아하는데.”


“어리고 이뻤을 때 내가 좀 더 약게 굴었어야 했다는 거야?” 길라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겨울에 너무 추울 땐 나도 ‘아 그때 내가 왜 다른 고양이들처럼 영악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길고양이의 자유로움이 좋아.”

고양이가 문득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 위에 지붕은 덮여 있지 않더라도 대신 내 천장은 이렇게나 높으니까-”


곤이 잘 몰랐던 것은, 그리고 길라가 굳이 해명하지 않았던 것은, 길라는 이번 생이 처음이 아녔다. 곤이 길라보다 몇 년을 먼저 태어났다면, 길라는 곤보다 몇 번을 더 살았다. 모든 고양이들에겐 아홉 개의 목숨이 주어지는 법이다. 고양이 길라는 다섯 번 정도의 삶을 이미 살아봤다. (아마도) 이번이 여섯 번째고, (고양이들에게 전생의 기억들은 전부 흐릿하고 뒤죽박죽이어서 그 부분을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그 전의 삶에선 (아마도) 다섯 번을 전부 집고양이로 살았었다. 편한 삶의 기억은 충분했다. 다만 그때의 편했던 기억이 오히려 지금의 길바닥 생활을 더 어렵게 하는 부분은 확실히 있었다.


곤과 고양이는 물러나고 있는 노을과 깊어가는 밤의 경계선 어딘가를 함께 아무말 없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담벼락 위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편의점 앞의 시계탑에 작은 바늘이 12를 가리켰을 때쯤 고양이 길라가 일어났다.


“오늘도 서쪽으로 가려고?” 곤이 물었다.


“그래-” 길라가 대답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들은 거의 다 마을의 서쪽에 답이 있는 것 같아. 그곳엔 연못이나 인공 호수 따위도 있고, 공원에는 인간들이 심어놓은 장미들도 많아. 마침 방금 무지개도 떴었으니까 그쪽의 새들에게 무지개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고-“


“하지만-.” 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네가 「그날 밤」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줄 알았는데. 장미나 무지개나 그런 것들이 「그것」과 다 무슨 상관인 거야?”


“그러니까, 그게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는 거야.” 길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어져 있어, 그렇지?”


곤이 큰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유를 모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할 거야. 내가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날 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결국엔 「그날 밤」의 비밀의 실마리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모든 건 이어져 있으니까 말이야.”


조금은 억지스러운 논리고, 굉장히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 또한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부엉이는 한 번 더 두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석촌호수>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일단 도착만 한다면 나무나 수풀이 곳곳에 많아서 여차하면 숨거나 할 수 있고, 그곳의 사람들도 고양이들에게 대부분 호의적이었지만, 가는 길이 언제나 문제였다. 그 주변은 사람도, 차도 너무 많이 다녔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너무 평평하고 탁 트여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인공호수에 사는 고양이들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단 벗어나는 것이 일단 위험한 행동이고, 그곳의 사람들은 먹을 것도 많이 던져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양이란 애초에 영역 동물이고, 이렇게 길라처럼 싸돌아 다니는 고양이가 이상한 고양이인 것이지만.


어쨌든 조심조심 열심히 달려 도착해 낸 호수엔 새벽임에도 꽤 많은 인간들이 주변을 걷거나, 뛰거나, 서성이고 있었다. 다행히 그중 누구도 길라에게 관심이 있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고양이는 온통 밝게 밝혀진 호수에서 그나마 조명이 덜 닿는 곳을 찾아 은밀히 울타리를 넘어 호수의 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호수의 시커먼 표면엔 물 기포로 인해 여기저기서 잔물결이 동그랗게 퍼지고 있었는데, 그중엔 물고기들의 입질도 분명히 섞여 있었다. 고양이는 그것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쟤넨 하루종일 저러고 있는 건가.’

물속에 자신의 꼬리를 살짝 담고 기다렸다. 차가운 가을 날씨에 호수의 물도 무척이나 차가워서 길라의 온몸이 순간 찌릿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참는 수밖에. 그리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오동통하고 멍청한 비단잉어 한 마리를 꾀어내 잽싸게 낚아챘다. 살이 아주 제대로 올라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비늘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아무리 멍청해도 자신이 하품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길라는 지면에서 숨 가쁘게 헐떡이는 비만 잉어의 아가미를 앞발로 지그시 밟으며 다짜고짜 물었다. ”너네도 물속에서 하품을 하니? “


”예? “ 통통하고 멍청한 잉어가 잘 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네-, 물고기들도 말이야, 물속에서 하품을 해? 기침 같은 것도 하고? “ 고양이가 참을성 있게 다시 한번 물었다.


”하품이라 굽쇼? “ 잉어가 지방이 잔뜩 낀 아가미 틈 사이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그런 게 도대체 왜 궁금하느냐」는 말투였다.


“「하품」이란 게 뭐입죠?” 잉어가 고양이의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했다.


“하품 말이야, 피곤하거나 졸리거나 할 때 가끔씩 자연스럽게 입이 크게 벌어지면서 머릿속 완전 끝까지 공기를 쑤욱 들이마시는 거. 아니면 옆에 누가 하품을 먼저 하면 저절로 따라 하게 되기도 하고.”


지금 당장 공기가 부족한 비단잉어가 위태롭게 숨을 가쁘게 내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그런 행동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죠.”


“그렇단 말이지…? 그럼 기침이나, 재채기나… 그래, 트림 같은 건?” 길라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아니, 선생님,” 잉어는 이제 슬슬 호흡에 한계가 온 것처럼 보였다. “「하품」인가 뭔가 처럼, 그것들 역시 저는 살면서 아예 처음 들어봅니다요.”


“확실하겠지?” 길라가 앞발 들고 멍청한 잉어의 못난 입을 칠랑말랑 위협하며 물었다.


“제가 이 상황에서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제발 살려만 주십쇼.” 잉어가 툭 튀어나온 눈으로 애처롭게 말했다.


고양이는 머리가 살짝 띵했다. 이런 식의 답변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그것만으로 어쨌든 답변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곤란했다. 애초에 어떤 기상천외한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물속의 물고기들도 의외로 하품을 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혹은 하품 대신에 방귀를 뀐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입과 아가미가 아닌 다른 경로로 하품을 한다, 뭐 그런 신기한 대답을 원했던 걸까.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가다 보면 「그날 밤」의 비밀까지도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 비약적인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품을 안 하고, 기침도 안 하며, 심지어 트림도 안 한다는데,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결론이 났을 뿐이다. 인공호수에서 멍청하고 비만인 잉어 한 마리를 이 이상 족친다 한들 그에게서 그 이상의 어떠한 설명을 듣겠는가. 입맛이 가신 고양이는 숨을 괴롭게 헐떡이고 있는 잉어의 통통한 배를 앞발로 툭툭 차서 다시 호수 안으로 방생해 주었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여기에서 사는 고양이들조차도 웬만해서는 먹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놈들을 먹으려면 며칠은 배탈로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멍청한 놈은 검은 물속 깊이 더 검은 곳으로 쏜살같이 도망쳐 시야에서 벗어났다.


비단잉어를 낚아챌 때 물렸던 꼬리의 끝부분이 살짝 욱신거렸다. 원했던 것처럼 「그날 밤」의 진실에 대한 물꼬가 전혀 트이지 않아 괜히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어차피 여기저기를 다 풀어봐야 하는 것이다. 풀다 보면 풀릴 것이다.


어느새 새벽이 조금씩 푸른 끼를 띄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아침이 올 것이다. <올림픽공원>까지는 꽤나 먼 거리를 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서 난처해지기 전에 잠시라도 눈 붙일 곳을 정해야 했다. 고양이는 공원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수풀은 많지 않았지만, 대신 적당히 비좁고 외진 골목들이 많이 나있었다. 그곳에서 하루 낮을 청하면 되리라 길라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러려면 차들이 쌩쌩 다니는 대로를 몇 개나 지나야 했다. 그것엔 인내가 필요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가끔씩 차들이 멈춰 설 때가 있었다. 길라는 그것을 기다렸다가 흰색 선이 띄엄띄엄 그려진 위로 쏜살같이 대로를 가로질렀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고양이의 냄새가 풍기는 수풀에서 잠드는 것은 더욱 내키지 않았다. 설사 잠시 비어있다 해도 석촌호수의 대부분의 수풀에는 주인이 있다. 혹시라도 자는 도중에 어느 고양이가 찾아와 자신의 집에서 썩 꺼지라며 텃세를 부리는 꼴은 사양이었다.


대충 심장이 2000번 정도 뛰는 시간을 달려 비로소 건너편에 <올림픽공원>의 언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의 고양이들은 석촌호수의 그들과는 또 많이 달랐다. 호수 주변의 고양이들은 재수가 좀 없기는 했지마는 대체로 온순한 편이었다. 반면에 이 먹자골목의 고양이들은 굉장히 경계심이 많고 신경질적이었다. 아마도 환경 탓이 컸다. 석촌호수의 손을 잡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온순해서 고양이들에게는 딱히 위협이랄 것이 없었는데, 이곳 골목의 사람들은 밤만 되면 굉장히 시끄럽고 과격해졌다. 그중에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도 몹쓸 짓을 하는 악마 같은 인간들도 종종 있었다. 때문에 여기의 고양이들은 항상 긴장을 하며 인간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살피며 살아가고 있었다.


주변의 고양이들과 겹치지 않도록 눈치를 보며 근처에서 최대한 비좁고 외진 골목을 하나 찾아냈다. 안으로 들어가자 분주한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차 소리가 갑자기 줄어든 것 같았다. 마침 길라의 체구에 알맞은 크기의 박스도 하나 버려져있었다. 딱 좋은 간이 은신처였다. 햇빛이 안 드는 탓에 서늘한 기운이 골목 안에 팽배했지만 길라는 박스 안에 자리를 잡고 잔뜩 웅크린 채로 잠을 청했다. 잠에 드는 데에는 박동이 채 열 번도 걸리지 않았다.


허기에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주변이 완연한 밤이어서 길라는 깜짝 놀랐다. 잠깐 낮잠을 청한 것이지 아예 밤까지 자려고 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이 차라리 잘 된 것이라고 길라는 생각했다. 어정쩡한 시간에 일어났다면 퇴근 시간의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저 대로에 그려진 띄엄띄엄 있는 하얀 선들을 같이 건넜어야 할 뻔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고양이 길라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박스를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다. 골목 밖으로 나오자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소음이 줄어들었던 것만큼이나 소음이 확 증폭됐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고양이를 눈치채거나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밝은 톤의 털을 가지고 있는 길라는 항상 그것이 신경 쓰였다. 다행히 거리는 이미 한산했고 혼자, 혹은 둘이, 아니면 삼삼오오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비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쌩 하고 은행 냄새가 그득한 바람이 고양이 훑고 지나갔다. 너무 오래 잔 탓에 체온이 많이 떨어져 있던 길라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지체할 것 없이 <올림픽공원>으로 출발했다.


자정쯤이 되었을 때 길라는 공원의 옆길에 피어있는 장미들에게 도착했다. 낮에 이쁜 것은 역시 밤에도 아름다웠다. 아무리 이쁘고 콧대가 높은 장미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자신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하여 더 좋아하겠지. 길라는 많고 많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붉고 풍성하게 피어나 깊은 향을 뿜어내고 있는 장미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는 왜 가시를 내니?”

다소 다짜고짜인 느낌이 확실히 있었다.


“뭐라고?” 붉고 아름다운 장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난 새벽에 멍청하고 살찐 비단잉어가 그에게 되물었던 “뭐라 굽쇼?” 와 굉장히 비슷한 의미의 대답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꽃이 있지만, 장미에겐 「유난히」 가시가 돋잖아. 왜 너는 가시를 내는지가 궁금해.” 가시만큼이나 까칠한 장미의 말투에 기가 좀 눌린 길라가 정중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장미가 아닌 다른 그 어느 꽃도 결코 장미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 네가 방금 말했잖아, 세상의 대부분의 꽃은 가시가 없지만 장미만은 가시가 돋는다고.”


그것은 엄밀히는 사실이 아녔다. 가시를 내는 것은 장미만은 아녔다. 아카시아에도, 선인장에도 가시는 자란다. 하지만 길라는 그저 장미의 말을 잠자코 듣기로 했다. 아마도 장미는 아카시아나 선인장을 본 적이 없을 것이고 평생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장미는 장미이기 때문에 장미에겐 가시가 있어야 하는 거야.” 붉은 장미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양이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겨울 준비에 들어가느라 바쁜 와중에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고양이는 그런 멍청한 취급을 받은 게 살짝 민망했고, 약간은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장미에게 그런 일차원 적인 질문을 한 것이 아녔다. ‘장미니까 당연히 가시가 나는 것이다.’ 라는건 대답으로서 납득할 수 없었다. 고양이 길라는 아마도, 장미의 가시가 ‘자신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의미라거나, 이쁘기만 한 게 전부가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도 되어줄 수 있다’는 그런 그럴싸한 대답을 장미에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길라가 공원 주변을 한 바퀴 돌며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곱씹어볼수록, 장미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 본인에게 뾰족한 귀 두 개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너의 귀는 왜 뾰족한거니?”라는 수준의 질문을 해버리고 만 것일까. 누군가 고양이에게 자신의 귀에 대해 이유를 묻는다면 자신또한 황당하지 않았을까. 장미의 가시는 그저 장미의 일부분인 것을, 그것 외에 다른 의미를 두려는 것은 길라의 환상이고 욕심이었다.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이 그저, 「그런 것이니 그런 것인」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인 것 또한 괜찮다고 고양이 길라는 마음먹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라도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다. 반드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날의 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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