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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이야기 2

by 안지안

틈만 나면 무의식적으로 밤하늘에 달을 쳐다보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날 밤」에 있었던 일 자체가 유정에게는 그다지 유난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은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래 보였다. 어쩌면 아직도 그녀에게는 그날 밤의 일이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날 밤 이후 바로 다음 날에도 여전히 오후 두 시에 화실에 나갔고 자정이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의 편의점엔 그 시간의 아르바이트생이 태연하게 일을 하고 있었고, 약간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엘리베이터도 탔다. 엘리베이터는 잘만 오르락 내리락 했다. 어쩌면 오히려, 그날 그 시간이 「그저 그런 일」이 되는 게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혼자 묻어두고만 있는 것이다.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서 타인에게 부정당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는 자신이 흔들릴까 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유정은 자신의 그림에 더더욱 매진했다. 그전까지 지난 몇 개월을, 그녀는 새하얀 캔버스가 올라간 이젤 앞에 넋 놓고 앉아만 있었다. 그림을 시에 비유하자면, 시상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이유였다. 보통의 화가들은, 특히 페인터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때부턴 자신만의 기법을 정하여 그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 절대로 그녀의 그림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녔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가 특정한 도구나 터치, 혹은 기술을 고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녀의 다재다능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차라리 딱 하나만 월등히 잘했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스타일로도 곧잘 그려내는 유정으로서는 한 가지 기법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착을 한다면, 그것이 왜 자신을 대변하는 스타일인지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전속 갤러리가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녀의 그림 실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만의 미술적 철학을 아직 구체화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화실에서 하루종일 있으면서 제발 캔버스에 획이라도 하나 그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은 그저 윤상의 노래를 틀어 놓고 사색에 잠겨있다가 집에 올 뿐이었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는 거다. 아무리 축축이 그녀의 간을 적셔도 유정의 머릿속은 영감이 쏙 말라버린 건조한 겨울의 방 같았다. 아니, 밤새 방 안의 습기를 모두 빨리느라 모든 면적의 털 끝을 바싹 세운채로 카펫같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주 바싹 마른, 한 방울의 영감도 짜낼 수 없는 겨울 아침의 수건 같았다. 그 무엇이라도, 단 한 병의, 한 잔의, 한 모금의 영감이라도 주어진다면, 유정은 두 눈을 감고 그것으로 가능한 한 천천히, 목구멍의 최대한 많은 면적을 축이며 그녀의 의식의 씨앗을 적시고 어떻게든 흐름에 꽃을 피워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사건이 드디어 터졌던 것이다. 「그날 밤」 이후, 마치 그날의 달처럼, 하나의 영감이 드디어 그녀 의식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 밤」의 어둠처럼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밤」이었다.


밤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원래는 언제나 밤이라는 것이다. 태양이 빛을 비추는 동안을 사람들은 낮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이 퇴장하는 순간 세상은 순식간에 다시 밤으로 뒤덮이게 된다. 그렇기에 세상은, 기본적으로, 어둠이다. 어둠이, 밤이 이 세상의 「기본값」이다. 그러한 어둠을 유정은 그날 밤 직접 목격하였다. 세상은 밤 그 자체였고, 달은 실눈을 뜨고 그 어둠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니 「빛은 어둠 속에 존재한다.」 그것을 유정은 자신의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유정은 걸신에 들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는 듯한 기세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캔버스 위에 사전 스케치나 에스키스도 없이 단번에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다양한 것들을 그렸다. 휘청이는 촛불, 구름에 가려진 달과 별, 거리의 식어가는 가로등, 항상 켜진 채로 있는 거실의 주황색 조명, 밖에서 바라본 아파트 창문, 그런 것들을. 그리고 그 빛들은 마치 어둠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빛나고 있지만 어느 새라도 당장 꺼져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하지만 생동감 있게 캔버스 위에서 번지고 있었다. 작업이 계속될수록, 밤을 칠한다는 것은 어둠을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빛을 표현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유정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빛을 그려야지만 어둠을 그릴 수 있었다. 그녀는 빛으로 어둠을 빚었다. 언제든지 잡아먹힐 듯한 빛으로. 죽음이 곧 삶을 증명하는 것처럼, 빛과 어둠의 두 개념이 서로가 공존하지 않으면 둘 중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의 그림에는 그 어떤 실루엣도 없었다. 경계선이 없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였다. 둘은 이어져 있었다. 결국 둘은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 고작 열일곱 번의 밤이 지났을 때, 유정은 무려 다섯 개의 완성된 작품을 그녀의 차에 실었다. 갤러리에 그림을 가져가기로 한 날이었다. 연말에 있을 갤러리의 그룹전에 전시되기로 한 「아티스트 지유정」의 그림은 총 세 작품이었다. 소속된 모두가 최소한 다섯 개씩 올리기로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유정만 세 개로 정한 것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헤매고 있는 그녀를 위한 대표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날 밤」은 그녀에게 다섯 개의 작품을 내려주었다. 사실 작업은 그 다섯 개 이후로도 동시다발적으로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정은 오랜만에 자신의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는 2005년식 민트색 볼보 S70 R 기종의 왜건을 몰고 다녔다. 서울의 길에서는 정말 둘도 보기 힘든 모델이었는데, 꽤 오래된 연식에 비해 겉과 속이 모두 아주 관리가 잘 된 차였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언뜻 보기엔 정말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박시한 차이기도 했다. 유정이 어렸을 때 화가를 한다고 처음 말 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첫차로 물려줄 요량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산 차였는데, 그것이 그 차가 민트색인 이유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누가 봐도 무난하게 실버나 블랙 같은 무채색 계열이 잘 어울렸을 법한 차였다. 물론 그녀는 왜건이 싫었고 심지어 민트색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을 생각해서 고르고 골랐을 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볼보를 많이 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의도했던 대로, 여러 가지 재료나 장비를 실어야 하는 그녀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 왜건을 아직도 잘 타고 있었다. 그녀의 이미지가 민트색과 어울리는 것은 아녔지만, 오랫동안 그녀 옆에 있었던 이 차는 이제는 유정을 아는 누구나 그녀를 바로 떠올리게 했다.


「그날 밤」 이후 많은 밤들이 지났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날은 이미 많이 짧아져 오후 7시만 되어도 밖은 어두컴컴해졌다. 달은 다시금 완연하게 차올랐고 차오른 그만큼 요즘은 그때처럼 어둡거나 무겁거나 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밀물이 들어온 만큼 썰물이 빠지듯이, 달이 차올랐다면 역시나 딱 그만큼 다시 꺼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날 밤 있었던 일 역시 반드시 또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달의 모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당연히 마지막일리는 없다는 생각이 유정에게 막연히 들었다. 어쩌면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둔감한 유정이라면 몇 번이라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보냈을 법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달은 시치미를 뚝 떼며 간격을 유지한 채 옆에서 그녀의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한남동의 갤러리에 도착한 것은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유정의 민트색 볼보가 앞에 차를 대자 담당인 이수연 매니저가 타이밍 좋게 갤러리의 문을 활짝 열고 나왔다. 열어놓은 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박시현 대표도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수연이 또각또각 유정에게로 다가오며 방긋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유정 역시 최대한 밝은 얼굴로 수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주에 화실로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런데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아 가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 죄송해요. 그날따라 작업이 좀 잘되어서…” 흐름이 끊기질 원치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이고, 그럼요. 작가님 작업하시는데 제가 도움은커녕 방해라도 되면 안 되죠.” 딱히 가시가 있는 말이 아녔다. 수연은 내성적인 유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유정이 트렁크를 열며 말했다.


“에이, 아니에요. 다음에 카라멜 프라푸치노 벤티로 사가지고 놀러 가겠습니다. 어머, 작품을 다섯 개나 가져오셨네요?” 유정을 도와 캔버스를 트렁크에서 꺼내며 매니저가 말했다.


“어서 와 유정씨.” 박시현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얼핏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아서 대표의 굴곡진 몸매가 다 드러났다. “오랜만이네, 얼굴이 좀 상했다.”


“그러게요, 밝은 데서 보니까 살이 좀 빠지셨는데요.” 수연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자기?”


“괜찮습니다.” 유정이 담담히 대답했다.


유정과 대표가 큰 의미 없는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수연이 차를 내왔다. 로즈힙 향이 났다. “대표님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야, 난 괜찮아요. 작품 좀 여기 걸어줘.”


아무리 덤덤한 유정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매번 긴장이 되었다. 자신의 작품을 남에게 보일 때면 언제나 그랬다. 세월이 지난다 해도 과연 그것에 무뎌질 수 있을까. 흰색 면 장갑을 낀 수연이 발포지를 능숙하게 차례로 벗기자 작품의 짙은 속살이 조금씩 드러났다.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도 모르게 살짝 탄식을 했다.


“와-.”


그리고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한 채, 수연은 조심스레 그림을 벽에 걸은 뒤 몇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여자 셋이 앞에 놓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정은 사실 약간 뒤에서 대표와 매니저의 얼굴 표정을 번갈아가며 힐끗 살피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대표가 유정에게 말했다. 시선을 그림에게 떼지 못한 상태로였다.


“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건 마치…” 박시현 대표가 적절한 단어를 찾고 있는 사이 수연이 나머지 네 작품 모두 옆 자리에 차례로 나란히 걸었다. 첫 번째로 밤 하늘의 달, 그리고 방 안의 오렌지색 조명, 밖에서 바라본 아파트의 창문, 작업실에서 타고 있는 촛불, 불을 켜둔 민트색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의 순서였다.


“공기 원근법…?” 미술 이론에 빠삭한 수연이 말했다.


“… 그래. 달이랑 아파트 그림엔 공기 원근법……. 하지만 실내 그림엔 색채 원근법을 썼어. 그리고 스푸마토로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이 그렸네.”


“빛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해요.”


“그건 검정 속에 명암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 때문이야.” 대표가 덧붙였다.


정말로 그랬다. 검정이 다 같은 검정이 아녔다. 그렇다고 회색을 섞은 것도 아녔다. 공기 원근법이니 색채 원근법이니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제는 딱히 기법이랄 수도 없을 만큼 오래된 장치이지만, 유정은 그것의 발란스를 완벽하게 구사해냄으로서 그것이 당당히 기법임을 모든 보는 이들에게 알렸다. 그것은 마치 어느 축구 선수가 패스를 너무 잘해서 그의 패스 자체가 그의 특별한 기술로 인정받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 완성도 높은 기술로 그녀가 그린 밤에는 어두컴컴한 중에도 텅 빈 공간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꽉 차있는 듯한 밀도의 어둠이 느껴졌다. 텅 빈 어둠의 공간 안으로 잔잔하게 발화하는 빛이 파고 들며 깊이있게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너무나 사실적인 묘사에 밤의 냉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추상적이면서도 굉장히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듯한 매력이 있어.” 대표가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 여전히 그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제가 「보고 그린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유정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보면서 그린 게 아니라, 제 상상 속에 있는 이미지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박대표는 유정의 대답을 잠자코 들으며 헤드라이트가 그려진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 것과 사물을 머릿속에 떠올려 그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령 어느 사거리에서 자동차 사고가 크게 났다고 하자. 그것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자의 묘사와, 그 자동차를 몰았던 본인이 며칠이 지난 뒤 병상에서 깨어나 그때 당시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기자의 묘사에 비해서 당사자의 정확성이 오히려 많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의 영향을 받아 왜곡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사자라 해도 말이다. 어쩌면 당사자라서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약간은 과장되고, 어떤 것은 생략이 된 설명 그 자체는 기자의 정확한 진실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더 현실감이 넘칠 것이다. 그것엔 진실여부를 떠나 진실성이 느껴지는 개인의 믿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머릿속의 이미지로 그린 유정의 그림은 실체의 단순한 모방이 아닌 아주 생생한 꿈을 관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단한 그림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그림은 박대표나 수연이나 전에 본 적이 없었다.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임패스토나 부조가 난무하는 현대 미술에 보기 드물게 캔버스에 온전히 스며들어있는 화풍이었다. 그럼에도 그림은 엄청난 거리감과 입체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굳이 비슷한 것을 말해보라면 제임스 휘슬러의 <녹턴> 연작이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것의 추상적인 밤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일 뿐, 화풍과 기법은 전혀 달랐다. 휘슬러의 그림이 단색조로 전체적으로 안개가 자욱한 느낌이라면, 유정의 그림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멀리서 본 유정의 그림은 캔버스의 모든 공간에 마치 그러데이션처럼 빛이 자연스럽게 흐르며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의 붓질 하나하나에 다채로운 색이 보이기 시작하고, 아주 가까이서 보면 붓의 터치 단 하나도 바로 옆의 것과 같은 색이 없어 보였다. 약간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멀리에서 보면 사람이고, 가까이 현미경으로 보면 세포인 것만큼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고흐의 빛처럼 노골적인 방향성 없이 자연스럽게

퍼지며 그야말로 빛나고 있었다. 거의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촛불이 마치 휘청이는 것 같아요.” 수연 매니저가 말했다.


“가로등엔 전기가 흐르는 것 같고” 박대표도 말했다. 둘이 마치 만담 듀오처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유정은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침내 다섯 개의 작품에서 눈을 뗀 시현이 유정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매우 흡족한, 거의 황홀한 듯한 표정이었다.


“자기에게서 직접 좀 듣고 싶은데? 이 그림들에 대해서.”


“음…….” 유정은 로즈힙으로 목을 조금 적시며 잠시 단어들을 정리했다. “밤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에게 밤이란 어두운 시간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르죠. 예를 들어 해가 지고 나서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면 그 시간을 대충 「밤」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아요. 대충 아홉 시나 열 시쯤일까요? 왜인지 여덟 시는 「저녁 여덟 시」라고 보통 말하는데, 아홉 시는 「밤 아홉 시」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결국 밤이란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어둠이 어느 정도 농익은 시간이어야지만 그때부터 밤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현과 수연 모두 잠자코 듣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아직 감이 오지 않았지만, 둘 다 앞에 놓인 그림들의 해석을 창작자에게서 최대한 자세히 듣길 원했기에 유정을 감히 재촉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은 본디 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시현 대표의 검정색 눈이 밝게 반짝였다.


“해가 지자마자 바로 어두워진다는 건, 세상은 애초에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 자체가 어둠이라는 뜻이 아닐까.”


“세상 자체가 어둠이다.” 시현이 유정을 따라 말했다.


“「사전적 의미」로, 어둠은 빛의 부분적 혹은 전체적 부재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이라는 것은 빛의 밝기를 표현하는 것일 뿐, 어둠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수연은 유정의 말이 약간 어려운 듯 살짝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빛이라는 것도 어둠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빛이 없으면 온 세상이, 우주 자체가 어둡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세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에 ’어둠도 포함 되어야 한다‘였습니다. 우리가 밤이라고 부르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에요.”


유정은 잠시 숨을 고르며 박대표와 수연 매니저의 얼굴을 살폈다. 둘 다 아직은 잘 따라오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닌, 사실은 어둠으로 꽉 차있다는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둠이라는 것은 과연 무(無)의 공간이라는 것일까. 그저 無라면 왜 내 두 눈에 보이고 있을까. 어둠이 분명히 어둡게 보이고 있지 않은가. 보이는 것을 無라고 할 수 있을까. 어두운 공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름아닌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인식의 차이라는 거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서 어둠이 보인다. 밝아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다. 밝아서 빛이 보인다. ” 박대표가 잠시 끼어들며 말했다.


비슷했다. 적어도 비슷한 선상에 있는 말이었다. “네, 그런 셈입니다. 어두워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어두운 게 보인다.” 유정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둠은 실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였다. 과연 둘이 유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빛이 실체 하는 것만큼이나, 어둠도 실체 하는 것이다.” 박대표가 말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해가 된 것 같았다. 수연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네, 「어둠이란 실체 하는 것」이라는 게 최소한이고요. 더 나아가서는, 「어둠 자체가 세상」이라는 거예요.”


“오케이, 이해된 것 같아.” 박대표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그러면 굳이 사물을 보면서 그리지 않은 건 왜 그런 거야?”


“아, 그건 밤의 「이어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낮에 빛이 환한 동안에도 세상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둠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 그러니까 모든 밤은 낮에만 잠시 보이지 않을 뿐 사실은 계속 이어져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실내에서는 창문에 커튼만 쳐도 빛이 닿지 않으면 여전히 밤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인식」과 「의식」의 영역이지요. 그래서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는 제 기억 속의 이미지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이 저만의 세상인 것이죠.”


“유정씨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는 스타일이었나?” 박대표가 웃으며 말하자 수연 매니저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유정이 대견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가면 될까요?” 유정이 대표에게 물었다.


“나 사실 유정씨 때문에 그동안 고민이 많았어. 자기 그림 잘 그리는 거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는 뭐든지 너무 잘 그렸잖아. 그래서 오히려 자기 스타일을 확립하기 힘들었었던거고. 그래서 나 요즘 공부도 많이 했거든. 근데 너무 훌륭한 게 나왔어. 수고했어 자기.”


박대표는 잠시 달 그림에 눈길을 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때 몇 년 계약했었지?”


“5년 하셨습니다.” 수연이 답했다.


“그래, 역시 내 안목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자신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박시현 대표의 특징이었다.

“이 감성 잘 유지해요 유정 씨. 일 년 뒤에 개인전 한 번 하자고.”


유정의 설명을 듣고난 후에 앞에 나란히 걸린 작품들을 보니, 정말로 다섯 개 모두가 마치 하나의 밤처럼 이어져 있었다. 오렌지색 스탠드가 켜져 있는 방안의 밤도, 달이 떠있는 하늘의 밤도, 확실히 같은 농도의 같은 밤이었다. 분명히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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