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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안 Aug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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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져 있는 방 2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알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을 때는 아침 일곱 시가 이미 십몇 분 지난 후였다. 이미 알람이 여러 번 울렸던 모양이었나 보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잠들 수가 있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주원은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그냥 잠이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아침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이 잠이 들었던 것도 얼마나 오랜만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결국, 그가 잠이 든 사이에 「고장」났던 시간은 누군가가 고쳐놨고,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밤이 지나서 이제 아침이 되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스마트폰의 시계는 어제와 같은 차질 없이 제대로 숫자를 늘려가고 있었고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 또한 본래의 방향으로 착실히 돌아가고 있었다. 창문을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주원은 이미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존재」들이 돌아와서 내는 소리들을, 그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젯밤 내내 고요한 세상에 갇혀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렇다해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자 가을의 옅은 아침 햇살이 방 안의 어둠을 희석시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세상의 소리가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밀려 들어왔다. 자동차 소리, 아침에 우는 새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웅웅거리는 대화 같은 소리들 말이다.


주원은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민재는 어제 지하철 역 안에서 헤매면서 전화했을 때와 달리 이번엔 신호음이 채 한 번을 다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

너무나 해맑은 민재의 목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주원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제 같이 술을 먹고 헤어졌던 민재는 주원 자신이 겪었던 것을 같이 경험하지 못했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졌던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전활 받을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민재가 주원의 답을 재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물어보면 되는 걸까. 어제 온 세상의 모든 것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었느냐고.

“어제 잘 들어갔어?” 별 일이 없었는지 에둘러 물어본 것이다.

“새삼스럽게 잘 들어갔는지는 무슨…” 민재가 히죽이며 말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잘 들어갔지 그럼.”

“......” 주원은 정말이지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면 되겠는가.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이 몇 번이나 역삼역에서 출발해서 역삼역에 도착했었다고? 너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었다고? 달 밑에서 지나가는 구름이 밤새도록 몇 분 전 위치로 순간이동을 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고?

“...... 왜, 무슨 일 있어?” 민재가 주원의 어색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물어보았다.

“아, 아니야. 나는 어제 안주가 좀 잘못됐었는지 배가 살짝 아프더라고. 넌 괜찮은가 해서.”

“어 나는 괜찮았는데. 속 많이 안 좋으면 병원 가봐.”

“응, 그래야겠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출근 잘해라.” 주원은 애써 태연한 톤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전화를 급하게 끊었다.


주원은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도저히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과연 민재는 그것을 주원의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괜히 불안한 마음에 벽시계를 보니 다행히도 시간은 아홉 시를 너머 일초씩 확실히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은 왠지 안심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그 상황의 이유는 지금 알 수 없더라도, 일단 돌아왔다는 게,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는 것이, 어쨌든 다행이었다. 언제까지고 그 텅 빈 세상에, 영원한 밤의 한 순간에, 홀로 갇혀 있었다고 상상해 보라. 불이 켜져 있는 방들을 보며 저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계속 상기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어쨌든 세상은 이제 그 톱니바퀴가 다 맞물려 잘 돌아가고 있다. 어젯밤에는 시간이라는 부품이 잠깐 고장이 났었던 것이다.


주원은 곧바로 샤워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어제와 같은 샴푸, 같은 린스, 같은 바디워시를 써서 구석구석을 평소보다 더 정성 들여 닦았다. 마치 불미스러웠던 어젯밤의 부스러기가 몸 어딘가에 행여라도 묻어있을까 봐서였다. 모든 것은 물과 함께 벅벅 씻겨 흘러내려버릴 것이다. 그리고 없었던 일로 할 셈이었다. 어제와 같은 갈색 가죽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집 밖으로 나섰다. 바깥은 안개가 자욱했다. 사람들은 분주히 걷고 있었다. 어제의 출근길과, 그제의 출근길과, 그 여느 때의 출근길과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무표정의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무채색의 옷을 입고 각자의 버스로, 지하철로, 횡단보도로, 제갈길을 가고 있었다. 주원도 별다른 표정 없이 선릉의 지하철역 아래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한 손에 든 스마트폰을 보는 채로 질서 정연하게 지하철을 기다리며 두줄로 줄을 서고 있었다. 스크린도어의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굉음이 새어 나옴과 동시에 지하철이 도착함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주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하철을 탈 것이다. 그리고 서울숲역에서 내릴 것이다. 오늘 오전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 조금은 여유롭게 팀원들과 커피를 한 잔 하며 각자의 이번주 업무 진행을 체크한 뒤 조금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가도 될 것이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다 보면, 주원 본인만 괜찮다면 모든 것은 다 괜찮아질 것이다. 이미 세상은 괜찮아 보이니까 말이다. 본인만 어제 있었던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 현실은 다시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갈 것이다. 어제 있었던 사건의 증거들은 다 떠내려 보낼 것이다. 그만 모른척하면 된다.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원은 실상을 모른다. 그러니 그는 진술할 수도 없는 것이다.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발설했다가 모든게 더 꼬여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목격자로서 기능할 수 없다고 스스로 되새겼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본인도 세상도 괜찮아질 것이다.


지하철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췄고 스크린 도어가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탑승하기 시작했다. 줄의 제일 끝에 서서 앞을 따라가던 주원은 지하철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에 타서 뒤를 돌아본 사람들은 허리를 숙이고 괴로워하는 표정의 주원을 보고 놀라 순간 어쩔 줄 몰라했다. 주원은 이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헉헉하며 헛구역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깜짝 놀란 지하철의 사람들이 어떻게 주원을 도와줘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사이 문은 닫혀버렸다. 주원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도와줘서 괜찮아질 만한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크게 휘청이며 역의 벽 쪽에 붙어있는 벤치 의자에 가까스로 앉아 떨군 고개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났다. 주변에서 수근수근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괜찮으냐고 말을 걸지 않아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니, 괜찮을 리 없었다. 그게 그리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세상이 잠시 고장이 났을 뿐이라니. 자고 일어난 사이에 다 고쳐졌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제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앞으로 나아갈 만큼 인생을 관망하고 방관할 수는 없는 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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