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져 있는 방 3
유정은 일단 욕조의 수도꼭지를 잠근 뒤 욕실의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와인잔의 와인을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것은 틀림없는 와인이었다. 그리고 소파로 가서 곧은 자세로 착석한 뒤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 놓아둔 빈 와인잔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격하였다. 비어 있는 잔에 와인이 차는 것을. 유정은 순식간에 채워진 와인잔을 몇 분이고 멍하니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이번엔 테이블 밑에서 의자를 빼고 바로 그 앞에 앉았다. 다시 한번 와인잔을 비웠다. 고요한 방 안 가득히 시계의 초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때가 되자, 당연하다는 듯이, 잔에 와인이 담겼다. 그것은 차오르지 않았다. 그저 일순간 담겼다. 흡사 바깥에 있는 구름이 왼쪽으로 스르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이동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마치 아까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기가 8층에서 12층으로 점프를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욕조에 물이 채워지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 혹은 「이유」에서 일까. 어째서인지, 사물들이, 아니 세상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으로 원상복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던 걸까. 워낙에 평소에도 둔감한 자신을 알고 있기에, 이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이 이미 지난 것이라 해도 유정은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취기가 확 올라왔다. 가득 찬 와인을 몇 잔이나 내리 마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정은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은 분명히 들려왔으나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정은 전화기를 스피커폰 모드로 돌려놓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며 텔레비전을 틀었다. 엄마는 몇 번이고 전화를 받지 않았고, 텔레비전 역시 별다른 점은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왔다 해도 본인의 주량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은 아직 그렇게까지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 좀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해도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을 정도는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목격하고 있는 일들,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또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기어코 일어나고 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빠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누가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유정이 소속한 갤러리의 담당 매니저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유정은 수연의 전화를 한 번에 받은 적이 많지 않았지만, 수연이 유정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적은 여지껏 단 한 번도 없었다.
텔레비전을 끄고 가득 찬 와인잔을 든 채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달은 여전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같은 구간을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어쩐지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바람에 나무가 으스스 떠는소리에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문득 무거운 어둠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네가 너무나 유난히도 조용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사람들이 거실에서 떠드는 소리 하나, 주차장에서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가을의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 뿐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유정은 깨닫게 되었다.
버스에 내렸을 때부터, 일종의 「조짐」들이 있었던 것이다. 유난히 조용했던 동네, 윤상의 노래가 같은 파트에서 계속 씹혔던 것, 이상하게 작동하던 엘리베이터, 어쩌면 편의점에 아무도 없었던 것 마저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려니’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연관 지어야만 할 것이다.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유정은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위에 짙은 쥐색의 카디건을 급히 걸치고 황급히 문 밖으로 나섰다.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찾아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찾아내야겠다. 그래서 그 누군가와 이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열자 아파트 복도에 센서등이 바로 켜졌다. 그리고 1층에 있어야 할 엘레베이터는 이번에도 12층에 멈춰서 있었다. 물론 유정이 그 엘리베이터를 탈리 없었다. 다행히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아까 올라올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사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를 새에 이미 내려와 있었을 정도였다. 아파트 현관 밖에서 위를 올려다보자 유정이 살고 있는 8층 외에도 꽤 많은 집들에, 방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사람의 그림자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저 중에 하나를 골라 무작정 찾아가서 벨을 눌러볼 것인가. 그런 행동은 평소라면 유정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전에 경비실부터 찾아가 보자.
아파트엔 두 개의 경비실이 있었는데, 하나는 주차장의 한가운데, 또 하나는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둘 다 그 안엔 아무도 없었다. <순찰중>이라는 팻말은 보지 못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다시 그녀의 아파트 동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걸어오는 내내 들리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발소리뿐이었다. 유정은 고개를 들어 불이 켜져 있는 방을 소리 내어 외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귀가할 때 너무나 조용했던 바로 101호도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채로였다.
“101호, 302호, 501호, 601호, 702호…” 그만하면 됐다.
유정은 바로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 101호의 문에다 대고 노크를 세 번 했다.
‘콩콩콩’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유정은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쿵쿵쿵’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101호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 302호에 가서 똑같이 문에다 대고 노크를 세 번 했다.
‘쿵쿵쿵’
‘…….’
‘광쾅쾅쾅’
역시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초인종 소리에도, 501호, 601호, 702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501호와 702호 안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나고 있었음에도 아무도 그녀의 호출에 답하지 않았다. 답을 하지 않았다기 보단, 답할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란 바로 방금 전까지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그녀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조차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