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져 있는 방 4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뿐이었다. 아예 식탁 밑에서 의자를 빼서 베란다 앞에 가져다 놓고 그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한 손에는 무한히 리필이 되는 와인 잔을 들고서 두 눈으로는 가늘게 뜬 달과 그 밑에 기괴하게 움직이고 있는 풀어진 모양의 구름 몇 덩이를 보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음악도 틀어보려 하였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꾸만 한 부분에서 끊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발생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구름이 왼쪽의 위치로 리셋되는 순간과 음악이 끊기는 순간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를 알아냈다는 것이 이 상황을, 현실을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런 것일 뿐이다. 사실을 적시해 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고 사실이었다. 그것을 유정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든, 그녀와 상관없이 세상은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을 거스를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단념을 한 채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중, 달 밑의 구름이 어느샌가 왼쪽으로 리셋되지 않고 지나가던 오른쪽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치 댐에서 물이 한꺼번에 방류되듯, 한꺼번에 많은 소음이 갑자기 베란다의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정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건녀편 아파트에 불이 켜져 있는 방들에 쳐져있는 커튼 뒤로 사람 형태를 한 그림자의 실루엣이 몇몇 비쳤다. 주차장의 가운데에 있는 경비실에는 경비원이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아서 CCTV 화면중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밑에 내려가보지 않아도, 올라가서 문을 두드려보지 않아도 유정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다 돌아와 있었다. 미세한 진동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게 유정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본 왼쪽 벽의 시계도 드디어 12시 8분을 훌쩍 지나 11분을 향해 돌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와인잔도 비어있는 상태로 더 이상 채워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그것 역시 유정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다시금 예전에 그녀가 알던 그 방식대로, 그 페이스로 돌아왔다. 1초마다 1초씩 쌓여서 1분이 되면 그다음 분으로 넘어가고, 그 1분들이 모여서 다음 시간으로 넘어가던 그 페이스 말이다. 유정이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제자리걸음을 하던 아까 그 구름은 아예 어디론가 가버려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새 수증기가 되어 사라져 버려 없어졌다 해도 영영 모를 일이었다. 마치 구름이 제자리걸음을 하던 그런 일은 아예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듯이 말이다. 유정은 실눈을 뜨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달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달은 얄밉게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토요일에 가겠노라고 보냈던 문자에 엄마에게서 답이 왔다. “토요일 몇 시에 올지 미리 알려줘, 딸. 너도 잘 자~” 유정은 엄마에게 굳이 다시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유정에게서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리라. 그랬다면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바로 했을 테니까. 심지어 유정은 아까 전화를 열 통도 넘게 했었다.
유정은 의자를 바닥에 끌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다시 식탁 밑에 밀어 두고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 병의 남은 술을 자신의 잔에 다 따라버렸다. 집에 오면서 오늘 밤은 술을 먹지 않겠다 다짐했던 일은 아예 처음부터 가식이었던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을 만큼 몇 시간 내에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무한히 다시 채워지는 잔으로 몇 잔이나 마셨는지 가늠해 볼 염두도 나지 않았다. 솔직히, 이제는 많이 취해버렸다. 그녀는 과연 얼마나 긴 시간을 그 순간에 갇혀있었던 것일까. 정말로 있었던 일은 맞을까? 유정이 그저 악몽이라도 꾼 게 아닐까. 사라져 버린 구름만큼이나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증거를 댈 것이 없었다. 물론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진심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녔다. 다만, 그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꾸 드는 그런 생각을 어쩔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때 수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유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네요 작가님, 저는 분명히 전화가 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부재중 전화 알람이 갑자기 떠있어서요!” 수연이 고요한 밤에 걸맞지 않게 높은 톤으로 말했다.
“아, 괜찮아요 수연 씨. 제가 잘못 눌러서 실수로 전화를 드렸어요.” 실제로 유정은 자주 그랬다.
“왠지 그런 것 같았어요. 원래 전화 잘 안 주시잖아요.” 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밤늦게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작가님.” 수연이 살짝 뜸을 들인 뒤 유정에게 물었다. “요즘 뭐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작품은 잘 되어가는지를 돌려 물어본 것이다.
어려운 점이 참 많은 요즘이었다. 메마른 영감에 하루종일 그저 스툴에 앉아 앞에 놓인 텅 빈 캔버스만 몇 시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에 오기 일수였다. 게다가 방금 유정이 겪었던 그 사건은 앞으로 그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스스로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어줄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슬럼프의 우물 속으로 끌어내릴 것인가. 어쨌든 그 무엇도 수연에게 해 줄 말은 없었다.
“네 네, 다음 전시까지 잘 마무리해놓겠습니다.”
“네 작가님, 건강 잘 챙기시고 제가 조만간 연락드리고 화실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수연이 약간은 겸연쩍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를 끊으며 잔에 남은 술을 싱크대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붉게 상기된 볼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 잔은 분명히 다시 찼다. 몇 번씩이나. 그것은 분명히 와인이었다. 그것을 자신은 마신 것이다. 몇 잔씩이나. 그것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꿈이 아니었다.
태연하게 이를 닦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를 닦고 잠에 드는 것뿐인가. 정녕 그래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잠이 들고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걸까. 유정은 이를 헹구고 천천히 세수를 하며 내내 몽롱히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서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을까. 주섬주섬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맞은편 아파트엔 아까보다 불이 몇 개 더 꺼져 있었다. 그녀 역시 거실을 희미하게 밝히던 두 개의 조명을 껐다. 그냥 단순히 해프닝이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살 수 있을까. 그녀라면 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앞으로 유정을 지금까지 보다 한층 더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