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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an 06. 2024

[미식일기] 예향막국수, 강릉

쫄깃하고 찰랑한 막국수의 진한 육수맛은 완벽한 조화의 시작

이쁜 여자와 나는 사실, 예향막국수라는 처음 보는 막국수 집을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땅거미가 일찍 기어 나온 어느 주말, 우리는 맑은 동치미 국물에 담긴 메밀국수가 생각이 나서 강릉에서 동치미 막국수로 유명한 삼교리 막국수의 남항진 본점을 가려고 버스를 타고 길을 나섰다. 마침, 남항진으로 가는 버스가 시간을 딱 맞춰서 오는 덕택에 바로 버스를 잡아타고 가던 중에 나는 알아차렸다,

"아, 맞다. 삼교리막국수 영업시간이 어떻게 되었더라?"


"너 확인 안 했어? 얼른 봐."


일하는 것이 자유로운 최신 유행에 맞추어 많은 식당들이 옛날처럼 꼭 점심과 저녁 장사를 다 하지는 않기 때문에, 어디를 가던지 식당의 영업시간과 휴식시간을 꼭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의 식당에서는 식당의 사장님들의 영업시간이 다 자유로운 편이 많아서 지방의 식당들을 방문할 때는 영업일과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어.... 삼교리막국수 16시까지 밖에 안 하네? 지금 몇 시더라?"


".... 이미 16시 다 되었는데?"


우리가 버스를 타고서 남항진에 도착하려면 20분이나 더 걸릴 예정이지만 삼교리막국수는 마감시간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기에 나는 직감적으로


'음, 오늘 식도락은 상당히 망했다고 할 수 있군.'이라고 생각하며 바로 삼교리막국수를 대신할 남항진 근처에 있는 식당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식도락의 재밌는 점은, 내가 이전에 썼던 글들에서도 강조하고 말을 했듯이, 내가 세운 계획이 생각보다 쉽게 어그러질 수 있다는 점이고, 그를 통하여서 예상치 못했던 맛있는 음식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엇, 근처에 막국수 집이 하나 있네? 예향막국수...? 처음 들어봐 나는."


"그래? 막국수 집? 만둣국도 해?"


나는 예향막국수의 메뉴판을 둘러보면서 막국수와 사골만둣국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응, 만둣국도 개시하셨데. 여기 1995년에 개업했다고 하네? 그리고 남항진으로 확장 이전 하신 거래. 장사를 오랫동안 잘하셨구나."


"그래, 나는 추우니까 만둣국 먹어야겠다."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에 대한 시간 착오로 인하여 식도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으나 빠르게 다른 막국수집을 찾아낸 덕택에 우리는 안심하는 마음으로 남항진을 들어가는 입구, 병산동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강릉에서 남항진은 공군부대가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기도 하고 커피거리로 유명한 안목항에서 도보로 2~30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 동네. 특이하게도 강릉의 병산동은 해산물 요리가 아닌 감자적(감자전의 영동 사투리)과 감자옹심이 식당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며 이전에 피자대장님과 방문했었던 평양냉면 전문점인 '평진냉면'과 미국가정식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리틀다이너'도 이곳 병산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


차와 사람들로 혼잡한 시내와 내곡동을 지나고 나니 그 이후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많이 보이지는 않아 버스가 신나게 달린다, 도착 예상시간보다는 일찍 병산동에 도착했다. 인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병산동의 남항진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내려, 비가 오는 아스팔트 위를 철벅철벅 걸어서 이제 막 저녁 영업을 시작한 예향막국수로 입장한다.


깔끔하게 빠진 검은색 철제와 유리로 된 가게문에는 'Since 1995'라는 글자가 자랑스럽게 시트지로 붙어있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가자 넓은 창고를 개조한 것과도 같은, 실내체육관과도 같이 넓은 매장에 밝은 색의 원목과 철제로 된 가구들과 주방과 계산대를 제외한 벽은 여닫이로 열고 닫을 수 있는 통유리문으로 사방이 뚫렸다. 이제 막 영업시간을 지난 터라 우리가 저녁의 첫 손님인 듯했다.


"막국수, 메밀전에 사골손만둣국도 주세요."


"네, 만둣국은 곤드레랑 김치 있는데요, 어떻게 드릴까요? 반반도 됩니다."


이쁜 여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나 본인이 좋아하는 만두인,


"김치만두로 주세요."라고 답한다, 나는 예상했던 대답이라 놀랍지 않았다. 나와 함께 만두를 나눠먹을 때에도 고기만두보다는 김치만두를 훨씬 더 맛있게 먹는 사람이니까.


막국수 집들은 대부분 주문을 받자마자 면반죽을 뽑고 삶으니 시간이 강제적으로 약간 소모된다. 그래서 그전에 빠르게 나올 수 있는 메밀전을 주문한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며칠 전부터 맛있는 메밀부치기('부침개'의 영서지역 방언)가 먹고 싶다며 노래를 하던 그녀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메밀전이 나오자 우리는 재빨리 젓가락을 들어서 메밀전 위에 올려진 부추와 잘 익은 김치를 메밀전으로 돌돌 말아서 입으로 가져간다. 이쁜 여자만 메밀전이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최근에 눈이나 비만 오지 않았다면 정선 오일장으로 달려가서 올챙이국수에 메밀전, 수수부꾸미 그리고 평창식 갓김치를 올려서 호로록하고 말아먹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바삭바삭한 메밀전이다


바사삭


"음, 전통적인 메밀전은 아니네?"


"응, 시장에서 파는 메밀전은 이것보다 더 촉촉하고 바삭하지는 않지. 말랑말랑하면서 수분감이 많으니까."


"아마도 이건 부침가루를 메밀가루에 섞어서 부친 건가 봐."


"그렇지, 전통적이지 않으면 어때. 이것 나름대로 바삭하니 맛이 이렇게 좋은걸."


"응응, 여기 김치 맛있다."


아삭한 김치가 약간 신맛과 매콤함, 발효된 고소함을 내뿜으며 사각거리며 씹힌다.


막국수와 만둣국을 같이 시키니 열무줄기가 들어간 물김치에 깍두기, 배추김치까지 밑반찬으로 주셔서 예향막국수의 김치맛을 볼 수 있었는데 춘천에 계신 장모님이 해주셨던 물김치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다만 장모님의 물김치는 메밀풀을 쓰셨던 것이라 더 구수한 향과 맛이 낫다는 것이 차이였지만.


그렇게 메밀전을 나눠서 먹고 있으니 막국수와 만둣국도 곧 이어서 나왔다.


"만둣국이랑 막국수 나왔습니다, 어디에 놔드릴까요?"


홀을 담당하시는 직원분은 나눠먹기 좋아하는 손님들의 취향에 맞춰 넓은 앞접시를 각각 우리 앞에 놔주시면서 묻는다.


"저쪽에 만둣국, 막국수는 여기요."


나는 내가 주문한 막국수를 내 자리에 가리키며 답한다. 각각의 두꺼운 스테인리스의 그릇에 담긴 뽀얀 만둣국과 맑은 육수에 담긴 거무튀튀한 메밀국수가 대조를 이루며 우리의 식탁에 놓인다. 따뜻하고 하얀 만두와 차갑고 까만 막국수, 이렇게 두 가지 메뉴를 여름과 겨울을 위해서 판매를 하는 것이지만 색과 온도로 음양의 조화 이루기를 막국수집에서도 선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추위에 약한 이쁜 여자와 더위에 약한 김고로는 각자에게 맞는 음양이 조화된 식도락을 시작한다.


뽀얀 육수의 색만큼이나 고소한 맛


"만두 한 개 먹어."


"그래, 그래. 한 개만 먹을게."


나는 우선 맛이 궁금한 예향막국수의 손만둣국의 국물을 한 수저 맛본다. 끝까지 고소하고 깔끔한 맛이다, 쇠고기와 뼈로 우려낸 진하고 풍부한 풍미. 일단 메뉴 이름부터가 '사골손만둣국'이기 때문에 예상했던 맛이지만,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니 기분이 좋다. 김치만두도 한 입 먹으니 적당히 매콤하면서 잘 익은 김치의 맛과 식감이 느껴지는 기분이 좋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과 매콤하고 간지러운 김칫소의 어우러짐이 훌륭하다. 그러면 나도 오늘의 본 메뉴를 맛봐야겠지.


메밀면을 젓가락으로 말아서 올려본다. 일반적으로 보던 툭툭 끊어지는 느낌과 옅은 회색의 빛깔을 내뿜는 건조한 면은 아니다, 메밀껍질까지 다 넣은 반죽이지만 면의 겉면이 반투명한 막으로 반짝거린다. 나는 이러한 반죽을 이전에 어느 떡볶이 프랜차이즈의 떡에서도 본 적이 있다.


'감자전분을 반죽에 넣어서 익히면 이런 색깔과 투명함이 나오는데... 설마..?'


나는 메밀면을 입에 넣어서 씹자마자 치아로 느꼈다, 메밀가루만 넣어서 만드는 메밀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 탱글거림과 쫄깃함, 그리고 수분감. 그렇다, 메밀전이 메밀 외에 다른 식재료를 넣어서 더 맛있었던 것처럼 예향막국수의 메밀국수는 메밀 외에도 메밀면의 식감과 수분감을 살리는 가루로 맛을 낸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반죽 겉에 감도는 반투명하고 얇은 막과 일반 메밀면보다 더 쫄깃한 식감과 탱글거리는 찰진 느낌. 나는 오히려 순메밀가루를 쓰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맛있어하는 식감으로 메밀면의 반죽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강릉에 있는 몇몇 메밀국숫집에서 판매하는 순메밀면으로 된 막국수의 경우 손님들의 호불호가 워낙 심하니까, 물론 구수하고 심심한 메밀의 풍미가 오래가는 것은 좋지만 옛 메밀면의 취향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적으니까. 나에게 묻자면 나는 옛 메밀면의 순메밀 풍미도, 쫄깃하고 찰랑거리는 대중적인 메밀의 풍미도 좋아한다, 둘 다 맛있으니까.



"이거 순메밀은 아닌데, 쫄깃하고 더 부드럽다. 옛 풍미를 고집하기보다는 대중적인 입맛에 맞춘 느낌."


그런데 내 입에 묻어나는 맛은 달고 시원한 동치미의 맛이 아니다, 짭짤하면서 달달한 맛이 나는데 깊고 진한 고기육수의 맛이 묻어난다. 거기에 약간의 후추로 코를 자극하는 맛. 음...? 이 느낌은 방금 먹었던 그 육수와 맛이 비슷한데?


"아, 만둣국이랑 이 막국수랑 기본적으로 같은 고기육수를 쓰는 건가? 둘이 쇠고기 맛으로 깊고 진한게 비슷한데?"


"그래?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혹시나 해서 이쁜 여자가 먹고 있는 만둣국의 육수를 한입 먹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고 고소한 고기맛, 이거다.


"이런 것은 물어볼 수는 없는 거니까 추측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육수를 쓰는 건가 봐. 알게 모르게 맛이랑 느낌이 비슷해."



나는 다시 한번 막국수의 육수를 들이키며 소믈리에처럼 깊게 음미해 본다. 가볍고 깔끔한 질감, 거기에 간장과 여러 조미료로 간을 해서 달콤하고 고소한 고기의 풍미를 더 살리는, 누가 먹어도 맛있고 계속 입이 따라가는 훌륭한 맛이다. 이전에 양양의 '단양면옥'에서는 멸치육수로 이와 비슷한 막국수를 하는 것을 먹었었는데, 오래간만에 동치미가 아닌 짭짤한 고기육수로 막국수를 말아먹는다. 주문진에 있는 '대동면옥'에서도 이와 비슷한 육수를 맛있게 먹었었는데, 맛있는 막국수 집들은 어떤 육수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구미에 잘 맞게 만들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


하얗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사람 홀리는 맛을 자랑하는 밑반찬이다


나는 막국수와 함께 곁들여져 나온 달콤하고 아삭한 무채를 면과 함께 올려 씹어먹었다, 예상치 못했던 맛있음에 눈이 동그래진다.


"이 무채, 아삭거리고 달콤한게 아주 요물이야, 진하고 고소한 육수 맛과도 합을 잘 맞추고, 쫄깃한 막국수의 면과도 대조를 이루면서 훌륭한 식감 변화를 주고 있어. 일부러 막국수에도 넣어주고 밑반찬으로 따로 주는 게 그런 이유이려나."



맛있는 음식은 대조와 조화로 좋은 맛을 만들어낸다, 아삭하고 달콤한 무채와 진하고 고소한 육수, 아삭하고 사각거리는 식감과 쫄깃하고 튕기듯이 씹히는 식감의 조화. '예향막국수'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옛것에 대한 '예'를 갖추고 '향'미를 대접하는 식당이 아닐까,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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