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로 Jan 20. 2024

[미식일기] 덕취원, 동해

영동 지역 최장수 중화요릿집의 명성은 시원하고 탄탄한 맛

처음부터 동해를 생각해서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작은 거창하게 계획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그런 것들을 망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더 맛있는 여행으로 버무려낸다. 비록 나와 같은 식도락가뿐만 아니라, 다른 식도락가들도 그런 경험이 많지 않을까 싶다. 부산의 '보이후드'라는 지금은 사라진 식당의 미식 경험을 작성할 때부터 언급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의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명언인


"나는 전투를 준비하면서 계획은 무용하나, 계획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임을 항상 발견해 왔다."라는 말을 나의 식도락 여행의 기조로 삼고 있다.


작년 가을에 맛있게 먹었던 아구수육을 먹으려고 이쁜 그녀와 함께 포항 1박 2일 여행을 계획했으나 이쁜 그녀의 신상에 중대한 문제가 생겨 (하지만 결국 별거 아닌 걸로 끝난) 가까운 곳으로의 당일치기 여행으로 급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번에는 가까운 곳으로 하루 정도만 다녀오자. 포항에 못 가는 것은 아쉽지만."


"그럴까, 그러면 저번에 추천받은 소나무식당이랑 가고 싶었던 중화요릿집을 가야겠다."


"그래? 거기 이름이 뭐였지?"


"덕취원, 영동지방에서 제일 오래된 중국집이야."


영동지방에서 중화요릿집을 얘기해 보자면 항상 빠지지 않고 손가락에 꼽히는, 영업을 시작한 지 거의 90년이 넘어가는 전통적인 중화요릿집 덕취원. 다른 지방에 비해 오래된 중화요릿집이 많이 존재하지 않는 강원도에서 90년 이상 된 중화요릿집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현재까지도 한결같이 손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큰 사실이다.


강릉에서 동해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도 편하게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이쁜 그녀는 강릉역에서 누리로나 산타열차를 타고서 간다. 월요일 오전의 밝고 나른한 하루가 시작되어서 기차의 좌석은 여유가 많았지만 평일 오후의 휴식을 이용하는 가족단위와 단체승객들이 우리가 타고 있었던 산타열차를 많은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타는 가족들이나 같은 교회에서 나온 분들이 단체 여행을 위해 산타열차에 올라 서로 담소를 나누는 것을 듣는 사이 동해는 금방 도착한다.


동해역에 내려 시내버스를 잠시 기다려 덕취원이 있는 북평민속시장 쪽으로 향한다.


"평일 오후인데 생각보다 버스에 사람이 많네?"


"이 버스가 삼척까지 가는 버스라서 그런가?"


평일 오후, 동해에서 삼척까지 가는 시내버스에는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덕취원이 있는 북평대로의 북평농협에서 내려서 덕취원 방향으로 걸었다. 평대로에는 어쩐지, 북평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도로의 시작부터 끝, 그리고 민속시장 안쪽 부분까지 사람과 상인들, 점포들로 가득 메워져 진한 튀김, 뜨겁게 쪄진 밀가루 냄새, 수산물의 냄새들로 내가 사랑하는 '음식과 사람'의 냄새가 코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마침, 잘 왔네. 일부러 장날을 맞춰서 온 것은 아닌데 말이야."


"그러게, 밥 먹고서 시장 구경하자."


덕취원의 영업 시작 시간이 조금 넘어서 덕취원이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멀리서도 명확하게 보이는 붉은 바탕 위 하얀색의 한자로 되어있는 선명한 글자 '덕취원'. 건물 하나가 통째로 덕취원의 소유인 것인지 건물을 점령하듯 자리를 잡은 식당의 포스에서부터 인상이 깊다.


"몇 분이세요?"


"두 명입니다, 선생님."


"저 쪽으로 가서 앉으세요~"


우리는 1층으로 가서 안내를 받았는데, 누가 보아도 널찍한 6인용 식탁에 우리는 안내해 주셨다.


"인원수에 상관없이 식탁에 앉히시나 봐."


"나도 잠깐 이 넓은 자리에 우리 두 명이 앉아도 되나 싶었어."


"뭘로 시킬 거야?"


"삼선짬뽕, 볶음밥"


"그걸로 괜찮겠어?"


"음.... 탕수육이 끌리기는 하는데, 조금 더 고민해 보고."


우리는 우선 해물삼선짬뽕과 볶음밥을 주문하고서 손님들이 오는 것을 구경하며 음식을 기다렸다. 우리가 앉고 나서도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 손님들이 밀려드는데 자리가 남는 곳은 2층뿐이라 대부분 2층으로 올라가고 나서는 대기번호가 순식간에 8번까지 늘어난다. 때마침 근처 학교들의 졸업식도 있었는지 학생으로 보이는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온 부모님들이나, 근처에서 일을 잠시 마치고 점심을 드시러 온 노동자분들도 다 공평하게 대기표를 받고서 덕취원 건물 안팎으로 기다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그나마 일찍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덕취원에 또 언제 오겠어. 좋아, 선생님 여기 탕수육 작은 거요!"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덕취원의 1층을 둘러보니 기다란 형광등과 세월을 맞아 약간의 누런색이 입혀진 천장과 벽지, 군데군데 중화풍의 장식들과 여러 방송매체에 나왔던 사진들과 기록들, 우리가 앉은 창가에서 맞은편으로는 '조리실'이라고 크게 붉은 글씨로 붙여진 반투명 유리창 안에서 요리사로 보이시는 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음식을 만드는 모습의 실루엣이 보였고 유리 칸막이 아랫부분에 작게 뚫어진 반원의 공간으로 음식들이 나오고 있었다. 하나, 하나씩 음식들이 나오는 것을 보며 곧 있으면 나도 맛있는 음식을 먹겠구나, 기대가 되었다.


"탕수육 나왔습니다"



노릇노릇하고 옅은 황토색의 빛을 내는 손가락 크기만 한 탕수육이 간장과 설탕을 주재료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의 소스에 묻혀서 나왔다. 역시나, 탕수육이 맛있고 자신 있는 집에서는 부먹과 찍먹의 논쟁이 없다. 튀김에 자신 있는 집은 소스까지 다 퍼먹게 되는 법이니까. 마침 배고프던 와중에 요리류에 속하는 탕수육이 먼저 나오니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이쁜 그녀와 나는 신속히 젓가락을 들고서 탕수육 사냥을 시작한다.


바사사삭


겉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바삭한 질감으로 일반적으로 먹는 탕수육보다는 조금 더 바삭한 질감을 가졌고,


"튀김 안 쪽이 조금 더 부드럽고 쫄깃한 느낌이네"


"강릉의 신성춘과 비슷한 옛날 탕수육의 모습이야."


탕수육 조각이  소스에 묻어 반짝거린다


덕취원이 오래된 중화요릿집이다 보니 강릉에서 오래된 중화요릿집인 신성춘과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되었다. 신성춘에서 사용하는 탕수 소스보다는 더 진하고, 과일 통조림을 조금 쓰셨는지 더 새콤한 맛이 올라온다. 신성춘은 소스에 튀김이 묻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쫀득한 맛의 식감을 주는 튀김이지만 덕취원은 큰 변화 없이 바삭한 맛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짬뽕이랑 볶음밥을 여기 중간에 놔드릴게요"


눈에 보이는 재료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홀에서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분께서, 주변에 있는 커플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에게도 앞접시를 식탁에 올려놔주시면서 말한다. 그렇지, 맛있는 것이니까 나눠먹는 게 더 낫겠지.


"일단 삼선짬뽕부터 먹어볼까, 이거 재료 넣은 것이 신선하고 실하네."


"와, 전복이랑 새우도 있어!"


'삼선'이라는 말에 더 많은 수산물들을 더 해주는 인심이 후한 해물짬뽕이었다. 그릇 밑바닥에 잠들어있는 면발 위에 큼직한 굴과 새우, 해삼, 오징어, 우뭇가사리, 목이버섯, 청경채 거기에 전복까지. 각종 이렇게 많은 재료들에다가 면까지 주는데 이게 1인분이라고? 가격을 더 받아야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해물짬뽕.


"우선 굴이랑 해삼부터 먹어보고 싶네, 하지만 국물이 먼저."


나는 숟가락을 들어서 시뻘건 고춧기름이 매콤한 향을 내뿜는 국물을 향해 집어넣는다. 내가 좋아하는 노포 탐방 식도락가이신 '초빼이'님께서 극찬을 하셨기에, 더 궁금했던 덕취원의 짬뽕맛.


후루룩


"와아... 오우..."


굴, 해삼, 전복 등 신선한 맛의 해산물들을 한그릇으로 즐길 수 있다


매콤한 고춧기름의 진한 향이 입에 닿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고추기름을 빻는 방앗간은 사라지고 깊은 바다와 해안의 시원한 파도맛이 입안에 철썩인다. 해풍을 맞으면서 바다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원한 굴과 오징어의 맛이 입안에 깊은 바다의 향을 남긴다. 국물이 식도와 오장육부까지 내려가면서, 음주를 즐기시는 분들은 바로 '여기 소주 하나!'를 외치실 맛이다. 속이 뻥 뚫리는 기쁘고 깊은 해물의 맛.


"초빼이님이 그 덕취원 글에서 제대로 말씀을 하셨구나, 해장하러 왔다가 해장술 마시고 갈 맛이야."


"해산물도 신선하고 쫄깃하네, 국물 진짜 좋다."


이쁜 그녀도 면보다는 푸짐한 해물 건더기를 국물과 함께 먹으며 행복해했다, 나보다 수산물을 더 좋아하는 이쁜 그녀는 해삼, 오징어, 굴, 전복을 함께 먹으면서 그녀도 그녀만의 미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짬뽕에서는 면발도 빼놓을 수가 없으니, 갓 기계에서 뽑아져 나온 노랗고 탱글탱글한 면발을 덜어서 시원한 국물에 적셔서 먹어본다.



후루루루룩


다른 중화요릿집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중화식 노란 국수이다, 하지만 더 탱글탱글하고 찰랑거리는 식감으로 치아 사이에서 더 쫄깃하게 씹혔다. 내가 아는 그 중화요릿집의 국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식감이 좋다, 적어도 내가 여태까지 경험한 중화요릿집의 면발 중에서도 제일 좋은 축에 속하는 면이다.


"국물도 좋은데 면발도 훌륭하네, 여기 해물짬뽕은 또 오고 싶은 맛이야."


"그래, 그래, 면은 네가 다 먹어."


면발이 찰랑거리면서 워낙 식감이 좋으니 나는 진공청소기처럼 짬뽕면발과 국물을 흡입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도 알지 못한 채, 짬뽕의 3분의 2 정도는 내가 다 먹은 듯했다. 그리고 함께 나온 볶음밥도 놓칠 수 없었다. 일단 달걀국을 마셔본다,


보이는 것보다 어마어마한 내공이 느껴지는 달걀국


후루룩


"오우, 달걀국이 시원하고 깊은 맛은 처음이네."


역시나 덕취원, 짬뽕 국물뿐만 아니라 달걀국마저도 시원하고 깊은 맛을 낸다. 하지만 볶음밥에 달걀국보다는 짬뽕국물을 따로 얘기해서 드시는 분들도 많았다.


"짬뽕 국물에 사용하는 해물 육수를 달걀국에도 함께 쓰는 건가? 이것도 엄청난 맛이네."


그리고 볶음밥의 밥을 먼저 먹어본다, 짜장을 묻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는다. 밥 한 알 한 알이 고슬고슬하게 볶아져서 입안이 간질거리는 식감을 주는 옛날 중화식 볶음밥, 지금은 사라진 강릉의 '진짜루'나 옛 전통을 유지하며 영업하는 '신성춘'에서 내어주던 그 옛날식 볶음밥들과 같은 맛이 났다. 기름에 바짝 튀겨낸 달걀과 달착지근하고 끈적한 짜장까지, 내가 좋아하는 맛을 다 모아놓은 볶음밥이었다. 모든 재료들이 자잘하게 작은 조각으로 다져졌지만 기름과 조미료들로 뜨겁게 한 곳으로 볶아져서 고소함과 짭짤함으로 응축된 감칠맛을 선사한다.


고슬고슬하게 볶아진 볶음밥, 기름으로 튀겨낸 달걀이 없으면 섭섭하다


"볶음밥도 고소하고 좋네."


"응, 신성춘이랑 진짜루에서 먹던 맛이야. 내가 항상 곱빼기로 주문해서 먹던 중화식 기름 볶음밥의 맛."


해물짬뽕은 나를 바닷가로 보내주는 맛이라면, 볶음밥은 내가 좋아하던 추억으로 돌려보내주는 맛이다. 탕수육도 시간이 지나서 소스가 더 묻어서 끈적해질수록 바삭한 튀김옷이 쫄깃하게 변하면서 또 다른 식감을 선사한다.


'그 어떤 애주가가 이 덕취원을 싫어할까. 힘든 바닷일을 많이 하는 이 동해안의 사람들은 이 덕취원의 맛을 더 사랑했겠지. 그래서 더 오래,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아닐까.'


배가 부르지만 포기할 수 없는 덕취원의 음식들을 계속해서 위로 밀어 넣으면서 나는 덕취원이라는 이 중화요릿집이 가진 저력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수많은 식당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직까지도 건재하여 존재를 나타낸다는 것은 각 식당이 가진 음식의 맛과 장인정신을 증명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다 먹었으면, 얼른 일어나자. 사람들 대기줄이 어마어마하네."


"응응, 북평장 구경 하면서 소화 좀 시킬까?"


우리는 비어있는 그릇들을 뒤로하고 북평오일장의 인파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 어떤 식재료와 음식들이 우리를 즐겁게 할지 상상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미식일기] 제일함흥냉면(겨울), 강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