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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Apr 27. 2024

[미식일기] 엄마손김밥, 강릉

친구들과 소풍 가던 시절, 그때 먹던 그 김밥의 맛

형광색의 등이 둥그스름한 널찍한 반투명 돔을 통해서 내려온다. 밝은 회색의 장판 위에 더 회색의 가죽소파에 나란히 앉은 김고로와 가족들, 검은색의 뒤통수가 뚱뚱한 텔레비전의 9시 뉴스에서는 근엄하고 진지한 모습의 앵커가 뉴스를 읽고 있다.

오돌토돌 반투명한 통유리에 목재틀의 베란다창을 넘어서, 바깥의 주광색의 가로등이 밤하늘에 반사되어 집안으로 들어온다.


길고 검은 바가지 머리를 덮은 김고로가 옆에서 신문지를 아래에 깔고 손, 발톱을 깎는 엄마한테 묻는다. 그의 누나는 남매의 공부방에서 남은 학습지와 숙제로 한창이다.


"엄마, 나 내일 소풍 도시락 뭐 싸줄 거야?"


김고로가 한껏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묻는다, 김고로의 말을 듣던 엄마가 손톱이 나가떨어지는


또각, 소리에 맞춰


"음? 동신분식에서 김밥 사놨어."


"와!"


"2줄이면 되지?"


"응, 맛있겠다."


김고로가 한국에 살던 어릴 적 소풍에 대한 기억은 그렇다. 모든 소풍과 야외학습은 김밥이 들어간 도시락이 있어야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 학교에서 소풍을 가던 나이에, 그때 그 시절에, 학교에서 소풍이나 현장학습 등을 간다고 하면 김밥이라는 음식이 당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옆나라 일본의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초밥과는 다르게 참기름과 소금으로 짭짤하게 간을 하고 갖은 채소와 익힌 달걀, 고기나 생선(주로 참치캔)을 넣어 탄수화물, 단백질과 지방이 균형 잡히게 들어간 영양만점 식사.


바삭하게 건조된 김 위에 고소 짭짤하게 간이 맞춰진 밥, 단무지, 당근, 시금치 (대신 오이가 들어갈 수 있지만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오이를 싫어한다), 우엉, 달걀, 게맛살 (이라 부르고 약간의 게살과 밀가루가 합쳐진 식품으로 이해한다), 거기에 햄이나 쇠고기가 들어간 것이 이전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김밥이다.


식문화의 발전과 유행을 거치면서 돈가스, 새우튀김,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에 깻잎, 소시지 등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하고 수많은 재료들을 넣고 상상치 못할 가격으로 한 줄을 사 먹게 된 지금이지만 적어도 내가 알던 김밥은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재료들이 손맛이라는 조미료가 듬뿍 끼얹어져서 맛을 내던 음식이다.


한때는 김밥들이 모인 천국에서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하며 저렴하게 가성비 넘치는 서민 음식의 대명사였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말, 동네 분식집에서 먹던 흔한 김밥을 먹는 것은 너무나 어려워졌고 기름집에서 짜는 '진짜' 참기름을 바른 김밥을 먹는 일은 더 어려워진 것이다. 고급지고 특별해져 버린 김밥들 사이에서는, 돈가스도 아니고 새우튀김도 아니고 치즈도 아니고 참치도 아니고 그런 묵직하고 비싼 재료가 들어간 김밥이 아닌, 소풍날 먹던 '그냥' 김밥의 낭만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그 옛날 분식집들의 김밥들보다 더 위생적이고 깔끔하며 맛을 보장할 수 있겠지만, 그 묘한 옛날 김밥의 매력은 대형 프랜차이즈와 공장에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맛의 우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추억의 맛'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랑 남편은 거의 매일 점심에 김밥 먹어요."


김고로와 이쁜 그녀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 '펌킨오울'의 '펌킨'을 맡고 있는 펌킨님이, 식후 에스프레소로 출근 전 시간을 즐기고 있는 김고로에게 말을 꺼낸다. '오울'을 맡으신 남편 부엉님이 매장에 잠시 없는 것에 대해 김고로가 물은 것이다.


"부엉님은 김밥 사러 가신 거예요, 그럼?"


"네네, 서부시장 쪽에 엄마손김밥이라고 있는데, 거기 김밥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거든요."


"얼마나 자주 드시는 거예요?"


"저번주 금요일부터 계속 먹고 있네요."


"저번주 금요일이면, 오늘이 목요일이니, 그만큼 맛있다는 얘기군요."


"맛있는 식당들은 사장님들이 다들 무심하고 친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가 봐요."


"아하하하,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강릉에서 그건 인정합니다."


"무심하게 주문받고 음식 건네주시는데, 김밥을 받아서 가져오면 멀리서부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거든요."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이쁜 그녀가 귀를 쫑긋하며 듣는다, 집에서도 김과 밥에 김치를 얹어서 간단하게 김치김밥을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해서 냉동실에 한동안 김밥용 김을 사다 두던 이쁜 그녀다.


"나중에 우리도 사 먹어 볼까."


"그러자."


"엄마손김밥은 기본 김밥은 2줄씩으로만 팔아요, 2줄에 7천 원."


2줄에 7천 원이라고 했으면 20년 전의 물가로는 '비싸'라는 얘기가 바로 나오겠지만 지금은 2024년이다. 2024년의 미래형 물가로 김밥이 2줄에 7천 원이라면 생각보다 '착한' 가격이다.


"2줄에 7천 원이면 괜찮은데?"


"응응."


그때 마침 검은 비닐봉지에 김밥을 들고 가게로 들어오는 부엉님, 문에 다가오자마자 진한 참기름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안녕하세요~!"


"와, 김밥 냄새 죽인다."


검은 봉지에 들어있는 김밥의 모양새로만 봐도 굵직하고 두툼한 것이 속살은 어떤 모양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쁜 그녀는 그때 벌써 엄마손김밥이라는 곳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평소 끼니를 급하게 해결할 때도 김밥을 곧잘 먹는 그녀에게 김밥이 맛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희소식.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엄마손김밥을 먹을 수 있는 때는 금방 왔다. 강릉의 겨울이 완전히 끝나고 봄맞이 준비를 하는 때가 왔다, 이쁜 그녀는 겨울에 쓰던 침구류 등을 세탁하기 위해서 서부시장 근처의 빨래방을 가기로 했다. 김고로는 김고로대로 나름 일정이 있어서 유천에서 머물고 있던, 먹구름이 가득 꼈지만 시원한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우리 그럼 점심은 집에서 먹을까? 집에 뭐 있지?"


"집에 항상 먹는 것 있지."


"서부시장 근처에 있으니, 저번에 들었던 엄마손김밥에서 김밥 사다 먹을까?"


"그래, 좋아! 안 그래도 그 생각했는데, 히히!"


소풍 가는 날 김밥 도시락을 챙기는 아이처럼 이쁜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부시장 입구에 있는 엄마손김밥으로 향한다. 주말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날 따라 엄마손김밥이 영업 중이었다. 밝은 갈색의 벽돌 타일로 외벽을 꾸민 옛날식 건물의 1층에 자리 잡은 엄마손김밥은 눈에 탁 띄는 노란색 바탕에 굵은 글씨체로 '엄마손김밥'이라는 간판을 떡하니 달고 있어서 서부시장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다. 겉은 노란색의 시트지가 통유리에 덮여있고 입구에는 비닐로 된 하늘색 발이 달려 있어서 바깥에서 내부가 잘 보이는 곳은 아니다.


이쁜 그녀가 엄마손김밥에 들어서자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메뉴판. 그리고 진하게 가게 전체를 휘감고 있는 참기름의 냄새.


'참기름 냄새가 가게를 가득하네, 진짜 참기름을 쓰시는 것 같은데. 기름집에서 바로 받아 쓰시나? 그건 그렇고, 그냥 김밥인 '엄마손김밥'에 쇠고기, 참치, 햄 김밥이 전부구나. 진짜 김밥만 파는 김밥집이네.'


이쁜 그녀가 눈을 조금 아래로 내리니 겨울에만 파는 생만두가 보인다, '생'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것을 보아하니 조리가 되지 않는 만두를 파는가 보다. 입구에 들어서니 왼쪽에 커다란 김치냉장고와 형광등 아래에서 빛나는 나무로 된 책상에 나무 인테리어로 된 주방,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들이 전부. 그런 책상과 냉장고들 마저도 정리가 아직 덜 된 식재료들과 물건들이 담긴 상자와 꾸러미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 집은 홀에서 식사가 되지 않는 집이다, 그 흔한 배달 어플에 대한 것도 안 보이는 것으로 봐서 포장 장사만 하시는 곳인 듯하다.


'가게는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주방에서는 김밥을 잘 싸시는구나.'


"뭘로 드릴까요?"


평범한 한국어 인사인 '안녕하세요'가 아닌 '뭘로 드릴까요?'라는 말, 이미 엄마손김밥의 주인 분들에 대해서 익히 들어온 이쁜 그녀라 당황지 않는다.


"엄마손김밥 4줄 주세요."


"네, 조금 걸려요."


주문을 접수한 사장님은 김밥을 싸는 일로 복귀한다. 사장님과의 대화에서 벗어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가게 근처를 돌아보고 나니 김밥이 준비되었단다. 김밥을 4줄 주문했으니 4명이서 먹는 줄 알고 젓가락은 4개, 작은 투명비닐에 담긴 단무지 조각은 2묶음이다. 이쁜 그녀는 신나는 마음에 뽀송뽀송하게 잘 말려진 이불과 김밥을 들고 집으로 달려오고 유천지구에서 일정이 끝난 김고로도 집으로 합류한다.


식탁에는 이미 김밥을 먹을 준비가 끝났다, 각자 그릇 위에 김밥을 2줄씩 덜어서 올려놓으려고 김밥을 포장하고 있는 알루미늄 포일을 개봉하기도 전부터 검은 비닐봉지에서부터 참깨 냄새가 폭발하고, 김밥이 그릇에 등장하자 참기름을 먹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장 기름집의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의 모습이 연상되는 검고 흰 줄무늬를 번쩍이는 엄마손김밥의 김밥.



"잘 먹겠습니다!"


마침 배가 너무나 고팠던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김밥의 통통한 매력을 참지 못하고 급하게 달려든다. 뚱뚱하고 터질 것 같은 김밥 꼬다리(끝조각)를 입에 넣은 우리의 눈은 감기고 '음~'이라는 한마디가 일치한다.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에게 부탁해야 살 수 있다는 기름집 진짜 참기름을 쓰는 게 맞네. 평소에 먹던 시중의 참기름과는 맛이 달라."


"그러게, 고소하고 깔끔해. 참깨의 향기도 깊고 풍부하지."


음식이 나왔을 때,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님을 끄는 매력은 시각과 후각에서 나오는데, 엄마손김밥은 우선 번쩍거리고 매끈한 외모와 고소한 후각이 압도적이다. 지나가던 사람도 참기름 냄새를 맡고서 호기심을 가질만하다. 밥이 많이 들어있지 않은 끝부분을 그렇게 먹고 참기름밥이 재료들을 잘 감싸고 있는 몸통을 먹기 시작한다.


아삭아삭



김밥의 말끔한 모양 유지를 위해서 약간은 찰진 밥을 지어서 사용하시는 듯하다, 쫀득하면서 꼬들한 감이 살아있는 쌀밥이 씹힐 때마다 담백하면서 고소한 향이 난다. 두툼한 단무지가 사각거리고 우엉, 달걀, 게맛살, 당근, 시금치가 각자의 맛을 뽐낸다.


달착지근하며 끈적한 우엉, 매끈하며 단단한 당근이 들어오고 시금치가 특유의 상쾌한 향을 내뿜으며 부드럽게 씹힌다. 게맛살과 달걀은 함께 씹히면서 고소한 밥알과 채소들 사이의 맛을 적당히 잡아주는 균형의 수호자 역할을 다한다. 강하게 으스러지면서 촉촉한 수분과 단맛을 내뿜는 우엉과 단무지가 사라지면서 부들부들하고 말랑한 식감의 게맛살과 달걀이 식감의 조화도 만들어낸다.


"내가 게맛살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데, 김밥에 들어가는 게맛살은 거부감이 없단 말이지."


"그래, 네가 게맛살을 다 놓치지 않고 먹네 웬일로."


"우리는 오이만 없으면 되니까."



한 조각을 먹기 시작하니 김밥이 끝도 없이 입으로 흡입된다, 한 조각을 먹었는데도 이 심심하고 다양하며 씹는 재미와 참기름의 향기로 버무려진 무심한 손맛의 음식이 계속 끌린다.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이 한국인들의 급한 성미를 닮아 간편식으로 만들어져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간편식'이라고 부르기에 김밥은 너무나 많은 손맛과 정성이 쏟아지는 음식이다. 그 정성만큼이나, 그 정성을 입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코와 입으로, 눈을 감고 씹으며 온전히 그 맛을 즐길 필요가 있다.


매끄럽고 향긋한 참기름과 김, 한 알 한 알 씹히는 작은 쌀알들, 김밥 장인이 한 조각 한 조각 썰고 다져낸 채소들, 뜨겁게 지지고 부쳐낸 달걀의 바삭함과 말랑말랑한 게맛살.


예전에는 동네에서 흔하게 먹을 수 있었던 기본적인 김밥의 맛이지만, 옛적에도 맛있었고, 지금은 흔하게 먹을 수 없기에 더 맛이 좋다. 전보다 위장이 비교적 줄어든 이쁜 그녀가 한 줄을 먹는 사이, 김고로의 그릇에 있던 뚱뚱한 김밥 두 줄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너 진짜 배고팠구나?"


"응, 배고팠어. 그런데 맛있어서 금방 먹어버렸네."


"나는 지금 다 못 먹으니, 냉장보관 해놨다가 내일 먹어야지. 내일 아침 생겼다!"





어린 김고로는 좋아하던 바다와 하늘이 섞인 책가방을 매고서 집에 돌아오는 길, 하얗게 페인트가 칠해진 복도형 아파트의 넓은 정문 계단을 올라서 경비원 아저씨가 앉아있는 경비실에 인사하고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의 쪽지.


-엄마 조금 늦는다, 동신분식에서 김밥 먹고 와.-


빙긋 웃으면서 쪽지는 주머니에 쓱 넣고, 방 안에 책가방을 툭 던져 넣고는 열쇠를 챙겨 집 앞 상가로 향한다. 1층의 조명이 다 들지 않는 어둑어둑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 10평이 되지 않는 작은 매장 앞에 4,5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분식집. 약간 어두운 지하상가 구석에서 밝게 불이 켜진 분식집 앞에 어린 김고로가 앉는다, 짙은 갈색의 면바지와 검은 조끼를 입고 등받이가 작은 짧은 의자를 드르륵 꺼내 앉는다.


"응? 고로 왔니?"


"네, 엄마가 김밥 시켜두시고 가셨어요?"


"응, 너 오면 주라고 돈 주고 가셨으니까 먹고 가. 국물도 줄까?"


"네, 좋아요."


하늘색이 푸르스름하게 감도는 플라스틱 타원형 그릇 위로 두툼하게 말린 김밥이 한 줄, 그 옆에 하얀 공기 안으로 짭짤하고 칼칼한 맛이 나는 투명한 우동국물.


"잘 먹겠습니다."


서툰 젓가락질로 인삼과 사슴이 그려진 쇠젓가락을 잡고 김밥을 작은 입에 집어넣는다, 고소한 밥알과 아삭한 채소가 씹히고 햄의 짭짤함이 입 안쪽 어금니 사이로 부드럽게 으스러진다.


"맛있어요."




벌떡


어릴 적 자주 가던 분식집에서 김밥 먹는 꿈을 꾼 김고로, 아침에 일어나 옛날의 그 김밥 맛을 회상한다.


"맛있었지. 옛날 김밥."


전날 점심에 먹은 엄마손김밥을 생각하며 빙긋 웃는다,


"또 사 먹어야지."


맛있는 옛 김밥에 대한 추억이 참기름 냄새만큼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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