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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Jul 17. 2023

아무튼 한 장.

#3. 종이 밖으로 넘쳐 흐르는 단어를 덜어내는 일.

 계절 글방인 미루 글방에서 7번째 계절을 지낸다. 처음 글방을 시작할 땐 2주에 한 편정도 쓰는 일이 그리 빠듯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나는 게으른 J(계획형 인간)가 아니던가.. 모임 후 보통 2주의 텀이 생기니 첫 7일은 과제는 잊고 마음 편히 논다. 8일 차 정도 되면 슬슬 과제의 압박을 느끼지만 아직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 바로 노트북을 열진 않는다. 불안함 마음으로 며칠은 머릿속으로만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 마감 3일을 남기면 그때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마감을 앞두면 하루 정도는 동네 카페에 가서 2시간~2시간 30분 정도 머물며 글을 쓰는데, 일단 1시간은 자리를 세팅(?)하고 커피와 함께 창문 멍을 때리며 뜸을 들인다. 남은 1시간이라도 집중해서 줄줄 써 내려가면 좋으련만, 갑자기 은행 어플을 열고 가계부 정산을 한다거나, 평소에 잘 안 읽던 뉴스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읽는다. 매일 옆에 끼고 보는 아이들인데 사진첩은 또 왜 그리 애틋한지? 세상만사가 모두 흥미로운 시간, 정작 써야 할 글은 쓰지도 않고 딴짓만 하다 돌아오는 날이 부지기수다.(이런 날은 밤잠을 반납하고 과제를 해야 한다.)

     

 며칠 내내 나름대로 머릿속엔 가지런히 구조를 짜 놓지만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갑자기 쓰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이 얘기도 하고 싶고, 저 얘기도 하고 싶으니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을 다 털어낼 기세로 글을 쓴다. 구구절절 길게 늘여 쓴 글이 좋은 글이 아니란 건 읽는 경험을 통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글엔 왜이리 관대해지는 걸까. 내 눈엔 모든 문단마다 연관성이 있었고, 모든 문장이 소중했다. 무엇보다 한 문장 쓰려고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던가..어떻게든 어디든 끼워 넣어 살리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뭐든지 빽빽한 것을 좋아했던 나는 어디든 빈틈이 보이는 걸 괴로워했다. 필기도, 편지도, 일기도 뭐든지 빼곡해야 열심히 한 느낌,,,(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양보다는 질적인 글을 쓰고 싶은데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으니 주절주절 문장들을 채워 넣는 나.. A4 3 장 정도 되는 글을 읽는 독자 입장에선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었을 듯, 내가 쓴 글에 내가 질리는 날도 많았으니, 읽는 사람 입장에선 더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글방 초기엔 ‘은아 씨는 소재가 참 많은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그땐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앞으로도 쓸 이야기가 많아 보인다는 뜻이군? 다행이군. 하며 마음대로 해석을 했던 것. 물론 비빔밥처럼 각각의 재료들이 조화롭게 비벼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글이 되겠지만(비빔밥 이야기도 글방 선생님께 들었던 피드백이다.)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소재들을 다 끌어와 잡채밥(은 맛있기라도 하지) 같은 글을 쓰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글방 선생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려주셨다.      

 

‘은아 씨, 이제 당분간은 무조건 한 장만 쓰는 연습을 하자.’     


 ‘헐, 한 장이요? 네, 노력할게요!’ 대답은 잘했다.      


 다음 과제는 소설 리뷰였다. 여름의 끝에서 만난 상실을 다룬 소설을 읽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때마침 책을 읽고 잠든 날 꿈에서도 두 번의 상실을 겪은 게 아닌가. 이런 소재를 놓칠 수 없는 나는 또 구구절절 개인적인 에피와 책 이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일단 첫 문단을 후루룩 쓰고 나니 다음 문단도 잘 흘러갔다.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문서창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데 문득 ‘A4 한 장!’ 이란 단어가 머리에 번뜩 떠올랐다. 

 ‘아, 맞다!’


 제출용은 글자 포인트를 10으로 맞추지만 혼자 글을 쓸 땐 보통 글자 크기를 9로 맞춰놓고 글을 쓴다. 누구도 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뒤에서 누군가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작은 포인트로 쓰는 습관이 생겼다. Ctrl+A 자판을 눌러 글을 모두 선택한 후 10 포인트로 바꿔 보았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미 글은 A4 한 장을 넘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런..’      


 서둘러 글을 마무리했다. 9.5로 문자 포인트를 맞추고, 쪽 여백을 위, 아래, 오른쪽, 왼쪽 모두 팍팍 줄였다. 이만하면 한 장 같네! 완벽해! 하며 마침표를 찍은 문서를 PDF로 전환한 후 글방 단톡방에 과제를 제출했다. ‘이 정도면 한 장 맞지. 조금 더 써도 티 안 나네!’ 하며 후련~하게 노트북을 덮었는데...?


 글을 쓰다 만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글방 선생님께선 마지막 문단에 조금 더 추가했으면 하는 내용들을 첨삭해 주셨다. 피드백을 듣고 바로 글을 다시 썼다. 그제야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글을 한 장으로 줄여보자는 선생님의 의도가 분량의 문제가 아닌 ‘덜어내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 척 꼼수를 부렸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내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셨고. 


 부끄러웠냐고? 부끄러움보단 머쓱했다. 물론 잠들기 전까지 또 죄 없는 이불을 뻥뻥 차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에피 하나 추가요! 하며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매주 월요일 브런치에 연재 글을 올린 지 3주 차가 되었다. 그동안의 책 모임 이야기들을 하나씩 기록하기 시작한 것, 부담은 내려놓고 온전한 즐거움으로 쓰는 마음을 되찾기 위한 일이다. 오늘도 문서창을 열고 포인트를 9로 맞춘 채 여백을 채워나간다. 말로 하지 못해 쓰는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잔가지들을 덜어내는 일이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늘도 나는 덜어내는 연습을 한다. 차근차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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