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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포니아상도동 Feb 02. 2022

멀어지기 위해 오른다

인스턴트지만 괜찮아

떠나고 싶다

산을 (스스로)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하루 8시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으로 주중 야근은 이미 일상이였고 주말출근도 많아지고 있었다.  '일을 배울 때는 빡시게 배워야지!' 라는 투철한 근로정신에 사로잡혀 헐어버린 입천장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 처럼 여기고 있었다. 한 번은 대상포진이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주변에 '대상포진'을 앓았던 이가 없어 병명도 생소했고, 입주변에 물집이 피어오길래 피부병 정도이겠거니 생각했다. 약국에서 피부약을 발라도 차도가 없어 병원을 찾았을 때에는 포진균이 목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몸은 점점 무뎌지고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 욱씬거렸다. 그 때서야 '대상포진'이라는 병을 알게되었고 업무에서 벗어나 푹 쉬는 것이 처방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육체는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버티고 있었다.


육체적 피곤함은 참을 수 있었지만, 정신적 피곤함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투철한 근로정신도 멘탈보호막이 될 수 없었다. 보고서, 회의록, 분석자료를 열심히 삼켜 끊임없이 보고서를 토해내는 반복적인 생산작업과 주제없는 미팅, 책임회피만 모색하려는 무리. 나를 지치게 만든 것은 '피곤함' 이 아니라 '무기력함' 이었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휴가를 쓰는 것은 마치 부트캠프를 도중 하차하는 훈령병의 나약함이라고 여겼는데, 훈련병 마인드로 3년을 버티니 저절로 '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것들로부터 단절되고 싶었고 멀어지고 싶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인스턴트 해방감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지만, 또 너무 멀리갈 수는 없었다. 주말 언제라도 회사에서 호출이 오면 출근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하철로 이동 할 수 있고, 집에서 이동이 1시간 이내라는 조건을 검색하다 보니 수락산이 눈에 띄었다. 더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지만... ...  음식도 그렇지 않은가?  매번 전문 음식점에서 배를 채울 수는 없다. 편의점 인스턴트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어도 배는 부르다.  


수락산 마당바위에서


오른다. 오른다. 점점 멀어진다.

첫 한 시간은 가쁜 숨을 가다듬는데 정신없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목표하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기.  


'저 능선까지만 올라가보자' 

'저 나무까지만 가서 잠깐쉬자' 


내 자신을 타이르며 물 한모금, 숨 한번 내쉬는 것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이제껏 올라온 길이 아깝지...' 라는 생각이 도중하산을 가로막았다.  이마에서 타고흐른 땀줄기는 목덜미를 지나 가슴과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간 축적된 노폐물이 땀으로 빠져나간다는 상쾌함도 놀라웠지만 머리속 어지러운 생각이 모두 지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지우게를 여러번 긁어도 지워지지 않았던 낙서들이 싹 지워져 깨끗해지고 나니, 뇌 속에도 공기가 들어가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중턱에서 바라본 풍경. 저만치를 떠나온 것 같다


눈 앞에 보이는 목표만 쫓아 오르다보니 어느덧 중턱. 눈호강 시켜주는 풍경들에 취해, 이미 이만큼이나 올라왔다는 나름의 성취감에 취해 또 오른다.  정상을 향하는 길에도 꾸준히 하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내가 올라가는 이 길이 나에게 처음이지만, 누군가에는 이미 지나간 길이다.  '최초'가 아니라 다행이다. 따라가는 길은 훨씬 쉽고 안전하다. 인생도 그러하다. 


수락산 정상석: 수락산 주봉


정상석. 흔들리는 태극기가 등산객을 반긴다.  올림픽 시상대에서 바라보는 태극기가 이런 기분일까? (과장이 심하다) 

올림픽 수상 인터뷰중 그간의 노력이 떠오른다며 눈물짓는 선수들이 종종있다. 메달 수상은 밖으로 드러나는 결과지만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은 본인만 안다. 같은 결과라도 각자 느끼는 감회가 다른 이유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수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렸던 정상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정상'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산을 오르며 점점 멀어지는 풍경속이 나만의 Get away 티켓이 되었다. 


꼭 멀리 떠나야만 해방감이 주어지고, 비례적으로 더 커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간편하고 손 쉽게 목적을 수행하는 인스턴트 음식처럼 해방감에도 인스턴트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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