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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Feb 13. 2022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있다

#영화같은 에세이 #싱 스트리트(2016)

지난 10여 년간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중 하나는 아마 '청춘'일 것이다.


청춘이라 좋겠다, 지금이 좋을 때다, 지금을 즐겨라 나중에는 못 한다, 하고 싶은 건 과감하게 도전해라 등 들은 충고와 조언만 해도 수십 가지다. 다만 그런 말을 듣는 대부분의 '청춘'들은 본인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도전해야 하고 대체 무엇을 즐겨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조언을 하는 이들도 본인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조언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 말을 듣고도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청춘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나이지만, 본인이 갖고 있는 작은 세계는 그만큼 위태롭다. 작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작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고, 무너지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그래서 꽤 많은 이들이 그저 적당한 향유, 적당한 도전으로 그 시기를 보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러지 않았다. 적당히를 모르는 것 같았다. 멋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강렬히 기억에 남는다.


1980년대 아일랜드, 코너(퍼디아 윌시-필로)는 평범한 학생이다. 집은 어렵고 부모는 이혼 직전이고 형은 백수긴 하지만 그런대로 평범하게 지내며 살고 있다. 그래서 본인도 그렇게 적당히 살고자 하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라피나(루시 보인턴)를 보고 첫눈에 반하면서 코너의 세계는 통째로 흔들린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라피나에게 다가가 말을 건 코너는 라피나가 모델 연습생이라는 것을 듣고 순간적으로 자신이 하는 밴드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이 뱉어버린 말 때문에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선후관계가 아주 엉망이다.


밴드를 하려면 뮤비 주인공을 먼저 구해라. <싱 스트리트>, 2016


코너가 다니는 학교는 사제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엄격한 규율을 가진 가톨릭 학교지만, 정작 학생들은 뭔가 하나씩 나사가 빠져있다. 하나같이 조금 무식하거나, 조금 양아치거나, 아니면 조금 무식한 양아치다. 그런 학교에서 코너는 급하게 밴드 멤버를 모아  밴드 '싱 스트리트'를 결성한다. 처음에는 당시 인기 밴드 '듀란듀란'의 곡을 커버하려 하지만, 직접 곡을 만들어보라는 형의 말을 듣고는 작곡을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된 첫 곡으로 라피나와 함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다. 밴드 결성은 라피나와 가까워지기 위한 개수작이벤트였지만, 이미 밴드에 흥미가 생겨버린 코너는 작사와 작곡을 계속 이어간다. 곡 작업과 녹음을 거듭하며 코너와 멤버들의 모습도 점점 반항적으로 변한다.


확실히 학교에서 좋아할 만한 복장은 아니다. <싱 스트리트>, 2016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차치하고, 영화는 코너와 라피나가 데모 테이프와 포트폴리오만 챙긴 채 싱어송라이터와 모델의 꿈을 위해 조그만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몰아치는 파도에 비해 작은 배를 타고 출발하는 코너와 라피나의 모습에서, 영화는 젊음의 아름다운 도전, 그리고 패기 있게 도전하는 그들의 미래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연출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80년대 팝, 또는 어린 학생들의 패기 있는 도전과 반항에 주목하곤 했다. 물론 영화에서 밴드 '싱 스트리트'의 음악들은 당시의 음악 정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영화 개봉 당시 음악시장의 트렌드를 잘 녹여내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Up(Bedroom mix)>, OST 앨범 타이틀인 <Drive it like you stole it>은 개봉 후 그 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 플레이리스트에 있었다. 고등학생들이 만들어 부르는 노래 제목이 <훔친 듯이 달려>라니, 이토록 직관적인 제목에 이렇게 제목과 가사가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 곡은 몇 년 만이었다.


다만 내가 영화에서 본 것은 그런 것들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는데, 바로 '역할'이다. 별 볼일 없는 학생들이 만들어가는 밴드 이야기는 처음에는 뻔하다가도, 영화가 진행될수록 무언가 색다른 면이 있었다. 창작을 하고 악기를 다루는 코너와 친구들 말고도, 음악을 모르는 친구는 밴드 매니저로 밴드의 일정을 조율하고, 심지어 극 초반에 코너를 괴롭히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 대던 일진(?) 친구는 코너에게 감화되어 나중에 밴드가 무대에 오를 때 경호원으로 활약한다. 평범한 학교에서 저마다 문제와 사정을 하나씩 안고 있던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은, 당당히 하나의 역할을 맡아 제 역할 그 이상을 해낸다.


누구나 자신의 역할이 있다. 다만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다. 방향을 잘 잡으면, 누구나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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