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버리다

[ 4. 손바닥만 한 하늘색 노트 한 개 ]

by 시우경희

다시 찾아서 열어보지 않은 걸 보면...




오늘도 깊은 잠을 못 잤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쪼그려 자고 일어났더니 온몸이 뻐근하고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왼쪽 다리에는 뚱땡이가, 오른쪽 다리에는 달레가, 양다리 사이에는 팝방이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숙면을 취하고 있다. 겨드랑이 사이는 꼬맹이가 사수 중이다. 다른 두 녀석은 다행히 쿠션 옆에서 둘이 붙어 자고 있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봤지만 팔다리가 늘어나지 않는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고무줄 같다.


'아구구.'


불룩 솟은 양쪽 어깨의 승모근까지 더해져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왼발을 천천히 구부려 이불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 빼낸 후, 오른발을 마저 빼내다가 팝방이의 꼬리를 무릎으로 눌러버렸다.


'깩.'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천장을 향해 뛰어오르더니 거실로 줄행랑을 쳤다. 자다가 날벼락이다.


팝방이의 놀란 소리에 다른 아이들도 깨어났다. 어수선한 아침이다.


침대 위 아이들을 전부 거실로 내려보내고 겸사겸사 이불을 들어내 세탁기에 넣었다. 하루도 쉬지 않는 우리 집 세탁기가 아직 고장이 나지 않고 잘 돌아가서 다행이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들어가 오늘의 컵을 골라 정수기에서 물 한잔을 내려 마시며 허리를 펴본다. 찌릿하다. 미루지 말고 병원에 한 번 들러야겠다.


거실로 나가려다 주방 한쪽에 쌓아둔 잡동사니 더미 앞에 멈춰 섰다.


세금 고지서, 아이들의 약봉지, 사은품으로 받은 바구니에 비닐봉지 그리고 책, 노트, 필통, 영양제까지 이것저것 정신없이 쌓여있다. 언제부터 여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이곳도 종종 정리를 해서 깨끗했는데 어느새 보면 이렇게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난장판으로 뒤섞여있다.


오늘은 이곳에서 비울 것을 찾아야겠다.


시선이 더미 한쪽 끝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섰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하늘색 표지. 모서리가 낡아 구겨진 작은 노트다.


"아직도 있었네?"


노트를 꺼내 펼쳐 보았다.


할 일, 처리할 것들, 날짜, 계획들, 주로 전화 통화를 하면서 사용했던 내용들이 급하게 휘갈긴 글씨로 듬성듬성 쓰여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넘긴 빈칸도 있고, 뭔가를 정리하다 만 흔적들도 보인다. 날짜를 보니 3년 전의 기록들이다. 분명 내 글씨인데도 내용들이 묘하게 낯설었다.


다시 찾아서 열어보지 않은 걸 보면 그 안에 그리 중요한 내용은 없었나 보다.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마침 어제 주문해 둔 유기농 레몬주스가 막 도착했음을 알렸다.


노트를 식탁으로 가져와 자리를 잡았다.


아까 마시던 컵에 물을 추가해서 레몬주스를 소주 반컵정도 따라 섞은 후 표지부터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어떤 페이지를 보니 당시에는 잠을 설칠 만큼 고민했던 흔적들도 보였다. 지금 읽어보니 이 고민이 이렇게 진지하게 접근할 것들이었나 싶을 정도로 유치한 것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어떻게 해결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흐지부지 사라진 고민들이었으리라.


다른 페이지에는 구입할 식자재와 물품 목록이 있었다. 당시에 즐겨 먹었던 음식 종류와 브랜드가 적혀 있어서 자세히 보았는데 그중에 맛있게 먹었던 올리브유 제품은 지금 사용하는 노트에 그대로 메모해 두었다. 잊고 있던 취향을 다시 발견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또 다른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곳에는 조경업체의 연락처와 견적도 있고, 병원 예약 날짜도 메모가 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맥락 없는 다양한 내용이 적혀있지만 지금의 나와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끊어진 이야기들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비우기로 했다. 다시 펼쳐보지 않고 쓰레기통에 찢어서 넣었다. 3년 전의 묵은 이야기들이 구겨진 표지와 함께 현재에서 사라졌다.


좀 전에 마시려던 레몬수가 미지근해졌다. 냉동실에서 얼음 한 조각을 꺼내 퐁당 빠뜨리고는 티스푼으로 천천히 돌렸다. 투명한 얼음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톡 쏘던 기운은 가라앉고 부드러운 레몬 향이 난다.


시원하다.






거실을 중앙으로 안방과 세탁실이 일직선으로 놓여있다. 고양이 일곱 마리가 소파와 바닥에 깔아놓은 두툼한 이불 위에 누워서, 또 앉아서 빨랫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내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


애정결핍인 우리 고양이들. 녀석들의 끈적한 시선이 느껴진다.


두툼한 이불 위로 슬며시 끼어 누웠다. 일방이가 배위로 올라와서 천천히 그리고 진하게 눈을 깜빡인다.


비움 뒤에 찾아오는 바글바글한 풍경이 오늘따라 참으로 달콤하다.


비우는 기쁨은 든든하고, 비우는 가벼움은 개운하다. 하루에 하나씩 비우다 보니 이런 기분도 알게 된다. 채우는 것만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덜어낼수록 지금의 내가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딱 그 노트의 무게만큼.


"아구구 허리야."


찌릿한 허리에 마사지 패드라도 붙여야겠다.


오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