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방치해 둔 것들 ]
보지 않던 것을 보기 시작한 순간..
한쪽 눈을 살짝 떠 휴대폰을 보니 이제 막 6시를 넘어가고 있다.
전날 세탁한 이불 덕분일까. 웃풍이 도는 방 안의 공기가 차가운 줄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내내 포근함이 돌았다.
잠들던 순간의 기분이 아침까지 이어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스탠드 불빛이 침대 옆 테이블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휴대폰, 메모지와 펜 하나만 놓여 있는 테이블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다.
머리맡에 어수선하게 놓여있던 물건들을 싹 다 걷어냈다. 이제야 비로소 작은 공간에도 숨 쉴 여유가 생겼다.
잠시 그대로 누워 편안한 호흡으로 이 순간의 행복을 느낀다.
'아, 뽀송하다'
충분히 여유를 부린 뒤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컵에 마실까 고르며 찬장 안으로 손을 뻗었다. 녹색과 검은색이 섞인 문양의 입구가 넓은 전통 찻잔이 손에 잡혔다.
"오늘은 이걸로 마셔볼까."
냉장고에서 꿀에 절여놓은 생강을 꺼내 나무 스푼으로 크게 한 수저 떠내 잔에 담았다. 그리고는 주전자에서 뜨겁게 끓인 물을 따랐다.
한 번에 마시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찻잔이 손바닥에 기분 좋게 감겼다.
달콤한 생강 향이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시간의 주도권을 찾아오기 위해 주변을 비우기로 마음먹은 지 스무날쯤 되어간다.
하루에 하나씩 내 공간 밖으로 밀어내며 바람이 통하는 길을 내는 중이다.
다만, 급하지 않게,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다.
매일 하나씩 비우면서 보니 다 쓰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방치된 것들이 적잖이 보였다. 그런데 또다시 새것까지 꺼내 쓰면서 물건의 개수만 늘어나니 공간은 이중 삼중으로 어수선해졌다.
이제는 사용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면 인터넷 공유기, 밥솥, 로봇청소기, 컬러프린터 등도 모두 내보내지 못하고 몇 개의 계절을 그 자리에서 보내고 있었다.
때때로 계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기분이 드는 이유를 이렇게 또 하나 알게 됐다.
꺼져있는 TV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집의 사방을 왼쪽, 오른쪽, 앞, 뒤로 고개를 돌려본다.
'흠.'
방치된 것들을 먼저 소비하기로 했다.
그렇게 티가 날 듯 말 듯하게 곳곳에 무관심했던 여러 가지를 비워내고 있다.
몇 알 남지 않았던 영양제도 며칠 사이 흔들어도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다.
먼저 사용하던 액상형 트리트먼트를 손바닥에 '탁탁탁' 두드려도 더 이상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일주일 전에는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세 번째 칸 깊숙한 곳에서 잊고 있던 물건을 보고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문이 오래 열려 있다는 신호가 들렸다.
고무장갑을 벗어 양손으로 꺼내 들었다. 노란 뚜껑을 돌려 열어보니 인삼을 재워둔 줄 알았는데 꿀에 재운 생강이었다.
'아차'
애써 만들었던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햇생강을 사다가 겉껍질을 살살살 긁어내 얇게 썰은 후, 얼마 남지 않은 꿀단지에 채워 넣었던 걸 여태 한 번도 꺼내지 않고 내버려 둔 꿀단지다.
넣어 두었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두 해는 훌쩍 지난 것 같다.
용기를 바꿔 꿀에 절여진 생강을 다시 담아 냉장고의 두 번째 칸, 눈에 잘 띄는 앞쪽에 두었다.
생강꿀차를 듬뿍 떠서 따뜻한 물에 녹여 마시면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데 효과가 좋다. 오늘 아침에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조금씩 줄어드는 양을 보면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간다.
이대로라면 첫눈이 내릴 때까지는 달콤한 생강향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방치한 물건 찾아 제대로 사용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마치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무조건 버리는 게 아니라 쓸모를 다 한 후에 떠나야 그 빈자리가 허망하지 않을 것 같다. 나와 알게 모르게 같이 보냈던 계절들이 여러 해인데 되도록이면 가치 있게 보내고 싶다.
비움은 꽤 좋은 시도다.
무관심이 관심으로 바뀌는 시간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