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버리다

[ 8. 이 맛에 비운다 ]

by 시우경희

어느 날부터 커피 향이 사라졌다.




커피 원두가 떨어진 지 두 달쯤 지났다.


그 사이 집 안에 배어 있던 커피 향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커피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가끔씩 생각하는 그 향을 도저히 참기 힘들 때가 종종 생긴다.


'아직은 버틸 만 해.'


'다음 달에 주문해야지.'


'커피 말고도 마실 차가 서랍 속에 많이 있어.'라는 말들로 커피 원두를 주문하려는 내 손가락을 멈춰 세웠다. 이렇게까지 버틸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4년 전쯤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계절 내내 즐겨 마셨다. 얼음에 밴 커피 향이 천천히 풀리며 차갑게 굳힌 사탕을 녹여 먹는 듯한 쾌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음도 멀리하고 있다.


어느 날 옆지기가 물었다.


"아직 커피 내린 거 없어?"


"다음 달에 주문하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무늘보처럼 느슨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봄의 햇살 때문일까. 이제는 나도 원두커피의 향이 절실히 필요하다.


언젠가 동네 커피집에서 볶아내는 원두를 구입해 먹었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선택을 하는 바람에 먹는 내내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여러 경로로 구입한 원두도 번번이 잘 맞지 않았다.


맞다 '내가 편안해지는 향과 맛' 바로 그걸 찾는 게 쉽지 않았던 거다.


맞는 걸 찾기는 어렵지만 여러 실패를 거듭하며 한 사이트에서 발견한 초콜릿 원두를 맛보게 되었다.


우리 입맛에 적당히 맞는 걸 찾았다. 신이 났다.


그렇게 몇 개월 전까지 이곳의 커피를 즐겼다.


이제 다시 원두를 주문하려고 보니 찾기가 어려웠다. 광고 이미지와 상품명을 기억해 내려 애쓰면서 찬장에서 입구가 넓은 브라운 계열의 찻잔에 믹스 커피를 두 봉지를 뜯어 진하게 탔다.


'이래서 필요한 건 메모를 해 놔야 한다니까.'라고 자책하면서.


옆지기 전용인 믹스 커피 두 개를 탄 찻잔을 거실 테이블로 가지고 나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드디어 찾던 그 커피를 찾아 다시 주문할 수 있었다.


반가웠다. 물론 그 마음은 나뿐일 테지만 말이다.


마치 연락이 뜸했던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아낸 듯 이제는 그 친구와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기회를 얻은 듯했다.


어렵사리 주문한 원두가 오늘 아침 택배실에 도착했다. 택배실 문을 여는 손놀림은 언제나 가볍다. 상자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청포도 조각이 흐드러지게 올려진 생크림을 맛보기 전이랄까.


한 손으로 가뿐하게 택배상자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상자를 열자마자 원두의 깊은 아로마가 올라오더니 나의 코와 폐를 거쳐 뇌까지 흥분시켰다.


'이게 바로 겨울이지'


상자 안에는 주문한 원두와 메시지가 적힌 엽서 크기만 한 안내장이 들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한 번 휙 보고 버렸겠지만, 첫 문구가 눈에 들어와 왼 손으로 꺼내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에 정성을 담아 준비해 드리고 맛있게 드셨다는 한 마디를 들으면 "내가 이 맛에 커피를 하지" 하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스토어에서도 저희 원두로 내린 커피 한 잔이 단순히 커피가 아니라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준비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하 생략)


이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나의 눈길을 멈추게 한 건 '내가 이 맛에 커피 하지'라는 문구였다. 주인장의 속 마음이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 말의 진정성이 오늘의 커피 향을 더 짙게 만든다.


전동 커피 머신을 뒤로하고 수동 그라인더를 꺼내 주방 테이블 위에 놓았다. 원두가 담겨 있는 봉투를 열고 나무 스푼으로 듬뿍 담아 그라인더에 담으려다가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런.'


다시 봉투째 그라인더 입구에 가까이 가져가 살살 부어주었다.


바닥에 흘린 건 버리지 않고 손으로 쓸어 모아 주방 한 곳에 두었다. 방향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왼손으로 그라인더의 몸통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지. 이 향 때문에 내가 커피를 마시지'


그라인더에서 조금씩 분쇄되어 퍼지는 커피 향이 집 안 전체를 가득 채웠다. 돌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얗게 김이 서린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리는 겨울을 상상한다.


'아, 행복하다'


다행히 고양이들도 테이블, 소파, 침대, 데크, 상자 안에서 각자의 둥지를 틀고 단잠을 즐기고 있다. 주변 마저 보챔 없이 적당히 고요하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나지막이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눈을 뜨고 마저 그라인더를 돌리기 시작했다.


분쇄가 끝난 원두가루를 미리 준비해 둔 종이 필터와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렸다.


'쪼르륵, 똑 똑.' 커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어제 내린 봄 비의 흔적을 지워주는 듯했다.


라테 색의 머그잔을 가져다가 천천히 내린 원두커피를 담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잠시 올려두고 오늘 버리려고 마음먹은 회색빛 셔츠를 꺼내려 옷장으로 향했다.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이 맛에 비운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