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스티로폼 박스들 ]
조각내는 박자와 경쾌한 재즈의 리듬이 묘하게 엇박자로..
며칠 전 대문 앞에 커다란 택배 하나가 배달되었다. 스티로폼 박스인 걸 보니 생물인 것 같은데, 따로 주문한 게 없어서 우리 집으로 배송 온 것이 맞는지 이름부터 확인했다.
"어! 맞네!"
송장에 적혀 있는 주소의 잉크가 살짝 번지긴 했지만, 우리 집 도착이 맞았다.
가까이 보니 바닷가 근처에 사는 누나가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간간이 이렇게 커다란 선물을 보내주곤 하신다. 그 마음이 참 고맙다.
박스 밑동을 깊숙이 받쳐 들고 조심스레 현관으로 옮겼다. 안에 든 게 뭘까 궁금해하며 택배 전용 미니 칼을 선반에서 꺼내 열어보았다.
"우와, 세상에!"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 안에는 발그스레하게 잘 익은 홍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혼자라면 한 달은 내내 먹어야 할 양이고, 둘이서 보름 동안 먹어도 다 못 치울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요즘 도통 입맛이 없었는데 상자 안에 가득한 홍게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냄새를 맡은 나비도 아까부터 졸졸 따라다니느라 분주하다.
가장 위에 있는 홍게 다리를 '똑' 하고 갈라 살점을 빼내 나비에게 맛보기로 주었다. 이 녀석, 어릴 적 연어와 닭고기로 다져진 입맛이라 잘 익은 게살을 맛보더니 힘없이 풀려 있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리 나비, 뭐든 잘만 먹고 건강하면 그게 최고지.'
우선 오늘 먹을 홍게는 집에서 가장 큰 쟁반에 층층이 쌓아 한쪽에 챙겨두었다. 그러고도 절반 이상이 남았다. 그건 라면을 좋아하는 옆지기를 위해 한 마리씩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한 칸에 꽉 찬다. 그렇게 하고도 박스에 남은 홍게는 김치통에 담아 다음날 엄마에게 가져다 드리기로 했다.
식탁보를 대신해 깔만한 걸 찾느라 주방 서랍과 선반을 뒤적이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땐 신문지가 최곤데."
종이 신문을 본 지가 까마득하다.
"신문이요 -"
"우유, 요구르트 왔어요 -"
"찹쌀떡 메밀묵 - "
어릴 적 골목에서 들리던 정겨운 소리가 새삼 떠올랐다.
주방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가장 쓸모 있어 보이는걸 하나 골랐다. 재활용품 담아두려 챙겨두었던 커다란 비닐봉지다.
'이게 좋겠다.'
비닐을 그대로 펴면 한쪽이 중앙으로 모여있어서 활짝 펴지지 않기 때문에 가위로 그 부분을 잘라냈다.
그리고 비닐의 옆선도 잘라 면적을 두배로 늘리니 식탁에 딱 맞는 크기가 되었다.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니 기분이 좋았다.
소분을 끝내고 나니 옆지기가 집에 도착했다. 역시나 홍게의 양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서둘러 씻고 내려와서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홍게를 주방에서 쟁반채 들고 와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와 소주를 꺼내와 만찬을 즐길 준비를 마쳤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접시 위에는 홍게 껍질이 수북하게 쌓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홍게를 한 자리에서 먹어본 건 처음이다.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손이 쉽게 멈추질 않았다.
게딱지를 뒤집어 숟가락으로 열심히 파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집에서 하나씩 버리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구멍 난 속옷, 늘어난 티셔츠, 오래 묵은 영수증 묶음 등.
옆지기는 내 이야기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진 않는다.
그동안 버린 것들을 보니 주로 얼마 남지 않은 화장품, 헤어에센스, 섬유유연제, 구강청결제, 약통 등 잡다한 플라스틱 용기들이 많았다. 주로 화장대와 욕실용품들이다 보니 내 눈에만 걸리는 것들이다.
옆지기는 요즘 재밌게 보는 드라마 이야기를 듬성듬성 들려주었다.
"요즘 새로 하는 드라마인데 재밌더라.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 있잖아, 거기에 나왔던 사람. 그 누구더라.." 같은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상관없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으면 우리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난밤의 기분 좋은 포만감은 집 안 공기를 바꿔놓았고, 이상하리만치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주말을 이용해 오래전부터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플라스틱 수납 박스들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이미 많이 삭아있다.
먼저 휴대폰으로 재즈 음악을 틀었다. 오늘의 어깨 리듬을 맡기기에 적당한 곡이었다. 공구함에서 펜치를 찾아들고 수납장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딱, 따다닥.
펜치로 플라스틱을 조각내는 박자와 재즈의 경쾌한 리듬이 묘하게 엇박자로 어울렸다.
재즈 선율 사이로 플라스틱 꺾이는 소리가 섞인다. 손에 힘을 주어 비틀 때마다 수납장은 조각나며 커다란 몸통이 조금씩 작아졌다.
한참을 그렇게 잘랐다.
그동안 플라스틱 더미가 가려 놓고 있던 뒤쪽의 벽이 드디어 드러났다. 거뭇거뭇 곰팡이가 올라와 있어서 락스를 가져와 물에 희석해 벽에 잔뜩 뿌려주었다.
그대로 가만히 두면 서서히 곰팡이도 사그라들 것이다. 그때 다시 물청소를 하면 되겠다.
대문 입구 한쪽을 꽉 채우고 있던 플라스틱 쓰레기가 빠지고 나니 그 자리에 바람이 통하는 공간이 생겼다.
다 뜯어낸 플라스틱 조각들을 수거용 봉투에 담았다.
가벼워졌다. 오늘,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