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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Oct 06. 2024

춘천의 바람은 언제나 푸르길(3)

3편

* * * 

    곳곳에 벽화가 그려진 골목 속의 막국숫집은 인적이 드물었지만, 한층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운전 연수만 아니었다면 골목 구석구석에 그려진 벽화를 여유롭게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싶었다. 공영주차장이 넓어서 주차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식당에 들어서서 녹두전 하나와 막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여섯 살 때 지역의 맛집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막국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어째서 막국수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사업의 실패로 절망한 요리사가 마지막으로 ‘막’ 거침없이 만들어서 막국수라고 불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말장난으로 막국수는 왜곡된 기억으로 뇌리에 박혔다.

    스테인리스 쟁반에 담겨나온 국수는 어릴 적 머릿속으로 막 빚은 상상의 음식이 아니었다. 정갈하면서도 푸짐한 음식이었고, 참기름 향과 면 위에 새침하게 얹힌 오이채가 군침을 돌게 했다. 막국수를 대표할만한 지역에서 그것을 접한 첫인상은 길을 걷다 우연한 기회로 만난 귀인이었다. 인간의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삭막한 전쟁터와 같은 도로 위를 달리며 지쳐버린 나는 거칠어 보이는 면을 보자 불굴의 오기가 생겼다. 메밀로 뽑은 면이 주는 거친 질감을 느끼며 ‘막’ 가보자는 식으로 면을 빨아당겼다. 면을 강하게 흡입할수록 빚더미에 앉은 요리사의 절망과 극복의 신화를 떠올렸다. 마음대로 지어낸 음식에 얽힌 서사를 떠올렸을 뿐인데도 옹색한 기운을 벗어던지는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천천히 좀 먹어. 체하겠다. 여기 육수를 2초 정도 붓는 게 가장 절묘한 맛을 낼 수 있어. 다른 막국숫집에서 이런 육수는 구경하기 힘들어.”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교사가 직업인 아버지의 말에는 언제나 합리적인 근거와 경험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시키는 대로 육수를 따라 부었다. 생각지도 못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시원한 바람도 덤으로 창밖에서 흘러 들어왔다.

    “어, 이거 정말 괜찮은데요? 이상하게 끌려요.”

    “그렇지? 거기서 양념장을 한 숟가락만 더 넣어봐.”

    시큼하고 새콤한 맛과 어우러진 육수의 감칠맛, 거친 질감의 메밀면과 매끄러운 참기름이 조화를 이루며 혀를 적셨다. 최근 유행하는 달고 짠 과자처럼 재료의 단순한 물리적 합성과는 달리, 상반된 성격의 맛이 화합의 장을 펼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내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식사 때만큼은 인자하고 온화한 약사여래 같은 아버지였다.

    “녹두전도 함께 먹어. 녹두전만으로도 별미지만, 간장이 맛을 두 배로 증폭시켜주거든. 바깥쪽 바삭한 부분에다 전 가운데 연한 부분을 따로 떼어 얹혀서 먹으면 정말 기가 막혀.”

    식사가 끝나면 아버지의 약사여래 같은 모습이 야차처럼 변할까 두려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달콤한 시간 뒤에 맞닥뜨려야 하는 일과가 아버지의 독기 서린 교육이라 생각하니 몸서리쳐졌다.

    “자, 슬슬 정리하고 일어날 준비 할까?”

    “아버지, 너무 맛있는데 녹두전 하나만 더 시켜 먹으면 안 돼요?”

    “안 돼. 점심을 너무 많이 먹으면 운전할 때 졸음이 올 수 있어. 졸음과 싸우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는 고등학교 시절에 다 겪어 봤겠지? 아쉬울 때 털고 일어날 줄도 알아야 해. 진정한 맛은 돌아설 때의 아쉬움으로 완성되는 거 아니겠냐.”

    아쉬움에 식욕을 양보하고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거두리 쪽으로 넘어와 한산한 이면도로를 찾아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공방과 소담한 카페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카페마다 개성은 달랐지만 담박하며 귀여운 멋이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좁은 길에서 어떤 식으로 운전해야 하는지 직접 시범을 보이며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좁은 길을 운전하면서 충분히 발생할 법한 어려운 상황을 여러 갈래로 나누며 직접 대처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맞은 편에서 차량이 올 때 어떻게 비켜주어야 하는가, 도로 가 쪽에 차를 어떻게 옆으로 붙일 것인가, 교차로에서는 어떻게 통행해야 하는가를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덧붙여 주차된 차량을 지나갈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며, 언제든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듣기만 해도 아찔한 상황을 생각하니 운전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땅속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지렁이처럼 올라왔다. 모든 시범이 끝나고 자리를 바꿀 차례가 되었다. 심호흡조차 할 새 없이 곧바로 자리를 바꾸어야 했다. F1 경기를 보는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막국수의 ‘막’이란 글자를 떠올렸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조수석을 박차고 일어났다. 차창 밖, 벤츠와 포르쉐 차량 사이로 트인 주차공간을 낯선 손가락이 가리켰다. 아버지의 손가락은 내가 모르는 새 수많은 가닥으로 주름 잡혀 낯설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시절, 흘러나오는 노래의 반주만 듣고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빨리감기’ 버튼을 눌렀다. 이쯤이면 다 끝났겠거니 하며 버튼을 눌렀는데 여전히 그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욱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진부할 것만 같은 그 곡의 멜로디에 어느덧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세렌디피티. 살면서 끝을 알 수 없는 인생의 조각들을 거닐며 적절한 시기에 발견하는 우연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설렜다. 지금, 이 순간 과감히 ‘빨리감기’ 버튼을 꾹 눌러 아버지에게 선수를 쳤다.

    “뭐, 저 사이로 주차하라는 건가요?”

    “그래. 할 수 있겠냐?”

    여간하여서는 상대방의 의지를 물어보지 않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시원한 주스를 담은 병이 상온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것처럼 아버지는 식은땀을 보였다. 많은 사람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상온에서 더는 땀 흘리지 말라고 몸소 일깨워주고 싶었다.

    “하면 되죠. 아버지가 잘 가르쳐주셨으니 그대로만 하면 되겠죠.”

    과감히 포르쉐 차량 옆으로 차를 붙였다. 배운 대로 핸들을 들어가려는 방향으로 틀고 서서히 풀면서 들어오다 반대로 다시 핸들을 돌렸다. 한 번 만에 수정 없이 이룬 성공이었다.

    “잘했다. 다시 빠져나가자. 한 번에 주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부분 지금과 같지는 않을 거야. 한 번의 성공보다는 실패를 수정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걸 기억해둬라.”

    운전 연수란 피상적 상황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놓고 내뱉는 말인지 의심이 들었다. 내 지능이 낮았을 때, 아버지는 뭐든지 천천히 알기 쉽고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나의 인지가 어느 정도 차올랐을 무렵부터 아버지와의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한 마리의 독수리였다.

    미국의 콜로라도 협곡에 사는 독수리들은 가시나무 나뭇가지로 둥지를 만든다. 처음에는 가시 위에 깃털을 올려 자식들이 찔리지 않게 조치한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깃털을 치워서 자식들을 가장자리로 내몬다. 독수리는 자식이 홀로서기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질게 대했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불편한 과거가 있었다. 춘천에 나를 데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의 떳떳하지 못한 일부분을 떼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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