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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Oct 10. 2024

춘천의 바람은 언제나 푸르길(완결)

7편

* * *


 “오늘은 이쯤하고 닭갈비나 먹으러 가자. 가는 길에 좌회전, 우회전도 많이 해보고.”

    춘천은 예전부터 유명했던 닭갈비의 고장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제멋대로 직조하여 이름 붙인 ‘막국수 정신’으 로 무장하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마음을 가볍게 먹으니 어떻게든 과제 를 수행하는 힘이 생겼다. 아스팔트로 덮인 도로 위에 가이드라인이 형광으로 그려진 것만 같았다. 신호를 받아 매끄럽게 좌회전을 했고, 저절로 풀어지는 핸들의 복원력도 이용해 보았다. 매번 핸들의 복원력처럼 인생의 난관도 손을 놓을 때 알아서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좌회전을 성가시게 하는 가장 큰 방해물은 A필러였다. 유도선이 그것에 가려져 시야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 개의 좌회전 차로 중 가운데 끼어 있을 때면, 양쪽에서 나란히 주행하는 차들을 신경 써야 했다. 끼어들기 못지않게 무서웠다. 좌회전을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레 우회전 연습을 하고 싶어졌다.

    우회전은 별다른 신호 없이 알아서 갈 테면 가보라는 식으로 나를 대했다. 사고가 나면 과실이 더 큰, 사고가 나더라도 운전자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당당하 고 뻔뻔한 우회전은 또다시 좌회전을 그립도록 찾게 했다. 좌회전과 우회전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까짓거 별거 있나. ‘막’ 하자는 생각에 따라 핸들에 몸을 맡기며 운전을 하니, 아버지의 입도 찰흙으로 ‘막’힌 구멍처럼 합죽이가 되었다.

    “남춘천역 근처에 풍물시장이 5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데, 오늘은 열리는지 몰라. 시장 맞은편에 맛있는 닭갈빗집이 있어. 그 집 닭갈비는 양념과 볶음밥이 일품이지. 달큰한 맛도 있으면서 짜고 맵기도 하거든. 마늘과 생강도 들어갔을 거야. 특히 볶음밥은 꼭 먹어야 해. 일반적인 볶음밥과 달리, 그 집 볶음밥은 볶은 후에 얇게 저미어서 철판에 눌린 다음 헤라 같은 걸로 긁어내거든. 그러면 신기하게도 바삭하게 눌어붙은 밥이 돌돌 말려 올라오는데, 그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바삭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아까 그 녹두전 맛의 원리와 같은 거야. 그리고 너도 같이 간 적이 있어.”

    “저는 기억이….”

    “당연히 안 나겠지. 임용시험 하루 전날 널 뱃속에 품은 엄마랑 함께 갔으니까. 그땐 기간제 교사로 일했을 땐데, 불안정한 형편 때문에 시험에 붙길 간절히 바랐지.”

    평일의 한산한 시간을 택해서 식당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웃으며 닭갈비를 손수 볶아 주었다.

    “아주머니, 저 기억하세요? 제가 학생일 때 여기 아내랑 정말 많이 왔었는데. 저희는 지금 서울에 살아요.”     “그려?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옛날엔 지금보다 학생들이 더 많았지. 허허. 그럼 와이프는 어디 가고 아들이랑 둘만 왔어?”

    “집에서 쉬고 있어요. 저는 치료가 필요해서 병원에 왔어요. 아들은 제 간병 인이구요.”

    “어이구, 어디가 그리 아프길래? 서울에 좋은 병원이 많은데 뭣 하러 여기까지 와?”

    “그렇긴 하지만 서울에서는 못 고쳐요. 이거 이제 다 익은 거 맞죠? 이야기하 다 보니 순식간에 익어버렸네요.”

    “급하긴, 아직은 아녀. 겉 부분만 보면 익은 것처럼 보여도, 속은 아직 덜 익 었어. 이거 봐 속이 아직 발갛지? 일단 떡부터 잡숴.”

    아버지의 말을 통하여 춘천으로 나를 데려온 이유가 명확히 밝혀졌다. 아들의 운전 연수 및 병원 치료라는 목적으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아주머니가 나무 주걱으로 철판 바닥을 휘적거리며 볶아대자 기름기가 흐르며 음식에 윤이 났다. 닭기름은 풍미를 돋우어주었다. 푸름은 쪽에서 나오지만, 쪽보다 푸르다는 말이 떠올랐다. 닭갈비 맛은 나무 주걱을 휘적이는 기술에서 나오지만, 나무 주걱보다 맛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속담을 마음속으로 지어내며 웃었다.

    아주머니와 구면인 척 말을 거는 행동이 더욱 신경 써 달라는 의미에서 부린 아버지의 가식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엄격하고 융통성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가 보인 서글서글함은 새로운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화제의 볶음밥은 아버지의 표현대로 정말 맛있었다. 내겐 농담하지 않고 항상 몰아붙이기만 하는 아버지가 한 번쯤은 춘천의 산들바람처럼 친근하고 포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닭갈비에는 소주가 딱인데. 우리 한 잔만 마실까?”

    “차 몰고 왔잖아요.”

    “에이. 여기 주차장에 두고 그냥 걸어가면 되지. 숙소까지 한 이십 분이면 걸어가.”

    “여기 장사하는 곳이에요. 학교 선생님이 선생님답게 행동하셔야죠. 무슨 무협 소설에 나오는 호방한 협객도 아니고. 오늘따라 왜 이래요?”

    우리 부자는 연거푸 가볍게 잔을 기울였다. 아버지와 단둘이 술을 마셔본 적은 처음이었다. 술기운이 적당히 얼얼해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면, 아버지는 편의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가자고 철없는 아이처럼 졸랐다. 아버지도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아들과 나란히 아이 스크림을 먹는 것이 경박하다고 여기며 더운 날에도 내가 먹는 모습을 멀거니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던 아버지. 항상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아버지는 근본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체통을 지키느라 내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편의점에서 아버지는 쌍쌍바를 하나만 사서 반을 뚝 떼어 주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에 두 개의 막대가 꽂혀 있어서 하나로 나눠 먹기 좋은 아이스크림이었다. 저녁 빛깔은 짙은 청람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어둠은 청람색 빛깔에 잠시 자리를 양보했다. 선선한 푸른 빛 바람이 불어와 콧등을 적셨다. 눈에 티가 끼었는지 따뜻하고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일주일간의 운전 연수는 아무런 사고 없이 막을 내렸다. 막막했던 하루하루, 두려웠던 순간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계획한 운전 연수 코스 덕분이었다. 종합운동장 쪽의 호수를 따라가며 음악을 들었다. 호수의 잔물결 이 레코드판처럼 돌아 음악이 재생되게 하는 길을 열어준 것 같았다. 구봉산을 차로 달리며 우연히 만난 베이커리 카페에서 빵에 대하여 한 시간 동안 토론했다. 김유정 문학촌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셀카봉을 사서 셀프 카메라를 찍었다.

    다음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은 운전에 능숙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지워버렸다. 두려움은 나도 모르게 어느새 녹아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두려움이 설렘에 자리를 내준 덕에, 춘천에서의 시간은 유독 빨리 흘렀다. 마지막 날의 목적지는 무섭기로 소문난 스카이워크로 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가 먼저 꺼낸 병원이란 단어는 자식으로서 흘려듣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으로 줄곧 마음에 남아있었다. 결국 마지막 날의 목적지는 병원으로 정했다. 닭갈빗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어디가 아픈지, 어느 병원으로 갈 예정인지 곧바로 물어보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버지와 그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병원에 안 가요?”

    “병원? 무슨 말이냐?”

    “닭갈빗집 아주머니한테 병원 때문에 왔다면서요. 저는 간병인이라고까지 말했잖아요.”

    “아하,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다 치료했거든.”

    “병원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치료해요. 그나저나 어디가 아팠던 거예요?”

    “춘천 자체가 병원인데 가긴 어딜 가? 시원한 바람도 쐬고 막국수도 먹으면서 치료했지. 너도 춘천에 와서 지금까지 간호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버지는 인생의 목표를 나의 독립으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하나의 목표에만 몰두하면 놓치는 게 있지 않을까. 본인이 놓쳤던 부분을 통해 자신이 환자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여기 와서 들렀던 모든 곳은 내가 엄마 배 속에서 쉬고 있을 때 왔던 곳이라고 한다. 함께 지나온 발자취를 거닐면서 아버지는 인생이란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된 부분을 유화 물감으로 덧칠하러 온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춘천의 푸른색 바람으로 덧칠하면 좋겠다.


[강원문단 창간호(2021) 발표작. 등장인물의 이름만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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