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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Oct 20. 2024

[빋](2)

2편

● 전개 - 활동2

    영국인 사이에서 넬슨 제독의 위상은 이순신 장군의 그것과 거의 흡사했다. 프랑스로 건너가기 위해 유로스타 열차표를 끊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툰 역사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다. 둘 사이를 하늘길로 이은 것도 모자라 해저를 뚫어서 연결된 길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해저 터널이 뚫린다면 국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빗살의 간격만큼 눈을 뜨고 감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국경을 넘어 프랑스의 지하철역에 와 있었다.

    다음 날, 지체하지 않고 곧장 파리의 랜드마크인 에펠탑으로 향했다. 철제 조형물은 멀리서 볼 땐 녹슬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주된 관광 수입원을 녹슬게 놔두겠냐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에펠탑 근처를 하릴없이 배회하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헤이! 웨얼 아 유 프롬?”

    기다란 말채 생화를 떠오르게 만드는 남성 한 명이 긴 다리를 교차하며 오는 모습이 흡사 타조 같았다. 내 또래처럼 보였다. 그의 양손에는 에펠탑 모형 열쇠고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코리아.”

    “오우! 앙뇽핫쎄요!”

    온통 불어로 가득한 프랑스에서 처음 듣는 어설픈 모국어였다. 인적 드문 시간대, 짐승 소리가 아슴아슴 들려오는 산속에서 등산객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는 열쇠고리 하나의 가격이 2유로라며 연신 한 손으로 치렁치렁 흔들리는 에펠탑을 가리켰다. 그가 자본주의적 미소를 하얀 이와 함께 드러냈다. 나 역시 자본주의화가 돼 있어서일까. 약간의 바가지가 있더라도 하나쯤은 사줘도 되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이것 말고, 혹시 화이트 에펠은 없나? 버튼을 누르면 반짝거리는.”

    “당연히 있지. 이건 귀한 거야.”

    나는 주섬주섬 배낭에 걸어둔 빗을 내밀었다. 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이걸 줄 테니, 일반 에펠탑 가격으로 화이트 에펠을 살 수 있을까?”

    “그게 뭐냐? 나한테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한국 전통의 얼레빗이야.”

    그는 껄껄거리며 호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자신은 대머리라서 필요 없을 것이라 하며, 노 젓듯 손을 저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혼인을 허락할 때 빗을 주고받았어. 나중에 함께하고픈 사람이 있다면 선물해줘도 될 것 같은데.”

    그는 고민하다 조용히 빗을 받았다.

    “오케이, 코리안. 그렇게 하지. 저기 에펠탑 뒤편으로 가본 적 있나?”

    “고맙다. 뒤편은 왜?”

    “뒤편에 다리가 있어. 다리를 지나면 트로카데로 광장이 나오는데 구경할만해.”

    “나는 나폴레옹이 묻힌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으로 가려고 해.”

    “흐음, 거긴 가면 안 돼. 뭣 하러 죽은 사람 묻혀 있는 곳을 가나. 여행을 왔으면 트로카데로로 가야지. 게다가 그 옆에 파리 수족관도 있어. 보나파르트 같은 독재자는 나중에 봐도 늦지 않아.”

    “당신은 나폴레옹을 존경하지 않는가?”

    “난 보나파르트가 싫어. 당시 얼마나 많은 군인이 죽었나. 그는 폭군이야. 괜찮다면 내가 그곳까지 안내해도 될까?”

    광장까지는 바로 코 앞이라 혼자 가도 상관없었지만, 나폴레옹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와 나란히 걸었다. 다리까지 가는 길은 나폴레옹을 욕하는 말로 도배되었다.

    다리는 센강(Seine River)을 가로질러 광장과 에펠탑을 연결하고 있었다. 레고 블록이 떠올랐다. 강 물결은 투명한 블록. 다리는 그 위에 박힌 상아색 블록. 교직 생활을 하며 쌓인 기억의 조각도 레고 블록과 같이 쉽게 떼었다 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가 이에나 다리야. 1814년에 지어진 다리지. 그때가 언제인지 아나?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 간 해야. 나폴레옹의 운은 그때부터 확실히 추락했지.”

    “당신은 프랑스인이면서 왜 이토록 나폴레옹을 싫어하지?”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다리 난간에 양팔을 껴안듯 올렸다. 센강의 물결이 햇살에 부닥쳐 반짝였다. 강을 바라보는 그의 촉촉한 눈을 보고서, 나도 자연스레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넋 놓기 시작한 지 오 분 정도 흘렀나? 그가 이윽고 입을 뗐다.

    “방금까지는 싫었고, 지금은 나폴레옹이 좋아졌어. 흐흐.”

    초승달 모양의 하얀 이가 마음 어딘가를 알 수 없는 색으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가 흘러가는 대로 시선을 옮기자 사람들이 실뭉치처럼 삼삼오오 뭉쳐서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가보지 않겠나?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참! 내 이름은 레오다. 네 이름은?”


스펀지를 덮은 컵이 눈으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 돌고 돌았다. 야바위꾼이 컵을 다 돌리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뚫어져라 쇠컵을 쳐다보던 앞 사람은 자신 있게 정답이 아닌 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걸 왜 틀리고 있지? 본전을 찾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앞 사람은 연달아 컵을 잘못 골랐다. 순식간에 오륙십 만원이 증발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판돈을 다 잃은 사람은 손을 털고 난색을 하며 구경꾼들 사이로 물러났다.

    녹색 정장 차림의 야바위꾼은 줄곧 서 있던 내게 게임 참여를 권했다.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야바위꾼은 다른 사람을 물색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다른 사람이 뒤이어 도전했다. 마음속으로 나 역시 참여하여 답을 찍어 보았다. 첫 번째 문제, 정답. 두 번째 정답. 세 번째, 역시 정답.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두 정답! 이런, 이건 꼭 해야 한다.

    “나도 할래요!”

    옆에 있던 레오가 못 하게 제지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야바위꾼 앞으로 당차게 나갔다. 쉽게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기가 살짝살짝 흘러나왔다.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야바위꾼도 연갈색 콧수염을 날름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와라와라-와아라-와라! 야바위꾼의 알 수 없는 주문과 함께 쇠컵은 순환선을 타며 자리를 옮겨갔다. 손은 느렸고, 덩달아 컵도 느렸다. 안에 있는 스펀지는 더욱 느렸을 것이다. 정답이라 생각한 컵을 손으로 가리키자 야바위꾼은 바꾸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너무나 확실하게 눈으로 봤기 때문에 나직한 목소리로‘노’를 말했다.

    짜-안! 소리와 함께 들어 올려지는 컵. 내가 찾던 스펀지는 증발했는지 자취를 감추었다. 졸지에 100유로가 날아갔다. 한 판 더 했다. 짜-안! 소리와 함께 잃었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집단으로 계획된 속임수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말을 걸었던 사람들, 야바위를 하기 전 돈을 잃은 사람들 모두 한패였다. 속임수에는 상대방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마술의 원리가 적용되었다. 무엇보다 한심한 일을 벌인 자신에게 울화가 치밀었다.

    “돈 돌려줘요. 두 번째 컵에 공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면 누가 봐도 사기 아닙니까.”

    “웃기는군. 본인이 먼저 돈을 걸지 않았나. 거꾸로 생각해봐. 네가 맞혔으면 우리 돈을 안 가져가겠나?”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그들이 계속 행인들을 불러들일 때마다, 미친개 마냥 훼방을 놓았다. 사기단은 총 다섯 명, 그들이 나를 둘러싸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려달라 소리 질러 상황을 정리했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고선 200유로를 땅에 내동댕이치며 다른 장소로 사라졌다.

    여느 여행객처럼 바토 뮤슈를 예약하고, 꼬릿꼬릿한 치즈 향을 마시며 카페테라스에서 카페라테를 음미했다. 돈을 되찾았다는 기쁨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바닷가재 요리를 배불리 먹고 숙소로 향했다. 내일은 몽마르트르 언덕을 가볼까나, 호기를 부리며 들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뾰족하면서도 묵직한 물건으로 내 뒤통수를 힘껏 쳤다. 손에 쥐고 있던 내 화이트 에펠이 땅바닥으로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 전개 - 활동3

    눈을 뜨니 나무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홍콩 누아르 영화에 나올 법한 자욱한 담배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칙칙한 창고 안, 야바위꾼들이 팔짱을 끼고 있었고, 에펠탑 열쇠고리 뭉치를 오른손 검지에 끼고 잘그락거리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넌! 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고개가 한쪽으로 맥없이 꺾였다.

    “아프지? 하하하하.”

    “기생충 같은 놈….”

    “뭐라고? 아직 입은 살아있나 보네. 이딴 물건이랑 에펠탑을 바꾸자고 하는 네가 기생충이지. 에펠탑 맞고 기절한 녀석아. 퍽치기 경력 5년 동안 그렇게 쉽게 쓰러진 건 네가 처음이다.”

    레오는 턱에 힘을 주며 내가 준 얼레빗을 부쉈다. 제기랄, 에펠탑이었다. 뾰족하면서도 묵직한, 게다가 차갑기까지 한 물건. 이놈들이 자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에펠탑을 그리 활용하지 않았을 텐데. 골때리는 녀석들한테 의미 없는 죽음을 맞겠거니, 이런 놈들과 나폴레옹 이야기를 하려 했다니, 하는 생각이 극도의 허망함을 불러일으켰다. 레오의 접근과 화이트 에펠탑 구매. 일련의 사건에는 부장님이 그물코처럼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부장님, 그만 사과하고 넘어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보니까 이상한 사람 같던데. 더 상대하다간 봉변당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물러날 수 없어. 억지 민원에 교육이 휘둘려서야 되겠어?”

    “…”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이내 부장님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려고 애쓰셨다.

    "혹시, 런던에 가봤어? 공개 수업 때 보니 영어는 꽤 잘하는 것 같던데."

    "런던이요? 아직 안 가봤어요. 거긴 왜요?"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서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어. 해전으로 나라를 지켰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일까? 넬슨 제독과 이순신 장군은 너무나 다른 사람인데 말이야. 거북선 프로젝트는 런던에서 처음 떠올린 거야."

    "아, 그렇군요."

    “그리고 런던도 좋지만, 런던 옆 동네 파리엔 꼭 가보길 추천해. 자유롭고 상쾌한 그 공기를 잊을 수 없어. 그리고 런던에서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거기서 우연히 정리했지. 한 가지 재밌는 이야기 해줄까? 거기서 화이트 에펠을 샀는데, 행상인들 사이에서도 그 물건은 희소해서 비싼 가격에 팔려. 그걸 우리나라 전통 빗이랑 바꾼 거야. 난 운이 좋았지.”

    “우와, 그래서 선생님들께 빗을 선물하신 거였군요.”

    “그래, 빗을 가지고 다니면 행운이 따르는 느낌이 들어. 다음에 파리 여행 갈 때 빗 하나 들고 가봐. 혹시 화이트 에펠보다 더 귀한 거랑 바꿀지 누가 알아?”


    “우린 이탈리아 범죄 조직이다. 얘들아, 우리 업무를 방해한 죄를 물을 시간이다.”

    “잠깐, 레오! 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펠탑 뒤편에서 했던, 그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끌어보자는 심산으로 레오에게 아무 말이나 휙휙 던졌다.

    “또 나폴레옹? 됐고, 시간 아까워. 얘들아, 어서 처리해.”

    “잠깐! 날 봐준다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야.”

    “대장,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데요? 그냥 처리하죠.”

    무리 중에서 가장 비중 없어 보였던 바람잡이 녀석이 나섰다. 왠지 저 녀석이 나서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나 들어보자. 뭐가 도움이 된다는 거지?”

    살기 위해 막 던진 말에도 혹시 모를 실익을 짚고 넘어가는 레오의 치밀함을 보았다. 여기서 함부로 입을 열다간 개죽음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기를 빼고, 무미건조하고 덤덤하게 말해야 했다.

    “내 직업이 뭔 줄 알아?”

    “뭔데?”

    “초등학교 선생이야.”

    “그게 뭐 어쨌다고? 넌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고, 우리는 그걸 돌려주는 것뿐이야. 200유로만 우리에게 고스란히 넘겼어도 이런 일은 없잖아?”

    레오는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말을 받았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교육마술이란 걸 7년 동안이나 했어. 취미로 마술사 자격증도 땄다고.”

    “또 뭔 얘길 하려고?”

    “야바위도 마술과 원리가 같아. 사람의 혼을 빼놓고, 그 틈에 조작하는 거지. 네가 방금 부러뜨린 빗을 이리 줘봐. 어서!”

    레오는 흥미를 느꼈는지 안색을 바꾸며 정장 차림의 야바위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바위꾼은 두 동강이 난 빗을 주며 밧줄을 풀었다. 변검술사의 기술처럼 눈 깜짝할 새, 두 동강이 난 빗은 하나로 붙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두 동강 난 빗을 꺼냈다. 레오 일당은 재주 부리는 곰을 보는 마냥 넋이 나갔다.

    레오는 몸소 일어나 내 손목에 선명하게 새겨진 밧줄 자국을 어루만지며 프랑스어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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