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이례적으로 겪는 평일의 휴가에 차질이 생겼다. 레오 일당과 한통속이 되어 바람잡이 임무를 수행했다. 어수룩해 보이는 행인들을 사탕발림으로 꾀어 이에나 다리까지 몰고선 야바위에 동참하게 했다. 레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기회를 엿보다 도망가야겠거니 했지만, 섣불리 나서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당할 게 뻔했다. 그들의 범행에 일조하며 쌓인 죄책감이 양심을 짓눌러 왔다. 호구 같은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인 이익은 하루 평균 4,000유로.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 560만 원이었다.
“이봐 킴! 너 되게 재능이 있어. 교사보다 벌이가 괜찮지 않아?”
모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범죄 조직을 상대로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돈 때문에 한 일이 아니었어. 어쨌거나 레오. 교직 생활 중 진 빚이 있는데, 갚고 다시 와도 될까?”
“안돼. 한국으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무하군… 너랑 나폴레옹 이야기만 안 했어도….”
“킴, 솔직히 나폴레옹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때 나폴레옹을 욕한 건, 네가 앵발리드로 못 가게 하기 위해서야. 갔다면 야바위를 안 했겠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한테 당장 도움이 되어야 훌륭한 인물이지. 네 고민은 잘 들었어. 하하하.”
호방한 웃음은 센강의 물살 소리를 덮고, 다리 주변을 떠들썩하게 했다.
“헤이, 재패니즈? 한 게임하고 가.”
레오가 이야기하다 말고 행인을 불렀다. 자세히 보니 한국인이었다. 유럽인들의 시각에선 동양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보이는 걸까. 한인 부부는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듯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시나리오에 따라 레오 일당은 돈을 잃고 따는 일을 반복했다. 한인 부부는 지갑을 뒤적이며 100유로를 꺼내 들었다.
100유로를 잃고 또 200유로를 잃고, 한인 부부는 정신을 못 차리고 또다시 지폐를 꺼내려 했다. 옆에서 나는 계속 한인 부부의 얼을 빼놓아야 했다. 여기까지 나를 이끈 건 어떤 질문이었는가. 모든 신경이 그 질문에 쏠리자, 1592년 왜적의 침입 당시, 함께 고락을 겪어온 백성을 괴롭힌 부왜인들의 혼이 척수를 타고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띠이-잉 도르르르! 쇠컵이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주변의 잡음을 뚫었다. 있는 힘껏 코발을 휘둘러 센강으로 컵을 날려버렸다. 사방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나는 하나의 소실점이 되었다.
“정신 좀 차려요! 외국까지 와서 사기나 당하고 있을래요?!”
예상치 못한 짐승이 갑자기 튀어나온 듯, 모두가 얼어붙은 사이 야바위꾼의 크로스백을 가로챘다. 그리고 열심히 내달렸다. 도망가면서 망설임 없이 가방 속 돈을 공중에 뿌렸다. 한인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푸다닥 날아가는 트래펄가 광장의 새 떼처럼 돈은 나풀나풀 춤을 췄고 레오 일당은 차도까지 침범해 가며 흩어진 돈을 줍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레오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잭나이프를 빼 들고 나를 쫓아왔다. 일부러 트로카데로 광장 반대쪽으로 향했다.
등 뒤로 서슬 퍼런 칼의 기운이 등을 간지럽혔다. 운동신경은 더욱 날카롭게 서서 내 능력치를 끌어올렸다. 내가 빨라진 만큼 레오도 그 이상으로 빨라졌다. 나를 잡느냐 놓치느냐의 문제는 레오에겐 생존의 문제였다. 굶주린 사자 정도가 아니라, 사냥감을 잡지 못하면 바로 즉사해버린다는 전제 아래 뛰는 맹수가 아니었을까.
뛰다 보니 이름 모를 다리 몇 개를 지나쳤다. 일직선만 달리다가 결국엔 따라잡힐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들어갔다. 녹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시야는 트였지만, 숨이 턱턱 막혀 소리칠 수 없었다. 플랜B를 구상해보았다. 칼을 든 자를 상대로 한 계획은 상상만으로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녹지의 평화를 즐기는 군중 속에서 각자의 사정으로 허겁지겁 뛰고 있는 절박한 어린 양 두 마리. 단지 술래잡기하는 어른아이 정도로 보일 뿐이었을까. 아무도 우리의 술래잡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콰당. 앞 사람과 부딪혀 넘어졌다.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했으나 발목이 삐었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섬뜩한 웃음을 만면에 띠고 레오는 걸어왔다. 오른손에 쥐어진 잭나이프의 끄트머리는 야속하게 반짝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감히 도망을 쳐?”
● 정리
숙소로 돌아와 짐을 쌌다. 두 동강 난 얼레빗을 파리에 버리고 가야 할지 고민되었다. 한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이틀 치의 일정을 한나절 안에 소화하려고 하니 몹시 피곤했다. 프랑스 초등학교 교사와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몽마르트르의 예술인과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놀라웠던 건, 프랑스 예술인들 사이에서 침략자 히데요시는 우키요에의 대가 호쿠사이보다 인지도가 떨어졌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창가 쪽 자리가 늘 좋게만 느껴졌는데…. 안대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감든, 눈을 뜨든 사실 눈앞이 캄캄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귀찮은데 눈을 감지 말까,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감기로 했다.
레오의 잭나이프 날이 섬광처럼 빛나며 내 몸에 박히려던 순간, 어떤 사람과 부딪혀 넘어졌다. 허겁지겁 포복하며 전진했다. 죽어, 라는 한 마디가 먼저 등짝 한가운데 꽂히려 할 때, 레오는 털썩 주저앉더니 쓰러졌다. 나 역시 축 늘어진 채로 아무런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이봐요, 다친 데는 없어요? 눈 좀 떠봐요.”
경찰 복장의 젊은 사람이 의식을 확인했다. 나랑 부딪혔던 사람이 경찰이라니. 쌤통이군.
“레오는?...”
“전기충격기로 제압했습니다. 앵발리드 앞에 경찰서가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네요.”
입가에 보조개가 절로 지어졌다. 앵발리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도면밀한 레오의 시야에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나 보다. 너무 한 곳만 집중하다 보면 봐야 할 부분을 놓치는 게 아닌가. 풀리지 않던 물음을 둘러싼 막막함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갔다.
교장 선생님은 프로젝트 수업 물품 구입을 결재하기 전 나를 불렀다. 쉽지 않은 길을 걷겠다면 응원하겠으나, 다시 신중히 생각해보길 바란다고 하셨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결재를 부탁한다고 말씀드리고선, 곧바로 교실로 돌아가 성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성제 담임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프로젝트 수업은 그대로 진행하려 합니다. 그리고 사과할 마음도 없다는 걸말씀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선생님, 하… 어이가 없네요. 이제 막 나가자는 건가요? 내일 당장 학교에 찾아갈 테니 각오하세요.”
“영국 사람들이 넬슨 제독에 관한 교육을 프랑스 눈치 보면서 하던가요? 아니면 프랑스 사람들이 혁명기 당시 자국을 쳐들어왔던 나라들 눈치 보느라 나폴레옹을 안 가르치던가요? 규모로 따지면 매년 열리는 여수 진남제가 청계천에 작은 거북선 모형 띄우는 것보다 훨씬 클 텐데요, 그건 되고 청계천은 왜 안 되죠? 이순신을 소재로 하는 축제는 전국을 아우르고 있고, 개수만 12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단체는 어떻게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축제를 앞장서 만들려 합니다. 그걸 추진하는 단체는 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단체인가요?”
“이봐요, 튀는 행동으로 나중에 정치라도 하려고요? 능력도 없던 부패한 나라, 먹힐 만했던 나라가 일본을 이겼던 역사를 뒤적이며, 자기반성 없이 정신 승리하는 거 아닌가요?”
“정신 승리까지… 속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더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맘카페에 있는 저에 대한 글, 내리지 않으시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학부모가 자기 자식이 대학 입시에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헷갈려서 한 문제 틀린 걸 이순신 탓으로 돌리며 억지 민원을 넣었다고 언론에 제보하겠습니다.”
“아니! 선생님! 증거 있나요? 명예훼손인 거 아시죠?”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너무나 많은 제보자가 사진 자료, 녹음파일과 함께 학부모님의 속마음을 폭로했습니다. 교수도 아니면서 교수인 척 거들먹거리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며 연락을 주셨죠.”
“…”
“참! 성제 형 이름이 민제였죠? 예전에 똑같은 수업으로 이혜진 부장님을 폭행하셨죠? 그때 그 상황을 휴대폰에 남겨두었습니다. 화장실로 도망치려다 말았는데, 어머니로선 아쉽게 되었네요. 아무 잘못 없는 부장님만 징계받으시고 다른 학교로 근무지까지 옮기셨죠. 가능하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일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 연락처에 있는 목공소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부장님께서 예전에 알려주신 번호다. 거북선을 만드는 데 쓰이는 합판과 물 위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모터를 주문했다. 그리고 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여보세요 소리에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부장님의 넘어진 모습이 내 의식 속에서 앞으로는 배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두 동강 난 얼레빗을 버려야겠다. 그리고 서툴겠지만, 공방에서 빗 하나만 만들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