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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Sep 29. 2024

춘천의 바람은 언제나 푸르길(2)

2편

* * *

    저물녘 햇살이 생명력을 다하여 식어가는 숯불처럼 붉은 기운을 낼 즈음 춘천에 도착했다. 나는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아버지의 어떠한 결심이 춘천이란 지명에 모종의 빚을 진 것이 아닐까. 잠자리가 바뀌면 아무리 시설 좋은 호텔이라도 불편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춘천행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라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길을 돌리자고 말할까 망설였지만,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 안에서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잠깐 자랐다고는 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장소. 지각이 생기고 나서 처음 보는 춘천은 한 폭의 아름다운 유화였다. 채도가 낮은 노랑과 연분홍빛으로 옅게 칠해진 온화한 세상이 펼쳐졌다. 그 어떤 불쾌함도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움이 청명하게 감돌았다. 사진작가가 인생의 걸작으로 남길 법한 두브로브니크 마을을 뒤덮은 노란 하늘이 떠올랐다. 더욱 신기하게 느껴진 것은 은은한 파스텔 색조 위에 푸른빛 실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서 그림에 다채로운 느낌을 불어 넣었다. 무더기로 지어진 고층 건물의 늪에 빠져 살아온 우리는 푸른 가로수로 장식된 녹음과 훤하게 드러난 붉은 노을을 보고 멍하니 섰다.

    “여기, 우리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인 것 같은데? 일단 짐을 좀 풀고 뭐라도 먹자.”\

    사면이 맑은 흰 벽으로 칠해진 5층 건물은 백색 블라인드를 아래로 펼쳐 내린 것처럼 단순했다. 흰 바탕 가운데 목재로 만들어진 작고 낡은 문이 고풍스럽게 자리 잡았다. 예전에 여관으로 쓰던 것을 게스트하우스로 깔끔하게 개조한 건물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안락함을 안겨주는 1층 조식 라운지가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았다.

    짐을 풀고 아버지와 나는 근처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피로함에는 소주와 함께 매콤하고 달착지근한 파무침을 곁들인 삼겹살 구이가 제격이었다. 우리는 활짝 열어 놓은 문가에 자리 잡아 잔을 기울였다. 술만 마시면 말이 많아지곤 했던 아버지는 살랑살랑 흘러들어오는 푸른 빛 저녁 바람을 맞자 바깥을 차분히 응시했다. 아버지의 시선은 난반사하듯 흩날리며 한 군데에 초점을 고정하지 못했다. 두께를 세 부분으로 달리한 다초점렌즈처럼 배경 전체를 원근과 관계없이 모두 선명하게 받아들여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리려는 동력을 모으는 것 같았다.

    “아버지, 왜 여기까지 와서 운전 연습을 해야 하는 건가요? 어렸을 때 잠자리 바뀌는 게 싫다고 캠핑도 안 가셨잖아요. 제가 그리 졸라댔는데….”

    대춧빛으로 달아오른 안면에 그윽한 표정을 덧씌워 아버지는 답을 회피하려는 듯 보였다. 회피는 적막과 고요로 드러났고, 그것들을 쉽사리 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준협아, 여기 오니 어떻냐?”

    “음. 뭐 좋네요. 제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했죠?”

    “그래, 저기 공지천 건너편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네가 태어났지. 그때 의사가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아빠가 걱정 많이 했다.”

    “제왕절개요?”

    “그래, 엄마 배 밑 부분에 남아 있는 수술 자국 어렸을 때 본 적 있지? 지금은 아주 옅어졌지만 수술하고 나선 굉장히 선명했거든.”

    “아, 네….”

    “아버지는 인생이 유화 같았으면 좋겠다. 미술 시간에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수채화보다 유화가 훨씬 편해. 잘못 그려서 망쳤다는 생각이 들 때도, 물감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덧칠하면 어느새 그럴싸하게 수정되어 있거든. 제자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울상이 되는데, 그때마다 손쉽게 수정해주면 환하게 웃는단 말이지. 저기,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아버지는 끅끅대며 잔을 채웠다 비우길 반복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춘천의 풍경이 한 폭의 유화 같다는 생각.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내일부터 들려올 질책과 험한 말을 생각하니 두려웠다. 모든 춘천 시내의 운전자들이 끼어들기 연습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길 희망했다.

    윌리엄 터너가 그린 역작, 전함 테메레르 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검붉게 물든 강에 떠서 증기선에 힘없이 끌려가는 테메레르 호는 아름다운 춘천의 풍광 속에서 아버지에게 끌려다니며 운전대를 잡는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 * *

    알람 소리가 울렸다. 짜증이 온몸으로 흩어져 널리 퍼졌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기상나팔 소리를 유별나게 휴대전화 알람음으로 설정해두었다. 과음에 뒤따르는 두통은 가뿐히 밀어내듯이 아버지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분주한 소리에 신경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목을 축였다. 물을 삼킬 때마다 신물이 목구멍 위로 조금씩 올라왔다.

    “1층 라운지에서 토스트 만들어 먹고 있을 테니 빨리 준비하고 내려와.”

    “아버지 좀만 더 자면 안 돼요? 피곤한데….”

    “썩 일어나지 못해?”

    어림없다는 아버지의 언성은 상대방을 결빙시키는 물질을 너울성 파도처럼 세차게 뿜어댔다. 과거부터 축적된 불만도 아버지의 굳건한 언성 앞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녹아내린 흔적은 광물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였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1층 라운지로 내려갔다. 빵 굽는 향과 아침햇살로 가득한 라운지는 마시멜로처럼 포근한 느낌을 자아냈다. 토스트와 모닝빵, 딸기잼을 챙겨 커피 추출기로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 한 잔, 나 한잔. 커피가 종이컵에 도르륵 귀여운 한 줄기 폭포가 되었다. 로스팅된 원두가 머신을 통해 향긋한 커피로 산출되듯, 춘천을 거치며 부족한 자신을 극복하여 새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랐다.

    남춘천역 앞 영서로는 통행량이 많아서 차로 변경과 유턴 연습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차로 변경이 익숙해지면 좌회전과 우회전 연습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익숙해지지 못할 시에는 점심이란 없다면서, 아버지는 절반의 장난도 섞지 않고 엄포를 놓았다.

    서둘러 옷을 차려입고 나가자 아침햇살이 은은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실버 라이닝. 눈이 부시지도 않고 적당히 흐린 중용의 맑음은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라 여겼다. 아버지는 경쾌한 맑은 하늘을 향하여 출발의 방아쇠를 당기는 말을 했다.

    “뭘, 넋을 놓고 있어. 어서 운전석에 앉아.”

    분위기는 갑자기 전환되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친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발표했던 순간의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지금 뭐 해? 그렇게 하면 얼마나 위험한 줄 몰라?”

    아버지의 연이은 질타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질끈 깨물 뿐이었다. 신록이 춤을 추며 아버지와 나를 구경했고, 날씨는 무심하게도 너무나 화창했다.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3차로에서 4차로로 차로변경을 하려고 방향지시등을 켰다. 오른쪽 차로 뒤편의 운전자는 거리를 두며 먼저 가라는 신호로 속도를 줄여주었다. 차로 변경의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황, 그런 안정적인 상황에서도 끼어들기가 두려웠다.

    아버지의 ‘지금이야 어서 가’라는 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얼어붙게 했다. 조수석 쪽 방향지시등의 규칙적인 깜빡임에 맞춰 모든 신경이 펌프질했다. 오른쪽 뒤 차의 운전자는 기다리다 못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필 그 순간 나는 용기를 내어 오른쪽 차선으로 핸들을 틀었다.

    빠아앙, 신경질적으로 길게 나오는 경음기 소리에 놀라 핸들을 다시 왼쪽으로 힘껏 틀었다. 차량의 뒷바퀴가 순간적으로 접지력을 잃었다. 무모한 오버스티어의 반복으로 뉴스로만 접하던 피시테일 현상을 적나라하게 체험했다. 아버지는 브레이크를 밟지 말라고 침착하게 말하며 오른손을 핸들에 얹어 좌우로 부드럽게 조향하여 차를 안정시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는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멈추어 있었다.

    “젊은 나이에 황천길로 하이패스 끊고 지나갈 일 있어? 상대방의 신호를 잘 읽고 모든 조건이 갖춰지면 확실하게 들어가야 해. 모호한 태도가 큰 사고로 이어져.”

    “네….”

    “뭐 이리 소태 씹은 표정 짓고 있어? 한 번 더 끼어들기 연습할 테니 정신 차리고 좌측 깜빡이 켜. 차 오는지 사이드미러로 확인하고 왼쪽으로 빨리 들어가.”

    운전석 사이드미러를 흘끗 바라보았다. 바로 옆 차로에서 오는 차는 없었다. 왼쪽으로 핸들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옆 옆 차선에서 미확인된 물체가 기습적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왼발은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신의 모든 면적을 브레이크에 접착시켜 밀어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출렁거림이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사선을 그으며 칼치기를 한 운전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저런 미친놈이. 야, 너도 잘 봐야 할 것 아냐? 옆 차선만 보지 말고 숄더 체크를 하면서 옆 옆 차선까지 봐야지.”

    “그 순간 어떻게 그걸 봐요. 옆 옆 차선에서 갑자기 가로질러 오는데.”

    “운전의 완성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냐? 완벽한 방어운전 아니냐. 위험천만한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피해 가는 것이 방어운전의 정수 아니냐. 경험으로 위험 상황을 하나하나 새겨. 다시 깜빡이 켜고 왼쪽으로 빠져나가자.”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호통은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의 싹을 한오라기씩 태워버렸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유명한 OST가 떠올랐다. 심장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끼어들기는 계속해서 잘되지 않았다. 연속되는 호통과 그것을 견뎌냄의 반복 속에서, 끓어오르는 오기와 두려움이 뒤섞여 회반죽처럼 질척였다. 아버지는 모든 걸 잘하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사실 아버지는 모든 걸 어느 정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삶을 택한 아버지는 여러 방면에서 평균 이상의 몫은 거뜬히 해주었다. 결점을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 멋있다기보단 더욱 얄밉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어휴, 그만하고 막국수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겁이 많아서 뭘 하겠어. 약사명동 쪽으로 차 돌려라. 숨은 맛집이 있어. 막국수 한 그릇에 운전 실력이 늘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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