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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Sep 09. 2024

정의 구현(완결)

7편

* * *

    풀코보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도서관으로 가달라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러시아의 수도로서 그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에는 각자가 지닌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믿었다. 신라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 경주와 비슷한 향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지낼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가까스로 나탈리아를 찾을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택시는 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멈췄다. 눈 덮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는 마음 한구석의 응어리를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택시 요금을 내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그마치 2년 만이었다. 나탈리아를 만났다는 실감이 전신으로 울려 퍼졌다. 코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 곳곳에 슬픔이 짙게 고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탈리아 씨, 오랜만이에요. 추울 것만 같던 러시아는 제법 따뜻하군요.”

    “거짓말도 하시네요. 가까운 카페로 가요.”

    추운 날의 커피가 그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한 자 한 자 익힌 러시아어라고 느껴졌다. 나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냈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갑자기, 뭔가요?”

    “이거요. 2년 전 당신을 둘러싼 소문의 전모를 밝혔어요. 그 사이코패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동영상은 여기 있어요. 그동안 그놈 몰래 녹음한 녹취 자료는 충분합니다. 당신 허락을 받고 언론에 진실을 알리려고 해요. 아마 신문에 대서특필 되겠죠. 이건 지속해서 따라다니는 학교폭력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키고도 죄책감 없이 장난만 치고 살아간 대가를 치러야죠.”

    “윤성…, 저는 그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요. 그리고 저만 잊으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당시 그 누구보다 억울했잖아요. 상처투성이가 되어 떠나는 당신을 눈앞에 두고,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푸시킨은 사랑하는 사람의 명예를 위해 곧바로 목숨 건 승부를 겨뤘지만 저는 진상을 파악하고도 2년을 흘려보냈네요.”

    모든 말은 러시아어로 쏟아냈다. 그녀와 소통하기 위해 준비한 단어 하나하나가 답답했던 마음속에서 꿈틀꿈틀 막힌 곳을 틔우며, 2년 전부터 무지근하게 눌러왔던 그녀에 대한 빚을 녹여나가길 바랐다.

    휴대전화 앱을 켜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내 휴대전화를 말없이 받아들고선, 손을 떨며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즉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주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그나저나 러시아어를 엄청나게 잘하시네요. 한국에서 저를 알고 지낼 때만 하더라도 인사밖에 몰랐잖아요. 여기는 어딘가요?”

    “경주라는 곳이에요. 제 고향이죠.”

    “아, 여기가 당신이 말했던 경주구나. 서울과 다른 매력이 있네요. 모스크바랑 상트가 다르듯이요. 여기는 불국사 맞죠? 이건 뭐죠?”

    “관음보살이에요. 저기, 나탈리아… 제가 종교는 없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결국 신에게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당신을 생각하며 관음보살님께 모든 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로 잡아달라고 기도했어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미안함에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여태껏 그녀의 시선만큼 마음을 내리치는 존재는 없었다. 더욱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나요?”

    그녀는 마음이 좀 풀린 듯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떤…?”

    “연애는 문학의 무덤이란 생각을….”

    가벼운 입바람을 불며 잔잔하게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거창하고 허세가 가득한 하나의 경구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신과 커피 마시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해도 될까요?”

    나탈리아는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어린 시절 불국사에서)

    에이 손오공보다 센 게 어딨어요. / 야, 서유기 한 번 읽어봐. / 안 읽어도 알아요. 손오공이 삼장법사랑 같이 불경을 가지러 가잖아요? 가는 곳곳 악귀가 득실거려도 손오공이 다 이겼어요. / 야, 인마. 그런 악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다 관음보살님이 계획한 거야. 손오공이 결국에는 부처가 되잖아? 다 보살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말했다. 아버지의 제멋대로인 해석을 듣고선 유치원 친구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오공은 관음보살의 손바닥에 안에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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