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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Jul 05. 2024

이리에 아키라,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

1. 국가라는 존재

 세계의 역사를 글로벌한 관계로 분석하면, 글로벌한 관계는 국가라는 존재나 그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본래 인간에게 국가는 다양한 관계 중 하나의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지구에 사는 인간 대부분에게 국가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국가란 행정기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리(경계선)와 역사(과거)로 정의되는 인간 집단이며, 국가라는 단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관계들과 비교하여 절대적인 존재였다. 

 정부 기구와 시민 사회가 함께 작용해야만 근대국가가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조직이 인간사회의 존재로 인정된다. 물론 이는 서유럽의 여러 국가를 모델로 하였다. 하지만 1870년 이후에는 이러한 모델이 세계각지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근대 국가가 국내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네트워크와 어떤 관계를 구성하였는가? 예를 들어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는 종교와 정치라는 두 개의 인간관계가 함께 존재했던 것이며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20세기 초 이러한 근대국가는 유럽과 미국을 시작으로 약 50여개가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식민지들은 독립을 달성하고 197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전 세계에 200개 가까운 국가가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오늘날까지 여전히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국가라는 존재는 인간네트워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가 되면 글로벌화의 파도가 세계 각지를 뒤덮게 된 시점부터 글로벌한 관계가 가속도를 증대하면, 국가를 형성하는 권력 기구와 시민사회에서 전자가 약해지고 후자가 강해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2.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

 근대 국가는 19세기 이후 조금씩 ‘큰 정부’로 가는 경향이 점점 증가하기시작 했다. 이는 국제관계의 긴장 때문이며, 동시에 복지국가, 즉 정부는 국민의 교육, 건강, 복지 등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이 일반화된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 시대였다. 민주주의 국가는 물론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중앙정부와 행정기구의 확대를 가져오는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큰 정부’적 경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층 더 박차를 가해졌다. 이는 냉전 시대 미·소 양국이 ‘안전 보장 국가’를 목표로 하였고, 사회 복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국가와 개인간의 거리를 한층 더 좁히기 위해서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사회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1950년대에는 국가와는 다른 차원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이 시민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침투해 있다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것이 명확해지는 것은 1950년대 이후 ‘공민권’을 둘러싼 연방 정부의 방침전환이다. 전통적인 견해는 사적으로 인간관계를 만들더라도 공적인 기관의 권한이 관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는 1950년대 이후로는 공적질서를 시민간의 관계보다 우선시키는 경우가 생겨났다.

 시민 사회에 대한 국가의 관여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유럽의 민주주의 여러 국가에서도 ‘큰 정부’로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60년대 유럽에서의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일본에서도 사회 복지국가를 목표로 하였으며, 일반 시민이 자발적인 관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많은 국가에서 정부와 시민간의 관계가 밀접해짐과 동시에 국경을 초월하여 여러 종류의 관계도 지금까지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규모로 형성되어 갔다. 경제면에서는 이미 글로벌화가 진행되었고 상호의존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자 할 때, ‘큰 정부’는 어떠한 대응을 할 것인가? 미국 주도하의 유럽 등은 적극적으로 경제의 글로벌화를 촉진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은 철저히 저항하였으나 1970년대 냉전 이후에는 국내경제를 개방 하게 되었다.

 경제의 글로벌화가 확실한 흐름이 되면서 국내의 구조가 국제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관계가 국내의 질서를 변화시켰다. 국내의 ‘큰 정부’는 국제적인 흐름에 역행하고 ‘작은 정부’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글로벌화도 국가도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문제는 그 양자 간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다. 

 본래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방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그 재원이 세금만으로 불충분한 경우가 많으며, 국가는 빚을 지거나 증세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복지정책을 이어나가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큰 정부’로 상징되는 정부 주도형의 국내 정책은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과연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큰 정부’에 대한 염려가 1970년대 이후 각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당연히 ‘무엇을 위한 정부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그것에 대한 한 가지 대응책이 ‘작은 정부’론으로 이는 복지국가를 그만두고 이전의 ‘야경국가’로 돌아가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야경국가론이라는 것은 국가의 유일한 또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경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래 18세기 애덤스미스 등이 주장하였다. 이는 그것으로 돌아가자는 견해로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국가와 국가 간의 경제관계를 기초로 생각하고 있었던 18세기와 달리 20세기 후반 글로벌한 경제에서는 국가보다 기업이나 개인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전 세계의 시장 경제가 자발적으로 움직이면 큰 부를 만들어 내고, 더욱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든다는 견해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는 경제에 대해 개입을 최소한(작은 정부)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냉전의 긴장도 완화되어 ‘작은 정부’론도 받아들여지기 쉬운 분위기였다. 이와 함께 글로벌화는 국가의 통치가 아니라 세계의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국가의 틀을 벗어나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각 국가와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보기 전에 식민지가 붕괴된 이후 출현한 신흥 국가가 글로벌화의 파도에 흡수되어 어떻게 국내 제도의 재구축을 하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 신흥 국가들의 선택

 20세기의 전반에 전 세계에서 주권 국가라고 불리는 국가는 50개국 정도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후 대부분의 식민지가 해방되고, 새롭게 독립한 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지도자의 목표로 하는 것이 ‘강대국’이라는 불리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국민국가였다. 

 하지만 순조롭게 정치와 사회 간의 관계가 정착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이러한 이유는 국내 전체의 관계보다 각 지방의 관계(종교, 언어, 종족, 혈연 등)가 더욱 강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안정은 근대 국가의 필수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를 둘러싼 네트워크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말해 주고 있다.

 정치의 안정, 부패의 배제, 국민의 신뢰 등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럽·미국형은 권력이 일부 지배 계급이 독점하여 민중과 분리되면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국·소련형은 1당 독제를 통해 거버넌스가 명확해지고 부패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민주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 정당의 독재도 아닌 정치제도가 각지에 나타나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글로벌화의 진행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글로벌화에 보조를 맞춤으로써 정치를 안정화 시키려는 국가가 있다면, 반대로 세계의 풍조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국가도 있었다. 다만 그 어느 쪽도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국가라는 존재 자체의 무게가 하락하고 있다.  이것이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세계의 하나의 특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부패문제이다. 글로벌화로 세계 각지의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게 되면서, 관료나 정치가와 유착 가능성이 발생한다. 그러한 부패에서 볼 수 있는 거버넌스의 기능 부전은  특히 인권 문제, 환경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영향을 초래한다. 

 경제면에서 지구 전체가 다양하게 관계를 구성하게 되는 한편, 정치면에서는 많은 종류의 국가 나타나고 있다. 근대세계에서 기본적 존재였던 국가가 더 이상 그런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4. 비정부기구의 독립성

 비정부기구가 국가나 정부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운영자금에서부터 예속되어서는 안된다. 필자가 가입한 각종 문화예술 조직의 운영자금이 회원의 연회비와 기부 그 이외에는 일부는 공적비용의 원조를 받고 있다. 하지만 공연과 전시에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정부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몇몇 그러한 국가나 정부에 예속되지 않고 운영되는 문화조직의 사례가 있지만 이는 매우 극소수이며, 현재 어려움에 처해있기도 하다. 대부분 국가나 지방정부의 원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운영자금에서 그러한 비중이 크다. 그러다보니 운영자금을 주는 곳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친정부, 친국가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의 경우처럼 회원의 연회비와 기부를 중심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해야지 본래의 가지고 있는 비정부기구의 독립성이 저해 받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방문화원의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5. 파워게임의 한계

 세계의 역사는 지금까지 국가위주의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생각할 때 국가를 중심으로 다루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똑같이 국제관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시야가 너무 좁고 한정된 방법이다. 각국 국내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국경을 초월한 관계가 밀접하게 되어 가는 시대에 이제는 ‘외교’보다 ‘내교’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현상이 눈에 띄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이상주의적인 국제관계론이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이상주의적 해석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냉전에 이르는 ‘현실’과 너무 거리가 있었으므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1940년대와 50년대는 현실주의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역사학에서 다시 이상주의가 내셔널리즘 중심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부활하여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국제관계에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힘이라는 측면과 사상, 이상, 감정과 같은 문화적인 측면이 있다. 이 두 가지가 가끔 합치는 경우도 있지만 본래는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잠재적인 대립이나 항쟁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반해, 후자는 세계의 국가들이나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전자를 하드파워, 후자를 소프트파워라고 하여 소프트파워야 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하였다.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화적인 국제질서의 구조는 군사력이나 외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국익’의 고수와 발전이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의 개념이 만들어낸 ‘파워게임’은 거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데도, 여전히 그것에 집착하는 정치가나 평론가가 보이는 것은 왜 그럴까? 이는 현대 세계의 도래를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진부한 파워게임의 틀에 얽매여 다루어지고, 세계는 여전히 국가 단위로 움직이며, 특히 강대국이 하는 대로 되어 버렸다는 식으로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주권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단위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와 과거를 혼동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현대 세계에서는 국가 그것의 성격이 변하고, 국가 밖의 인간 집단 그리고 네트워크가 영향력을 더욱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이해를 하는 것은 옛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는 쪽이 새로운 관점을 수용하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태도일 것이다

 ‘국익’이나 ‘파워게임’과 같은 틀에서 국제관계를 다루는 타성으로부터 점점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은 내셔널리즘이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가 있는 이상 내셔널리즘이 사라져 없어지지는 않는다. 근본적으로 내셔널리즘과 대치할 만한 것으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가 생각난다. 여기에 ‘국경을 초월하는(Transnational) 것’ 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규모적인 측면에서는 전 인류가 아니라 주변 국가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며, 조금 더 폭을 넓혀 대서양이든가 동아시아 등의 지역에서 관계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은 지역주의(Regionalism)라 불리는 것으로, 21세기 후반이 되면, 편협한 내셔널리즘이나 국가 간의 무의미한 적대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에서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6. 지역 공동체의 탄생

 국가와 국가 간의 쓸데없는 대립과 항쟁을 방재하기 위하여, 이웃 국가 간에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좀 더 포괄적인 지역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내셔널로부터 글로벌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혹은 양자를 연계시키는 접점으로서의 지역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공동체 중 빠르게 구체화된 것이 유럽공동체이다.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유럽 철강·석탄공동시장, 유럽경제공동체를 만들었고, 이후 영국 등이 참가를 거쳐 유럽연합이 탄생하였다. 유럽공동체의 특징은 가맹국간의 관세 철폐를 비롯해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이민, 환경, 인권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공통의 정책을 만들려고 하였다. 

 유럽공동체는 공통의 이념에 따른 공동체라고 여겨지고 있다. 자연환경이나 인권 옹호에 머무르지 않고 가맹국은 유럽이라는 개념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그와 같은 단계에 이르지 않았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틀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20세기 후반 이래 활발해졌다. 그 좋은 예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다. 유럽과 달리 원래 하나의 문명지역, 공통된 역사의 장소로서의 아시아라는 개념은 없었다. 먼저 나타난 것은 서양에 대한 동양(비서양)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현실세계에서 반영된 것이 일본이 구상한 대동아공영권 구상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아시아 진출을 정당화하는 범위를 넘지 못한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히려 분열해 버린다.

 아시아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지역 공동체로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이 탄생한 이후이다. 여기에 여러 회원국의 가입과 최근 한·중·일이 추가하는 등 확대 되고 있다. 여기에 자유무역협정 혹은 경제연계협정 등을 통한다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을 포함한 경제 공동체 형성도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나아가 태평양 연안의 북중미, 남미국가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로 될 가능성이 있다. 그와 같은 흐름으로 1989년 창설된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회의)이 있다. 퍼시픽림 혹은 환태평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현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TP)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유럽연합보다 우위에 서지도 열세에 있지도 않은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유럽연합처럼 문화나 사상을 공유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시아·태평양 안에서 공유할 수 있는 역사도 있지만 침략국과 피침략국 사이에서의 관계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역사 해석’은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역사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적을 공부하고 현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공통적인 ‘해석’이 없어도 역사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높아지면 아시아·태평양 지역도 유럽과 같이 ‘기억의 공동체’로서 자각이 생길 것이다. 세계의 다른 지방도 각각 공동체로서의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글로벌화하는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지역적인 통합으로 향하고 있다.     


7. 국제주의의 도전

 국제주의의 흐름은 근대 국가가 출현하기 시작한 17세기경부터 유럽에서 나타났다. 국가 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고 만약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도 그 범위나 피해를 가능한 제한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국제법으로 구체화 되었다. 물론 전쟁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 말하자면 평화로 향한 움직임도 이전부터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으로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제적인 제도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려고 하는 움직임도 19세기 말부터 나타났다. 상설중재재판소, 국제연맹, 국제사법재판소가 국가 간의 분쟁 해결을 위해 생겨나게 되었다.

 내셔널리즘이 각각의 국익 추구를 근본적인 명제로 다루는 것에 대해, 국제주의는 국제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안정이 선결과제라는 사상이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우리들의 세계’가 그 시야에 있다. 그것이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원래부터 있었다. 만약 어떤 국가가 평화나 국제 협조를 믿고 추구하였다 하더라도 다른 국가가 같은 태도로 있다고 제한할 수 없다. 역사가도 똑같이 과거의 전쟁도 평화도 근본적으로 힘의 관계라고 보는 경향이 주류였다. 내셔널리즘이 국제주의보다 우선했다는 의미이다

 국제주의를 역사가가 신중하게 다루려 한 것은 20세기 말부터일 것이다. 냉전기에는 현실주의의 분석틀만 가지고 국제정세를 취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전 종결은 단지 미·소의 힘의 균형으로 이해해 버릴 것이 아니라, 양 국민의 긴장 완화에 대한 희망과 핵무장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운동 등 넓은 의미에서 국제주의와도 관련 짓지 않으면 안 된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각국 간의 접촉, 교류, 우호관계에 대한 공통의 희망 등이 초래하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국제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전의 현실주의적 국제관계론의 틀은 그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물론 내셔널리즘이 아직 계속 있으며, 전통적인 국익의 충돌도 자주 발생할 수 있으나 국제주의로 이를 해결하고자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에 대한 국제주의의 도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8. 세계를 바꾼 인간관

 국제주의나 지역주의는, 국가 간의 협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 있는 사상은, 글로벌리즘(세계주의) 또는 트랜스내셔널리즘이라고 불리고 있다. 글로벌리즘은 미국화와 동일하지 않으며 이러한 견해는 현대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된다. 글로벌화되고 있는 여러 국가들이 이루고자 하는 하나의 목표를 세계주의라고 하면, 그것은 종래의 국가 단위의 세계와는 다른 것을 이루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글로벌리즘, 즉 지구 전체의 번영을 목표로 하는 개념은 국익 추구를 지향하는 내셔널리즘과 반대된다. 국가단위가 아닌, 전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세계주의라는 번역이 적절할 것이다.

 전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도, 그리고 어느 문화에서도 존재한다. 그 중심적인 관심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글로벌한 시대에, 각각의 국가나 사회를 떠나 보편적인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전 인류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내셔널리즘에서는 인간이라 해도 보편적인 존재가 아닌, 개별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의미가 근본이었다. 반면에, 비국가 정체성, 즉 성별, 종교, 인종 등을 강조하는 견해를 가지면, 이번에는 인류의 다양성이 강조되어,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개념과 연결되기 어렵다. 

 전쟁, 피난, 인구이동을 통해 어떤 나라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적이든 같은 편이든 인간은 모두 인간인 것이고, 죽을 때 국적은 관계없다. 누구에게나 생명의 존중이라는 원칙은 공통적인 것이고, 그 원칙을 토대로 서로 관계해 나가는 것이 평화로운 세계의 중요한 축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서 구체적으로 되었다. 인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리로서, 그것은 국적, 성별, 인종 등과 전혀 상관없다. 그러한 신조를 국제사회가 받아들이게 된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권의 원칙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간의 차이, 차별, 격리, 편견이 아닌, 공통성, 공동생활, 협조 등이다. 관계의 역사 속에서도, 이정도로 강력한 사상은 그 이외에 없을 것이다. 

 인권 개념이 더욱 보편적으로 된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이며, 그 배경으로는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의 공민권 운동이나,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탄생이 있다. 특히 미국의 변화는 현저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던 미국은 1960년대 접어들며 큰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이전부터 있었던 공민권 운동이 민주당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동시의 반체제 운동이 활발해지게 된 것도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여성해방운동이나 ‘블랙 파워’운동이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이 의미하는 것은, 글로벌 커넥션, 즉 세계규모의 연계에 지나지 않았다.

 각국에 차이는 있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반체제 운동이 가지고 온 것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근본적으로 어디서 태어나 어디에 살든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세계는 하나, 인류도 하나’라는 인권인식을 공유하는 시초가 된 것은 틀림없다. 물론 ‘세계는 하나’라는 개념은 냉전기 서방측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권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져야 했다.

 반전운동이나 인권운동의 영향으로 1960년대의 인권이라는 ‘이상주의’를 표방한 외교 방침을 모색하게 되었다. ‘인권 외교’는 냉전을 대신하는 국제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권에서 민간운동과 연관되어 데탕트를 가져왔고, 이윽고 냉전의 종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하나의 성과가 1975년의 ‘헬싱키 선언’이다. 1980년대 이후 각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고양을 가져왔고, 내전 그 자체를 와해시켰다.

 국제관계로서의 냉전은, 본래 글로벌한 세계와는 상대되는 것이고, 인권 그 밖의 힘이 강해질 때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헬싱키 선언’에서 참가국 모두에게는 인권의 존엄이 결정되었을 시점에서, 역사는 ‘냉전의 시대’로부터 ‘세계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 남미, 중·근동 각지에서 민주화 운동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정치 권력자의 압정에 의해 억압되는 일도 많다. 하지만 한번 인권운동에 눈을 뜬 사람은, 글로벌한 연계라는 이상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9. 다양한 인권 개념의 영향

 모든 사람에게 건강한 생활을 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인권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국제 사회가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인권 사상, 그리고 그 근본에 있는 ‘인류는 하나’라는 인간의식이, 현대 세계의 형성에 미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하다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예로써,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 그리고 소위 장애자에 대해 정치나 사회의 이해도를 들 수 있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감소하고, 일반 시민과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게 된 것은, 현대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장애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인간으로서 ‘정상인’과 동일하게 대우받게 된 것은, 미국과 유럽에서조차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고 평등하다는 의식이 고조되어, 단지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동일한 인간성을 가진 개인으로 접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도 현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장애인이라고 한 단어로 표현하더라도, 그 내실은 여러 가지이다. 신체적 장애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회에 진출해서도 충분히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 왔다. 심각했던 것은 지적장애자의 문제이다. 그들은 골칫거리로 여겨지고 격리되어, 특수 시설에 수용되는 일이 많았다. 또한 사회의 평균적 지능 수준 이상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저능’한 사람은 단종해야 한다는 ‘과학적’ 견해조차 발표되었다. 우생학이다. 그러한 것이 20세기 후반부터 인권의 개념이 지적장애인에게도 적용되어 ‘정상’인 사람들과도 교류하는 기회를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21세기 접어들어 세계에서 더욱 현저한 것은, 많은 나라에서 고령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노인’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보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령자의 신체적·정신적인 문제는 ‘노인병’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들에게도 인격이 있고, 그 대부분이 알츠하이머병 환자로 의학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고령자는 예외적 존재가 아닌,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보이게 된다. 고령자도 어린이, 청년, 장년의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다.          


10. 트랜스내셔널리즘

 이와 같은 새로운 인간관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비정부(국가) 행위자이다. 현대의 세계에서는 트랜스내셔널한 연계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상당히 많아지고 있다. 트랜스내셔널은 국경을 초월함과 동시에, 국가 사이를 연계하여 새로운 성격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연계를 촉지하려고 하는 것이, 트랜스내셔널리즘이라는 개념이다.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도 글로벌 히스토리와 같이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영향력이 커진 것은 최근 20년 정도의 일이다. 어떠한 주제를 연구하든지, 먼저 트랜스내셔널한 틀 속에 넣어 보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또한 각국의 역사를 트랜스내셔널한 시점에서 파악하고자하는 것도, 현재는 상식적으로 되어 있다.

 세계 전역에 동시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상호 관련된 것이기에, 그 연결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역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의 하나라는 생각은 역사가 사이에서 매우 짧은 기간 사이에 받아들여졌다. 요약하자면 트랜스내셔널리즘이라는 개념은 글로벌리즘을 더욱 구체화하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본래 글로벌한 것이고, 특히 근현대사는 트랜스내셔널한 틀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점차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이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트랜스내셔널이라는 단어는 역사서의 타이틀 등에도 빈번하게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트랜스내셔널리즘이 역사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지식인 더 나아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세계도 더 한층 상호 의존적,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11. 낙관론인가 위기론인가

 환지구적인 결합이 불가역의 흐름이라고 서술하고 있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대선의 트럼프 당선, 일본의 군국주의 개헌 등 이에 반하는 흐름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환지구적인 결합을 강조한다. 이는 인류가 세계는 하나, 인류에 대한 공동체의식에 대한 의식 같은 고도의 사유와 학문적 지식이 있어야 하며, 인간은 도덕적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의 바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낙관적인 시선에서 트랜스내셔널리즘을 바라보는 것인가? 혹은 현재의 국가 단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자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위기감에서 나타난 것인가?     


12. 트랜스내셔널리즘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은 무엇인가

 역사라는 것을 볼 때 국가나 혹은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살피면 그 흐름이나 동인을 살피는 것은 매우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많은 부분 그러한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트랜스내셔널리즘에서의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그러한 흐름에서 역사를 이끄는 동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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